과거에 썼던 것의 백업.
그 날따라 점심시간의 크루는 썰렁했고, 그래서 혼자 남아있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승무원 크리스티나 시에라는 잇소리를 내며 구급상자를 들고 왔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 것을 내려놓은 그녀는 제법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약이며 붕대같은 것을 꺼냈다. 평소라면 장난기어린 아이같은 표정을 지을 크리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의 앞에 이 것 저 것을 늘어놓고서 그녀는 난처한 듯 웃고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상처, 보여줘."
그녀답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록온이 양순히 오른 팔을 내밀었다. 팔목 안쪽의 새하얀 피부 위로 검붉은 핏자국이 길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록온은 자신의 것이 아닌양 무감각한 상처를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아마 어제나 그제쯤 입은 상처일 것이다. 어쩌다 그랬더라. 그렇게 나쁜 기억력은 아닌데도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어쨌든 두었으면 그대로 나았을 것이다. 점심시간 맞은 편에 앉아있던 크리스티나 시에라에게 발견되지만 않았어도. 식당에서 상처를 보고 놀라 새된 목소리를 내었던 그녀는 괜찮다고 말하는 자신 앞에서 왠지 모르게 싸늘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별로 대단한 상처는 아니잖아."
"...."
"우왓, 화난 거야?"
"별로. 가만 있어줘."
단답형으로 말하는 그녀는 역시나 의기소침해있었다. 화를 내거나 웃거나 하는 반응을 보여줬다면 뭐라고 반응할 수 있었을 텐데. 크리스의 얼굴은 흘러넘기는 농담이 통하지 않을 만큼 진지했다. 곤란한데. 록온은복잡한 기분을 안으로 밀어넣으며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리스는 묵묵히 상처 위에 굳은 피를 소독한 거즈로 닦아내려갔다. 팔뚝 중간에서부터 시작된 긴 상처를 더듬는 거즈 위로 붉은 기가 옅게 퍼졌다. 상처는 손목 께를 지나 장갑 아래까지 옅게 이어져있었다. 내버려두어도 되는 상처가 아니었을 텐데. 크리스는 혀를 차고 손놀림을 부지런히 했다. 그 손길에 장갑근처까지 닿았을 때, 록온은 순간적으로 그 손을 쳐내버렸다.
"아, 여긴 됐어."
거즈가 팔뚝을 지나 손목위로 올라갈 때, 록온은 저도 모르게 불쑥 말해버렸다. 상처를 닦아내던 크리스의 손길이 멈칫했다. 멈칫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록온은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아, 지금. 해서는 안될 말을 했나. 한층 더 가라앉은 그녀를 보고 있자니 무언가 잘못한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반쯤 당혹한 기분으로 록온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아니.. 벗어도 되긴 하는데. 그냥.."
"..괜찮으니까, 팔 조금만 들어올려줘. 할 수 있는데까지만 할테니까."
왠지 미안해져서 서둘러 벗으려고 했지만 크리스는 묵묵히 거절했다. 방금 전의 싸한 분위기와 다르게 그녀는 제법 길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얼굴에는 평소같은 미소는 잘 비치지 않았다. 실수한 거 맞구나. 속으로 그렇게 한탄하고 록온은 팔을 조금 들었다.
"있지, 록온."
소독약을 바르고 있던 크리스가 불쑥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조금 지나서였다. 왠지 시선을 맞출 수가 없어서 록온은 어깻짓으로 반응했다. 그 반응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붕대를 집어들면서 크리스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문득 그녀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민감하다는 거 별로 안 좋잖아."
"응? 글쎄."
밑도 끝도 없는 그녀의 말에 록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티에리아였다면 빠른 반사신경은 좋은 거라고 단호하게 끊어버렸을 지도 모르지만 록온은 그렇게 가볍게 넘길 수 있을만큼 외곬수인 성격이 못되었다. 자신의 말에 설명이 부족하다는 걸 스스로 알았는지 크리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기 상처에 민감한 거말이야. ..잘 모르나."
"응.."
"조금도 다치지 않으려고하고, 자기 상처를 너무 크다고 여겨서 보호받고 싶어하고 소중히 대해달라고 하고 그런 사람."
"..하아."
"교활한 거라고 해야할지, 약삭빠르다고 할지. 주변 엄청 피곤하게 만드는 타입이라고 생각하지만."
"..."
"- 우리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었어."
불쑥 그녀가 꺼낸 말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다음 순간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록온은 흠칫 놀랐다. 기밀보호 의무를 모르는 것도 아닐텐데도. 록온이 주의를 주듯 손가락을 흔들자, 크리스는 모른척해달라는 양 방긋 웃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상처를 돌보면서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참견하고, 자기는 그걸 애정이라고 믿고. 강요하고 제멋대로고. 힘들지, 그런거."
"..."
"그래서 결국 아버지도 지쳐버렸..던 것같아. 나야 당사자가 아니었지만. 옆에서 보면서 굉장히 싫었어. ..그런데, 뭐랄까."
과거를 떠올리려는 듯 그녀는 미간을 잠깐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과거에 좋은 기억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어린 아이를 두고 섬세한 여자와 그 여자에게 견디지 못한 남자의 가정은 그냥 쉽게 깨져버렸다. 다른 것을 보면서 자신을 채우기에 어린아이는 어리다. 새롭게 찾아온 가족들 위로 남녀의 우는 얼굴이 겹쳐질 때마다 거리를 두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비어있는 채로 자랐던 나날. 되돌아보는 것도 우스운 그런 시간들을 찬찬히 보고서 크리스는 고개를 흔들어 그 기억들을 지워버렸다. 말을 고르듯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씁쓸한 미소가 걸린 얼굴로 록온을 올려다보았다.
"둔해지는 것도 무섭더라."
"..크리스."
"민감한 사람은 어쨌든 자기 상처는 챙겨두니까 돌아볼 수 있어. 하지만 둔감한 사람은 그냥 웃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람 등 뒤에 핏자국이 점점이 떨어져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야."
그녀는 붕대를 상처 위에 감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손은 하얗고 목소리는 그저 나직했다. 그렇게까지 둔감한 녀석이 있을까, 하고 록온이 농담처럼 웃으려는 순간에 크리스는 조용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바라보던 옆사람은, 그 사람이 죽어넘어지고나서야 그걸 깨닫는 거고."
"..."
어떤 것이 더 괴로웠을까. 작은 상처에도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던 나약한 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올가미처럼 얽매여 한사코 놓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와 자신의 일상을 생각했다. 자신은 그녀에게 주어진 위로용의 포장된 인형이었고, 그 가정에서 철저한 외부자였다. 나약한 여자와 나약한 남자가 만들어낸 수렁같은 집. 싫었다. 자신은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채 그들에게서 버려졌다. ..하지만 어떤 것이 더 괴로운 걸까.받아달라고 강요하는 감정을 마주 대하는 것과, 한없이 주려해도 아무 것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감정을 지켜보는 건.
"참는 사람은 굉장할 거야. 아파도 아프다고 하지 않고 자신 안으로 삭힐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없으니까."
"..."
"하지만, 남겨진 사람 입장에서보면."
거기까지 말하고 크리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록온은 그로서는 드물게 대답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 시선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목소리가 차가워졌지만, 생각보다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만에 지나지 않아."
당신은 그렇게 자신의 상처에 아무렇지 않아하겠지. 그리고 살갑게 웃고 따뜻하게 껴안아주고, 이 삭막한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완충제마냥 감싸주는 역할을 하겠지. 내 어머니가 자신을 강요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하지만 아무 것도 받아들지 않는 애정같은 건.
"그런 거, 알고 있어?"
대답하는 대신 반쯤 항복하는 기분으로 록온은 옅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거기에 정면으로 대답할만큼 용기 있는 사람도 못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버릇처럼 보인 미소에 크리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로 숙인 그 입술이 뭐라고 달싹거린 듯 했지만 록온은 애써 모른 척했다. 어차피, 그녀는 틀리지도 않았다. 설령 그 말에 대꾸할 수 있었다고 해도 자신에게는 그녀에게 돌려줄 대답이 없었다.
"다 됐다- 덧나지 않게 조심하구."
어느 틈에 상처 처치를 빈틈없이 끝낸 그녀가 싱긋 웃으며 다 감은 붕대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 때즈음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고마워, 하고 목례를 하고 록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급상자를 다시 갈무리 하던 그녀를 내버려두고 문을 나서던 그는, 문득 막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크리스?"
"응?"
"..고통을 참고 있는 건 아니야."
지금까지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양 새삼스레 돌아보는 그녀를 보며, 잠시 묻어둘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문득, 록온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있었다.
"..무감각해진 거야."
한순간에, 옅은 미소를 지은 록온의 얼굴이 부서질 것처럼 덧없게 보였다. 저도 모르게 손을 멈칫한 크리스는 미소를 떠올려보려 애썼다. 쓸쓸한 미소를 지은 그가 입모양만으로 미안, 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그 어색한 태도를 보며 록온은 잠깐 보여주었던 표정을 이내 지웠다.
"대수로운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그렇게 말하고, 그는 뒤를 돌아보며 장난기 어린 태도로 손을 설레설레 저어보였다. 그 때즈음 자신을 갈무리한 크리스도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약상자 쪽으로 돌아섰다. 크루의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가던 록온이 안으로 들어오던 누군가와 마주친 것같았다. 뭔가 대화를 주고 받고, 록온의 웃음소리가 울리고, 열린 문으로 나간 록온과 교차하듯 리히티가 들어왔다.
"우와, 깜짝 놀랐다- 크리스 씨, 록온이 왜 여기서 나와요?"
막 식사를 하고 돌아온 포만감도 잊은 듯 리히티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구급상자를 정리하던 크리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으응, 밀회랄까~"
"으엑- 농담이죠?!"
"당연하지. 리히티도 진-짜 재미없는 남자네."
"그,그거 죄송합니다..."
몇마디 농담에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려버리는 리히티는 지금까지 이 곳에 떠돌던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같았다. 다행이다. 이 밝은 남자에게 그런 분위기는 별로 어울리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크리스는 짐짓 새침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반응에 바로 울상이 되어버린 리히티가 조금 불쌍해져서, 크리스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냥 상처치료하고,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야."
"와아- 놀랐잖아요, 정말. 응? 무슨 이야기요?"
"으음, 뭐랄까."
반쯤은 눈치채고 있었으면서도 혹시나 하고 전전긍긍하던 리히티는 크리스의 장난기어린 말에 간신히 진정된 것같았다. 크루의 자기 자리에 앉으면서 물어보는 리히티에게, 크리스는 품 안의 구급상자를 한쪽으로 밀어놓으면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숨 죽이고 대답을 기다리는 리히티에게 크리스가 장난스런 어조로 대답을 내놓았다.
"내가, <무조건 록온은 논외>라고 규정한 이유랄까."
"크리스씨~ 무슨 농담을.."
"아아, 정말 좋은 남자가 없잖아. 아쉬워라."
"대체 무슨 소리에요 정말- "
"어머, 중요한 문제야. 좋은 남자는 눈의 보양 몰라?"
"네, 어차피 저야 보양은 커녕 악재죠 뭐. 몰라요 진짜. 그치만 록온은 또 왜요?"
"하지만, 그렇잖아. 나는 못해."
잔뜩 기대했던 답과는 전혀 틀린 대답에 리히티가 순식간에 울상이 되어버렸다. 짐짓 진지하게 대꾸했지만 리히티는 입을 삐죽이면서 자기비하를 했다. 그런 부분에 마이너스를 주는 건데 나아지지 않네, 리히티. 장난스레 웃자 리히티는 한숨을 푹 쉬었다. 또 놀림받는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어보였지만, 크리스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빙긋빙긋 웃으면서 그녀는 덧붙였다.
"나는, 여기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못되는 걸."
"..크리스씨?"
"왜-에? 그런 의미에서 리히티는 그나마 합격이려나."
필요이상으로 차가워진 목소리에 리히티가 당황한 듯 쳐다보았다. 장난처럼 웃어주고, 크리스는 한쪽으로 밀어놓은 구급상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크리스의 말이 장난인지 진심인지 얼핏 구분이 안가는 리히티는 복잡해보이는 얼굴이었다. 감정이 그대로 전해오는 솔직한 얼굴이다.
- 알고 있어?
그렇게 물었을때, 록온은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이 무엇하나 읽어낼 수 없을만큼 차갑게 굳어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알고 있다고 했다.
"아아, 진짜 싫다- 거짓말쟁이는."
"엣, 저는-"
"리히티한테 하는 말이 아니야."
저도 모르게 나와버린 말을 흘려넘기듯 웃고서 크리스는 자기 자리에 올라 앉았다. 계기판의 수치들을 비교하며 톨레미의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리히티의 옆에서 뭐라 우는 소리를 했지만 대충 흘러넘기며 장단 맞춰주는 수준으로만 대꾸하고 모니터 위의 숫자 속으로 신경을 집중했다. 흩어지려는 감정을 밀어넣었다.
‘알고 있어?’
‘응’
거짓말쟁이.
-당신은, 평생 그 말의 의미를 모를 거면서.
fin.
스물 두 살이나 먹은 크리스라면 저 남자의 어디가 어떻게 나쁜지 알 것같습니다.
록온은 정말 좋아하지만 가끔 열받아요. 자기가 준 것들에 전혀 악의가 없었지만, 남이 줬다고 믿은 것들은 결국 하나도 받지 않았던 사람.
인간관계는 상호작용인데, 그 점에서 이 사람은 굉장히 못되먹은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