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에 팬디스크가 나왔다니 본편은 대체 언제였던가..)
1. 아마 요즈음의 착한 어린이들에게는 대체 이 것이 무엇인지 듣도보도 못할 게임이겠으나 저에게는 언제나 마음의 고향이자 시시때때로 차오르는 덕심뽕의 주인공인 아포크리파 제로. 첫만남이 2003년이었으니 어연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발매된 것은 2001년. 내년이면 열 다섯살을 맞는 이 게임은 제 마음의 고향입니다. 애시당초 이거 아니었으면 일본어도 안했을 거고 성덕도 안했을 것이며 이 인생을 살고 있지도 않았을 거에요 정말로.
2.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저는 한 때 모 위키 갱신자로서 열과 성의를 다하던 잉여여서 아포크리항목 제가 만들었어요. 그보다 여성향 게임 항목을 내가 만들었던 거같다(....) 오랜 만에 다시 들어가봤는데 크게 갱신되어있지 않고 따라서 카롤이나 루비가 얼마나 귀여우며 질과 베릴이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베릴이 어떤 사람인지 위키에다 부르짖을 수는 없겠지만.. 여기다가 드문드문 해볼까합니다. 되면 말고 안되도 말고. 캐릭터 하나하나를 모두 소중하게 여기고 연성도 죽을만큼 했고 유년기와 함께 자라온 이 작품에 새삼스럽게 다시 뽕을 맞은 것은 이미 수십번을 들었던 드라마시디 Blue Tail in the cross 때문입니다.
3. 갑자기 데오늬 달비만큼 이야기가 널을 뛰는데 저는 책을 좋아합니다. 어느 정도냐면 R.O.D의 요미코 리드맨의 독서량(하루 17~18권)을 보았을 때 '오 많이 읽네'하고 생각했어요. '말도안돼'가 아니라. 책과 집과 도서관밖에 모르던 중학생 시절 제 독서량은 하루 17권이었습니다 ㅇㅅaㅇ 만화책 빼고 소설책만. 성인이 된 지금도 한달에 24권정도는 읽습니다. 왜 24권이냐면 도서관에서 한번에 빌리는 책권수가 12권이라서 그래요. 대여기간은 2주고요. 보통 주말에 몰아 읽거나 평일에 3~4권 나눠 읽고서 한번에 모아서 반납합니다. 보통은 그 권수 다 못읽는다는 소리는 최근에 들었고 겁나 충격이었어요 아 그렇구나 책 보통 읽는데 시간걸리는 콘텐츠였구나... 아니아니 뭐 그렇게 엄청 대단하고 훌륭한 독서광은 아닙니다만ㅇㅅㅇ;
4. 여튼 그런 제가 독서질의 신 비평을 연 것은 일본에서였습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 원작입니다)를 읽었어요. 이 책에서 등장인물은 저마다의 이점을 위해서 서로 조금씩 거짓말을 합니다. 그야말로 덤불 속.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인간 속내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지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독자들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부분도 남아있고요. 이 책을 처음 읽고나서 행간읽기를 망치로 머리를 패는 충격과 함께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보이는 게 전부 진실이아니구나.
그 전까지 추리 소설을 읽으면 마지막장을 덮을 때까지 진실이 밝혀지기를 얌전히 기다리며 책 속의 인물이 이렇다고 쓰여있으면 이런 인물이라고 믿어의심치않았던 순진한 저에게 눈이 팍 띄이는 사건이었어요. 글로 써놓지 않은 행간 속에 속내가 또아리틀고 있을 수도 있는 거지요.
5. 이 3,4번의 이야기를 왜 길게 했냐면, 10년만에 드라마시디에 들어있던 행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늦었는데 이거 써봤자 이미 작품이 추억의 명작으로 묻힌 후라서 아무도 모를 거야 으아아아아! 싶으면서도 쓰고 싶더라고요. 많은 팬들이 고민했던 장미와 공주와 나의 비유만이 아니라 그 앞부분말이에요. 요약하자면, 이 '양 진영이 합동하여 플라티나를 위해 적을 물리치며 사피루스는 플라티나를 돌봐주고 있는' 이 행복해보이는 사건이 실은 얼마나 일촉즉발의 개싸움 직전이었는가(...)를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 되시겠습니다.
6. 먼저 눈에 띄는 부분. 플라티나가 제이드가 감싸주지 않아서 아프라사스에 의한 상처를 입고서 쓰러졌을 때 제이드는 적극적으로 알렉이 도와주기를 종용합니다. 사피루스와 루비등 알렉진영은 적인 플라티나를 돕는 것을 반대하고 결국 알렉은 혼자 이탈해서 플라티나의 도움이 되기로 하죠. 이 부분의 대사는 이러합니다. (번역이 아니고 걍 쓰는 거라 조금씩 다를 거에요)
카롤 : ..이 잔에 독을 넣는다고 해도 그 왕자는 의심없이 마시겠지요.
로도 : 으엑, 너, 설마?!
카롤 : 농담이에요. 진심으로 듣지 말아주세요.
로도 : 네가 말하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단 말이지!
질 : 하지만 둘다 나오지 않는군.
카롤 : 간식을 전하는 김에 살피고 오겠습니다.
질 : 부탁한다. ..제이드의 동향을 살피는 게 좋겠지.
카롤 : ..그렇죠.
로도 : 뭐야? 제이드한테 뭐가 있어? 그녀석 하반신 취미가 음흉하다던가??
질 : 됐다. 넌 아무 생각도 하지 마라.
카롤 : 바보.
로도 : 뭐야, 가끔은 머리 운동도 해주려고했더니 자기들끼리만 아는 척하기는.
카롤 : 저희들도 모르니까 망설이고 있는 겁니다.
질 : 하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우리들은 단 하나, 우리의 왕자만을 따르고 있다는 거다. 설령 그 남자는 그렇지 않게되는 순간이 와도.
로도 : 뭘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카롤 : (피식) 당연한 소리지요.
알렉을 향한 플라티나 진영의 적대감은 의외로 쉽게 풀리는 듯 보이는데 사실 그 이전에 이 진영 플라티나가 없으면 제이드 목딸 생각이 만만했습니다! 애초부터 알렉의 합류 시점에서 카롤과 질은 아예 제이드를 믿고 있지 않았으며(...) 상황에 따라 제이드가 뒤통수를 칠 경우 적대시할 마음이 왕왕했다는 부분입니다. 새삼스럽지만 니들 사이 진짜 나빴구나! 아니 나라도 나쁘겠지만!
제이드를 향한 플라티나의 조건없는 신뢰와 플라티나를 향한 부하들의 조건없는 충성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목 뎅강 잘려 사라졌을 것같은 저 성격나쁜 참모란!(눈물)
여기 더해서 알렉은 선의로 사람을 믿는 듯하면서도 끝내 카롤이 건네는 차를 마시지 않습니다. '카롤이 저 왕자는 독이 든 차라도 마시겠지'라고 생각했던 것에 반해서 알렉은 성하고 또 정의롭지만, 이 상황이 결코 장밋빛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는 소리에요.
여기 더해서 보다 중요한 뒷부분입니다만 알렉을 데려가기를 언짢아하는 진영 앞에서 제이드는 협력이 필요하다며 알렉의 합류를 강력하게 중용합니다. '무척 강한 적이라서 우리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라며 함께 할 것을 주장하고 '적에게 소금을 보내는 행위'라며 알렉을 응원합니다.
...근데 꼴랑 하나 합류하는 게 그렇게 중요할리가?
애초에 그 수호자들 꽤 순식간에 썰리지 않았나? (후반에서는) 아예 다굴로 한큐인데?
뭔가 쿰쿰한 기분에 뒤통수가 당기려는 순간 알렉진영의 동료들이 나타나고 많은 인원이 적 퇴치를 위해 함께 떠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사피루스는 플라티나의 간병을 하고 있기로 하지요. 무척 아름다워보이는 순간인데, 이 부분 대사말이에요...
제이드 : 당신은 어떻게 할 겁니까, 사피루스.
사피루스 : ..저는 여기 남아 플라티나의 간병이라도 하고 있겠습니다. 다같이 떠나버린다는 것도 이상하고.
알렉 : 그건 그렇지만..
사피루스 : 제이드. 알렉 님을 부탁합니다. 저는 여기 남아 플라티나를 지키겠습니다. 당신을 대신해서. 그러니까 알렉님을 부디.
알렉 : 사피..
사피루스 : 당신의 상냥함은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하시지요. 잊고 있어서 죄송했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언제든 알렉님의 편으로 남고 싶으니까요.
알렉 : 응, 나 다녀올게.
제이드 : 잠든 사이에 목을 노리지 말아주세요.
사피루스 : 당신도 아니고. 그런 짓 안합니다.
알렉 : 그럼 가자 다들!
제이드 : ..하아. 그러면 적당히 힘내볼까요. ...... 하기사 그렇게 생각대로 잘될 리가 없었군요.
...그러니까 이 평화롭게 떠나는 부분의 행간을 잘 읽어보면 제이드는 자신의 진영이 어색해하는 것도 무시하고 알렉의 협력을 사탕주고 애꼬시듯 적극적으로 지원했었고, 거기에 혼란을 틈타서 뭔가 할 생각이 만만했고 사피루스는 그런 놈인 걸 알아서 알렉이 합류하고 싶어했던 의견을 무시했는데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자기 진영 다 몰고 오되 너는 알렉님 곁에 있지만 나는 플라티나 옆에 있으니 어디 한번 해보시지하고 우아하게 돌려까기를 시전한 겁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적 왕자를 간호하는 사피루스가 아니라, 네 왕자 곁에 내가 남았으니 내 왕자에게 허튼 짓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다시 말하건대 플라티나를 인질로 잡고 수 틀리면 플라티나 목따는 짓도 하겠다는 협박을 가한 이 흉흉한 상황...!! iiorz
제이드는 상황이 잘 돌아가면 알렉을 제거할 생각이었겠죠. 사피루스는 그걸 알면서 알렉을 보호하러 플라티나 옆에 남은 거고. ..이 얼마나 자기 욕구에 충실한 생명체입니까 그런 것인가 천사란 그런 것인가.. 그리고 그런 모닝 슈타를 붕붕 휘두르면서도 전개자체는 어디까지나 하호하는 양진영 컨셉으로 몰고가는 이 마성의 게임이여...
7. 뜯어보면 뜯어볼 수록 아포크리파는 맛이 깊어지는 것이, 얼핏 부드러워보이는 대부분의 순간들이 사실은 냉혹하리만치 잔인한 타산들이 들어가있습니다. 애초에 이 게임에서 내 귀여운 왕자님들은 배신의 순간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요. 알면서도 눈을 감기로 택했죠. '항상 왕자님의 편으로 있고싶다던' 사피루스가 4장에서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이 게임 참 믿을 놈 하나 없는... 그런... 애초에 베릴부터가 아프라사스 멸족의 주인공이자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결말을 짓기 위해 그 현실을 방치하고 있었던가... ..와... 허.. 참...
8. 아무튼 간만에 아포크리파를 들었더니 그 복잡미묘 쌉싸름한 맛을 새삼 온몸으로 느끼고 애정이 차올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덧붙이면 세월 속에서 사라지고 또 다시 태어나는 십자가의 의미도 그러했습니다. 베릴은 가족을 죽인 아프라사스를 원망했지만 그와 마주했을 때는 가족의 무덤조차 찾지 못할만큼 아득한 과거로 느끼고 있었죠. 세레스가 표식을 남기기 위해 베릴의 가족들이 묻힌 곳을 물로 덮어버렸을 때 그건 하나의 맺음이 되었을 겁니다. 가득한 과거는 수장시키고 이제는 세레스와 함께 살아간다는. 하지만 거기서 연쇄를 끝나지 않죠. 세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그에게 장미를 사랑했던 누군가가 있었기에 세레스는 베릴에게 장미를 제외한 다른 꽃을 권했습니다. 둘은 과거를 묻고 새로운 시작을 함께 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무한한 생명은 이어집니다. 연쇄는 이어져서 사랑은 다시 무너지고 비극은 도래합니다. 그 사랑했던 세레스를 제 손으로 멀리 떠나보내버린, 망가지고 다친 이후의 베릴은 이미 가족의 죽음과 연인과의 이별이라는 두번의 비극을 겪었어요. 그런데 이제 지칠 대로 지친 그의 앞에 그와 같은 얼굴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이가 있는 겁니다. '장미가 좋아. 예쁘고 색도 많고 그것밖에 꽃의 이름도 모르는걸.' 여기 또다른 시작이 있는 거지요. 그 것도 비극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 순간이. 베릴에게는 그 것이 구원같았을 거겠고. 계절은 돌고 돌고 잔혹하고 아프고, 그래도 아름답고. 여러가지로 좋아하는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