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왜 여기 와 있습니까.'
'엇, 막간의 휴식이랄까.'
'지금은 분명 훈련시간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으음, 거야 그렇지만~ 좀 봐주라, 티에리아.'
트레이닝 룸과 이어지는 복도 구석에 반쯤 몸을 숨기고있다시피하던 그는 낭패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보급용의 미지근한 커피팩을 들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그 것을 쏘아보자, 그는 무척이나 곤란한 얼굴로 난처하게 웃었다. 어이없는 기분 절반과 짜증 절반 속에서 뭐라고 소리치려 했던 감정이 그 표정에 그만 녹아버렸다. 장갑낀 손으로 뺨을 살짝 긁으며 그는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살짝 쉬고 싶을 때도 있는 거거든, 그게.'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마이스터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렇지만도 않은 게 쉬고 나면 능률이 올라. 진짜다 이거? 푸욱 쉬고 나면 몸이 더 힘을 낸다니까.'
'..변명으로밖에 안들립니다.'
'어, 진짜야. 의심가면 한번 같이 쉬어봐. 그럼 알 걸.'
'됐습니다. 빨리 돌아가시죠.'
'에- 5분만 있다가.'
'..5분 후에 들려볼 겁니다.'
엇 땡큐, 눈 감아주는 거야?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그는 손을 뻗어 티에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익숙한 손짓으로 그 손을 쳐내자 그는 사뭇 아쉬운 듯 쳐다보았다. 그 선량해보이는 녹색 눈동자에는 화낼 생각도 안들어서, 그를 남겨두고 뒤돌아서서 걸어갔다. 응당 제지해야되는 게 아니냐고 잠시 망설였지만 5분정도는 오차범위 내니까, 하고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켰다.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티에리아는 제일 먼저 침대 곁에 놓인 통신단말을 건드려 시간을 확인했다. 지상 시간으로는 아직 새벽이다. 한손을 들어 땀에 젖은 이마를 문질렀다. 그 상태로 그는 천천히 어제 잠들기 전에 생각하던 것들을 떠올렸다. 솔레스탈 비잉, 어로우즈, 세라핌 건담, 더블 오라이저, 카탈론, 동료들, 현재의 좌표, 앞으로 해야할 미션, 남아있는 것들, 부족한 부분, 베다, ..그리고 이노베이터. 머리 속이 어지럽게 맴돌았다. 기억을 흩어버리려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주춤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눈 앞이 핑 돌았다.
문득 티에리아는 자신이 다소 지쳐있음을 깨달았다. 예전이라면 납득할 수 없었겠지만. 그는 조금 씁쓸하게 웃고 이마를 훔쳐 물기가 남아있는 손가락 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눈을 감자, 아직 사라지지 않은 꿈의 조각은 쉽게 다시 떠올랐다. 난처한 듯 웃던 얼굴. 손에 들린 음료. 복도에 기대 서 있었던 실루엣. 가벼운 듯, 다정하던 목소리.
'쉬고나면 몸이 더 힘을 낸다니까.'
밝은 목소리를 떠올리며, 이번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럽지 않았다. 복도로 나가, 티에리아는 당초 예정했던 상황실로 가는 대신 식당쪽으로 이동했다.
물자를 대충 확인하고서 식료품 옆에 높여있는 음료 팩들을 찾아보았다. 있었다. 그 때 그가 마시고 있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분말타입으로 들어있는 팩 속에 물을 짜넣으려다 지금 이 곳에는 중력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조금 사치스러운 기분으로 티에리아는 컵을 꺼냈다. 한쪽에 봉투째로 들어있는 커피는 누군가 가져다 먹은 적이 있는지 개폐된 채 단단히 말려 용기에 들어있었다. 그 것을 꺼내다 티에리아는 자신이 전혀 이런 것을 타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낭패다. 조금 난감한 기분으로 티에리아는 컵과 커피 분말을 내려다보았다. 생각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거기에 주의를 뺏긴 사이였다.
"...뭐하는 거냐, 티에리아."
"세츠나 F 세이에이.."
티에리아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간에 서 있는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설마 그가 이런 시각에 이 곳에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을 부른 세츠나도 놀란 얼굴로 티에리아를 보고 있었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티에리아는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이 시간에 여긴 왠일이지?"
"내가 할 말이다."
"나는..."
뭐라 말해야할지 망설이던 티에리아는 세츠나의 시선이 자신이 들고 있는 용기에 멈춰있는 것을 깨달았다. 식료품을 담는 것임을 몰라볼 상대가 아니었다. 설명할지 말지 망설이던 티에리아는 이내 한숨을 한번 푹 쉬고 용기를 내려놓았다. 솔직하게 실토하는 게 제일 낫겠지 싶어 티에리아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자다 깨서 뭐라도 마시러 왔다."
"네가?"
"불만있나."
"아니, 의외였을 뿐이다."
"너는 무슨 용건이지?"
"나도 마실 것을..."
"물자는 한정되어있을 텐데."
"..네가 할 소리가 아닐 것같다."
담담한 세츠나의 지적에 티에리아는 정곡을 찔린 얼굴을 했다. 저도 모르게 티에리아는 한 발 앞으로 나가서 커피를 자기 뒤쪽으로 가렸다. 세츠나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왠지 다 뻔히 보이는 바보짓을 했다는 생각에 티에리아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웃음소리도 내지 않고 표정을 바꾼 건 세츠나쪽이었다. 빙긋 웃은 세츠나의 표정에 저런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문득 놀라서 그런 생각을 했다. 웃는 세츠나를 잠시 쳐다보던 티에리아는 표정을 풀었다. 뒤를 돌아보고, 쌓아놓은 보급팩중 하나를 집어올렸다. 티에리아는 살짝 입꼬리를 올린 채 세츠나를 바라보았다.
"세츠나. 공범이 될 생각은 있나?"
"아아."
부드러운 얼굴- 어찌보면 즐거워하는 것같은 얼굴을 하고 세츠나는 담담하게 긍정의 표시로 손을 들었다. 걸어온 그에게 음료팩을 던져주며, 티에리아는 그의 표정이 풍부해진 것을 새삼 실감했다.
"여기. 네 몫이다."
"커피를 탈 줄 안다고는 생각 못했는데."
"난 네가 이런 걸 마시는 게 의외였지만."
식탁 의자에 앉아 따뜻한 커피잔을 받아들며 티에리아는 옆자리에 앉은 세츠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가만히 자신 몫의 우유를 홀짝였다. 그 모습에 몇 년전의 그가 겹쳐졌다. 훨씬 더 작았었지. 당시에는 그 것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규격에 맞는 마이스터의 임무를 수행할 수만 있다면 중요한 건 외관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새삼 당시의 '그'가 툭하면 세츠나에게 무언가를 먹이려 들던 심정이 이해되었다. 그러고보면 곧잘 보급실에 들어간 그가 가져오던 것은.
"..네 취향은 전혀 변하지 않았군."
"뭐가?"
"우유를 즐겨먹었지, 예전에도."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자주 먹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녀석이 강요했으니까."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 세츠나는 잔을 기울였다. 티에리아는 왠지 모르게 그가 이 시간에 이 곳에 나온 이유를 알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자신과 그리 다르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그가 곧잘 사주었던 것과, 그가 곧잘 마셨던 것. ..정말이지. 티에리아는 피식 웃었다.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구석구석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간 것이다. 그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티에리아는 충동처럼 손을 들었다. 왜 그러냐는 눈으로 쳐다보는 세츠나를 가볍게 무시하고 그 손을 그대로 그의 머리 위에 얹었다.
"..뭐하는 짓이지?"
"신경쓰지 마라."
단호하게 말을 끊자 세츠나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머리 위에 얹혀진 티에리아의 손을 피하지는 않았다. 누군가 보면 웃어버릴만한 풍경이 아닐까. 스스로도 바보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티에리아는 느리게 세츠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츠나는 무반응이 낫다고 판단한 건지 잠자코 자신 몫의 우유를 마셨다. 몇 번 그렇게 쓰다듬어준 후, 티에리아는 천천히 손을 치웠다.
"티에리아."
"뭐지?"
"..아무 것도 아니다."
뭔가 말할 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던 세츠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마 그도 자신과 같은 경험을 했으리라. 그는 친근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남자였다. 누구에게든 다정하게 손을 뻗었다. 그 시절의 자신은 그가 닿아오는 것을 경멸했고, 그 시절의 세츠나는 닿아오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아마도 그 역시, 똑같이 아쉬움을 느끼고 있겠지.
티에리아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너도 혹시 그의 모습을 떠올렸냐고, 그렇게 묻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지나간 시간과, 변한 동료와, 변한 자신을 생각했다. 조용히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티에리아는 잠깐 지체했다. 잠깐의 공백후 그는 조용히 세츠나의 이름을 불렀다.
"...세츠나."
"뭐지?"
"..쓰다."
"..미안, 사실 처음 타보는 거였다."
솔직하게 고백한 동료를 곁눈질로 노려보며, 티에리아는 지독하게 쓰디쓴 커피에 물과 설탕을 보충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츠나는 티에리아의 눈치를 살피듯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물을 따르고 더 늘어난 커피를 다른 잔에 덜어내다 말고 티에리아는 알렐루야도 부르지 않겠냐는 제의를 했다. 세츠나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밤은 평안했다. 공기는 부드러운 커피향이 감돌고 있었다. 아이들은 휴식에 잠겨있었다.
fin.
자다가 끌려온 알렐루야는 당황합니다. 티에리아는 말없이 커피를 건넵니다. 셋이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중에 하로가 깡총거려 자다 깬 라일이 나옵니다. 뻘쭘한 기분으로 대화에 참여했다가, 형님의 이야기를 듣고 아아, 이 인간은 같은 생각을 합니다. 세츠나가 친절하게 타준 커피를 마시고 뿜어버립니다.
내일은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아서 1기 더블오를 다시 보았습니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구나 하고 멍하니 생각하다가 급식판 앞에 두고 기계적으로 밥먹던 애들이 눈에 들어와(..) 쓱쓱 써봤습니다. 2기에서는 안 그렇겠죠.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