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 나의 날개. 나의 평온. 

당신을 내가, 아니 당신이 내게. 

비극이자 희극. 증오이자 사랑. 희극이자 비극. 사랑이자 증오. 

내게 당신이, 내가 당신에게.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 나의 연인.

나의 죽음. 

아니, 아니면. 




<Komm, süßer Tod, komm selge Ruh>




당신도 아시지요. 내 사랑하는 당신께서도 알겁니다. 내 요람에 깃들었던 모든 영광과 축복과 자비를.

나는 가장 고귀한 자로 태어났습니다. 비단금침과 황금과 대리석 위에 누운 갓난아기. 목마름과 배고픔은 영원히 모를 가장 높으신 분. 제국의 다음 주인. 자비가 필요하다면 제국 전역에서 금화와 우유와 빵이 내 이름으로 쏟아져내렸고 축복이 필요하다면 가장 신성한 대주교의 향로에서부터 가장 비천한 마구간 어린 종의 기도까지 나를 위해 신전에 바쳐졌습니다. 대공비전하의 웃음소리는 물론이고 궁전 전체를 채우는 귀족들의 환호성까지도 이틀밤낮을 끊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제국의 황태자에게 응당 어울리는 권리로서 그 모든 것들이 주어졌습니다. 아버지의 축복도 어머니의 기쁨도 그 순간에는 있었을테지요. 

 그러나 그 영광과 축복과 자비가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에서 단 하나만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신도 아시듯이. 

보석으로 만들어진 내 요람에 오직 하나 사랑만은 없었습니다. 

사랑만은. 


그리하여 내 삶의 시작은 비극이자 눈물이 되었습니다.

나의 어머니에게 그러했고 나의 아버지에게 그러했듯이. 토드,토드. 나의 죽음이여. 

그대가 익히 보아온 것처럼 나의 삶은 곧 괴로움이었어요. 





모든 황족들에게는 매맞는 시종이 있습니다. 나에게도 내 매맞는 아이가 있었어요. 까만 눈에 고수머리를 한 시종이었지요. 나는 엄격한 대공비와 매몰찬 아버지 사이에서 움츠러들고 괴로운만큼 그 아이를 몹시도 괴롭혔습니다. 아는 문제에 일부러 답을 하지 않고 역사 선생에게 사뭇 못되게 굴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선생은 나를 때리지 못하는 만큼 더 세게 그 아이의 손을 때렸습니다. 아이는 그럴 때마다 눈물이 글썽해서는 울음을 참았습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어디론가 달려가서 빨갛게 상처가 맺힌 손을 닦고 왔죠. 언제나 울것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끝내 울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서 한번은 그 아이의 뒤를 밟았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궁정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아이가 어머니의 치맛폭에 매달리고는 그 때서야 울음을 터트리더군요. 시녀는 안쓰러운 얼굴로 그 아이를 꼭 안아주고는 두 손을 부드럽게 닦고 쓸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마에 가벼운 키스. 다정한 말. 매맞는 아이는 마법처럼 울음을 그쳤습니다. 쉬는 시간이 끝날 때는 웃는 얼굴로 내 옆에 돌아왔죠. 

그 모습을 보고나서 나는 그 아이를 직접 때렸습니다. 승마용으로 쓰는 짧은 채찍을 썼던 걸로 기억합니다. 손등을 사정없이 내려쳤지요. 살이 갈라지고 피가 나고 아이는 경련을 일으키며 움찔거렸어요. 그래도 앞으로 내민 손을 숨기지는 않더군요. 내가 손을 내리면 그 어머니에게도 벌을 주겠다고 했거든요. 지독히도 얻어맞고 손이 퉁퉁 붓고 갈라져 핏방울이 떨어지는데도 손을 치우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 아이는 그 날 쉬는 시간에 어머니를 찾으러 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일과가 끝나고서는 역시 어머니의 곁으로 달려가더군요. 그리고는 그 품에 매달려 오래오래 울었습니다. 흰 치마폭에 붉은 손자국이 남았지요. 그 아이의 어머니는 함께 울며 오래오래 그 아이를 끌어안아주었습니다. 가슴에 옷자락에 남은 붉은 핏자국. 온통 번진 울음. 다독여 낫게해줄 손길. 위로해주는 목소리. 그 아이의 손을 잘라버리고 싶었지만 포기했습니다. 쏘아 죽이지 않고서야 그 시녀는 또 제 아이를 안아줄테니 말입니다.그 아이에게도 매달릴 어머니의 치마자락이 있었는데. 나에게는 어떤 손길도 없다는 것만을 알려줄 뿐이라서. 


황태자인 나에게는 대공비 전하와 황제폐하가 있을 뿐 아버지도 할머님도 없더군요. 하물며 어머니는. 나를 꼭 닮았다는 나의 아름다운 어머니는 그림 속에서도 볼 수 없는 먼 곳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비천한 매맞는 아이에게도 저를 안아줄 어미가 있는데. 어머니를 부르며 울던 수많은 밤. 대공비 전하에게서 나를 돌려받고도 어머니는 이미 나를 사랑하기를 포기했다지요. 왜 누구도 나에게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었을까요. 그러면 나도 그녀를 부르지 않았을텐데. 적어도 무언가는 포기할 수 있었을텐데. 


아니,아니, 그렇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기에 당신이 와주었다고 한다면 차라리 낫겠군요. 

적어도 당신은 와주었으니까.


그래요. 오직 당신만이 내 외로운 침대에 스며드는 온기였지요. 당신만은 나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차갑고 추울지라도 내가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 냉랭한 비단 천 사이에서 당신은 어둠이었고 유령이었습니다. 서늘한 눈빛과 얼음같은 미소를 가진 나의 밤. 당신만이 나를 굽어 살펴주었지요. 


-나는 네 친구란다. 오래도록 너를 봐왔어. 


밤은 지독하게도 길었고 침대는 언제나 추웠습니다. 가장 따뜻한 벽난로도 돌로 된 방에 온기를 가져다주지는 않았어요. 가장 높고 고귀하고 외로운 그 침대에서 내가 혼자 슬픔에 떠는 동안 오직 당신만이 돌로 된 겨울궁전에서 단 하나의 온기가 되어주었지요. 죽음의 차가운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다정한 위로. 상냥한 목소리. 나를 안아주는 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안아주는 손. 검고 평온한 날개와도 같은. 당신은 누군가에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다가갔었지요. 나에게는 평온이었습니다. 당신이, 당신만이. 

나의 유일한 사람. 유일한 친구. 토드. 토드. 

그래요. 당신 앞에서는 솔직해도 되겠지요. 

그 궁성 안에서 나는 외로웠습니다. 

외로웠어요.

외로웠어요.







토드. 영광된 궁 안에서 나는 혼자였어요. 외로움이 나를 좀먹었고 책임감이 나를 짓눌렀습니다. 대공비 전하의 엄한 목소리도 아버지의 무심한 평가도 모두 내 안에 박혀 나를 상처입혔습니다.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나서야 잠들 수 있었던 수많은 밤들. 병적인 기억들. 작은 상처 하나라도 발견될라치면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며 내 팔을 비단으로 묶어 억눌렀지요. 그러나 내 안에 몰아치는 고통만은 누르지 못했습니다. 광기로 번지던 괴로움만큼은 지우지 못했습니다.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고양이를 쏘아죽인 날에 나는 당신의 그림자를 다시 보았습니다. 그 우아한 오른팔의 날개를 가볍게 휘둘러 그 영혼을 거두고는 원망이 깃든 눈으로 나를 보았지요. 죽음의 향기가 들썩이는 그 순간마다 나는 숨막힐듯이 가까운 당신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부드럽고 따뜻했던 생물이 망가져 생명이 그 틈새로 흘러나올 때 당신은 한숨을 내쉬고 마치 돌이나 자갈을 줍는 것처럼 가벼운 모습으로 그 영혼을 데리고 떠났지요. 그 순간의 감미로운 어둠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부러워했는지. 나는 총을 놓고 목놓아울었습니다.


나의 주치의들은 몰랐겠지만 그 후에 내가 작고 여린 것들을 죽이지 않게 된 것은 물약 때문도 치료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그 것들이 부러워서였어요 토드. 나는 결코 안기지 못하는 당신의 팔이 그 생명은 안아주는 것이 부럽고도 서글퍼서.





나를 다치게하지 않고 생명을 죽이지 않게 하자 갈 곳 없는 열망은 내 안을 채워 열기가 되었습니다. 내 목숨은 태워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안식을 앗아갔습니다. 긴긴 밤을 잠들지 못해 앉아있노라면 어딘가에는 당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지요. 지하실과 긴 복도를 지나 나는 자주 바깥으로 나섰습니다. 찬 무덤가와 돌벽 사이를 헤메는 밤에는 내 생명이 손가락 끝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달빛과 추위와 어둠과 그림자가 일그러지던 밤에 내 생기를 흩뿌리고 낮이 되면 유령처럼 잠들었지요. 

당신의 그림자를 찾아 헤메던 밤을 그렇게 몇밤이고 지새고 나니 열기는 병이 되어 나의 생명이 빠져나간 자리들을 채웠습니다. 열에 들떠 침대 주변의 모든 것이 흐릿한 하얀 그림자로 보이는 나날. 그 어느 날에 나는 다시 나의 위를 춤추듯이 떠도는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명처럼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 데서 오직 당신만이 우아하고 느린 몸짓으로 나를 굽어보고 있었어요. 


<함께 가고 싶니, 루돌프. 내 꼬맹아. >


천만번의 긍정을 당신에게 돌려줄 수 있었다면. 움직이지 않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오지 않은 말을 혀끝 사이로 밀어낼 수 있었다면. 나는 그저 당신과 함께 가고 싶었습니다. 열에 들뜬 눈으로, 그 눈물 고인 눈으로 팔을 힘껏 뻗어 당신에게 닿으려 발버둥쳤지요.영혼의 마지막 한 자락까지도 나는 그 순간에 당신에게 예스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당신은 언제나처럼 우아하게 그 오른팔의 날개를 폈지만 나를 거두어 가지는 않았습니다.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흘렸던 목소리. 열로 들뜬 내 귓가에는 거의 담기지 못하고 바로 흘러내린 말.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아니 알게 되었던 걸까. 



- 그녀가 슬퍼할 텐데.


그래요 내 사랑하는 죽음이여. 차라리 나를 죽여주었다면, 네 혼을 거두어 가는 것만이 목적이었다고 말해주었다면, 다정한 위로도 부드러운 속삭임도 전부 위선이고 장난이었다고 그렇게 말해주었다면 나는 그저 행복하게 당신에게 감싸여죽었을텐데.

 

당신에게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당신에게 나는 나이기 이전에 누군가를 아주 닮은 부산물이었지요.당신의 심장에, 죽음의 이름에 최초로 어둠이나 안식이 아닌 다른 것을 떠올리게 한 사람. 불안과 기다림과 초조함과 설렘과 떨림과 고통과 조바심, 그런 불안정하고 불균형한 감정을 당신 안에 태어나게 한 사람. 오랜 세월에 걸쳐서 당신이 마치 인간처럼, 지극히 인간적으로 가슴에 품고 사랑해온 단 한 사람. 


엘리자베트, 나의 어머니. 씨씨. 당신의 어린 소녀. 

당신의 유일한 영혼.


나는 그녀를 많이 닮았던가요. 그 모습을 보여주고 곁에 있어줄만큼. 

당신은 그녀를 사랑했나요. 대용품으로 삼은 나조차 그녀가 안타까워할까봐 데려갈 수 없을 정도로. 

토드. 토드. 

나의 죽음. 나의 손길. 내 아버지. 

나의 그대.

그러나 내 것은 아니었지요. 알아요. 잘 알았습니다.

알고 말았습니다.







열병이 물러간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국에 깃드는 붉은 피의 냄새, 화염, 깃발, 반란과 함성. 당신의 날개가 굽이치는 손길마다, 깃발을 흔드는 손마다 보이더군요. 나를 데려가주지 않았던 그 손이 날개가 얼굴이 나라를 뒤덮는 거대한 그림자가 되어 별처럼 빛나더군요. 나의 토드. 죽음이 차오르는 이 나라에서 나는 아이처럼 당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삶에 배신당했다고 울부짖을 수 있는 내 어머니같은 사람이었다면 나는 더 빨리 당신 곁으로 갈 수 있었을까요? 



피와 고통과 암흑이 번지는 거리에서, 재와 연기와 화약이 서로를 뒤쏘는 그 지옥 속에서 한마리 토끼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내 운명을 저주하며, 당신을 미워하고 내 어머니를 증오하며, 내 아버지를 미워하고 이 나라를 증오하며, 어리석은 아이의 얼굴로 나는 밤의 거리를 달렸습니다. 나를 온통 채우던 영광도 자비도 축복도 전부 전부 벗어던진 채. 나를 채우던 열기와 기다림도 전부 버린 채. 빈 껍데기처럼 하얗고 가여운 희생양이 되어 죽음의 나라를 가로질렀습니다. 

차가운 총. 차가운 쇠. 안식의 다른 이름. 아버지의 눈물도 어머니의 비탄도 나라의 미래도 무엇도, 아무 것도 상관없었습니다. 암흑 속을 달려가는 내 손안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으니 그 차가운 쇠붙이나마 힘주어 움켜쥘 밖에요. 


거기 있나요? 여기 와주었나요 토드? 보이지 않는 내 죽음이여. 나의 것이 되어주지 않은 손과 목소리와 음색. 그래도 나를 데려갈 수 있을 당신의 본질. 미친듯이 뛰는 다리, 무너질 것같은 심장, 뺨에 번지는 눈물,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 혁명도 전쟁도 깃발도 함성도 엉망으로 뒤섞인 검은 어둠이 되어 저만치 물러나고, 흰 달빛 아래에서 사방이 고요해진 순간에, 내 손에 부여쥔 단 하나를 붙잡고, 내 머리를 향해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탕! 




엘리자베트 뮤지컬을 보고온 감상이었습니다.

Posted by 네츠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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