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이야, 그 사람.
딱 여기서만 하는 이야기고, 이 방을 나가면 이런 이야기같은 거 한적 없다는 듯이 굴거야. 그 점은 이해해줘. -라기보다, 이런 이야기 하는 거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정말이지 나 참,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하지만, 당연한 거잖아.
설마 진짜로 키스 씨가 엄마라던가.
그 사람이 아빠라던가.
그럴 리가 없잖아, 둘 다 남자고.
슈테른빌트에서 동성결혼이 된다 안된다의 문제는 물론 아니야. 나도 예쁜 신부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걸. 뭐야, 이건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거니까, 흥흥.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함께 살기만하면 부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구? - 두 사람, 애초에 그런 관계도 아니고.
뭘 놀라는 것처럼 굴어. 당신도 이미 알았잖아. 두 사람 지난 십 년동안 섹스는 무슨, 키스 한번 재대로 안했잖아. 그러니까 그런 거야. 밥을 차리고 일을 하고 돌아오고 대화를 나누고. 딱 거기까지, 엄마아빠하면서 어린애들이 소꿉놀이하는 것처럼. 소꿉장난. 응, 딱 그거네. 소꿉장난보다도, 가족놀이일까. 가족놀이.
그 사람, 파파 있지.
병적으로 대디-가, 아빠가 되고 싶어하는 거.
조금쯤은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어?
피도 이어지지 않은 아이들을 셋이나 데려다 기르고, 한결같이 아버지 흉내를 내고 있고. 당신이나 카리나, 이안, 파오링이야 모르겠지만 난 파파하고 그렇게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 걸. 그런데도 내 앞에서도 ‘파파’인 거지. 어쩔 수 없어.
그 사람, 카부라기 씨, 병이니까.
정말로 병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파파가- 이 명칭도 이래저래 틀린 거지만, 이럭저럭 십 년이상 쓰고 있으니까 고칠 수가 없네. 응, 코테츠 씨가, 아직 이 ‘가족’의 아빠가 아니었을 때는 멀쩡하게 진짜 ‘파파’ 였거든.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귄 연인이 있었대. 키스 씨말고, 물론 재대로 된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이름이 뭐였더라. 잘 기억이 안 나네. 같은 오리엔탈 계 사람이고, 학창시절부터 사귀었었고, 결혼도 일찍 했었대. 지금 코테츠 씨가 차고 다니는 결혼반지는 그 사람과 결혼했을 때 만든 거야. 키스 씨는 안하고 다니잖아? 그 결혼반지가 세트가 아니라는 거, 당신이 몰랐을 리야 없겠지만.
코테츠 씨는 결혼 후에 작은 완구회사에 다녔어. 영업직이라서 여기저기 뛰어다녀야하는 지치는 일이지만 천성이 유쾌한 사람이라서 쾌활하고 밝았어. 그래서 그런가, 병원 소아과 병동같은 데서는 엄청나게 인기가 좋았어. 원래 영업직같은 거 병원에 못 들어오지만, 소아과 담당의사하고 사이가 좋았어서 말이지. 아이들이 너무 심심해하니까 몇 번 놀러와서 놀아주던 게 그대로 회사 정기 프로그램이 된 거야. 병원 연례 행사이기도 하고.
즉석에서 회사 상품인 인형들을 가지고 히어로 드라마를 만들곤 했는데 그게 아이들에게 어찌나 평이 좋던지. 손가락 인형 사고 싶다고 조르는 애들 때문에 부모들이 병원에 어떻게 그 인형 구할 수 없냐고 길게 문의 줄을 서곤 했었어. 인기가 좋은 것에 비해서 정이 많으니까 멋대로 가격도 깎아주고, 회사에서 정해진 것보다 더 자주 애들을 방문하고. 업무적인 면에서 뭔가 덜렁거려서 실수하기도 하고 해서, 회사 내에서는 썩 그렇게 돈을 잘 벌거나 잘 나가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아이들한테는 정말로 히어로같은 사람이었다니까.
그 병원에 아내분도 자주 와서는 같이 지켜보고 그랬어. 나도 그 때 봤었고. 길고 부드러운 흑발에 웃는 얼굴이 굉장히 상냥해보이는 사람이었지. 처음에는 남편 일에 따라오는 거구나 러브러브네-같은 생각을 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따로 검진 같은 걸 받더라고. 몸이 많이 약하다고, 그 때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 겉보기로는 정말 모를 일이야. 몸이야 약했든 어쨌든 성격은 근성 있고 싹싹해서 목소리는 항상 큰 편이었거든. 얼굴은 한떨기 꽃같았는데, 어울리지도 않게 괄괄한 성격이었지, 토모에 씨. 응, 맞다. 토모에 씨였네. 토모에 씨.
두 사람 꽤 일찍 결혼했었다나봐. 학교 마치고서 곧장. 으으응, 애가 생긴 건 아니었고, 그냥 둘 다 천애고아였으니까. 가족에 대한 애착이 컸다고 할까.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자. 그게 두 사람 입버릇이었어. 그냥 어떻게든 빨리 같이 살고 싶으니까 바로 결혼했다고. 그랬었어. 지금 생각하면 둘다 외로웠고, 서로밖에 없었으니까 빨리 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던 거겠지. 안쓰러워질 정도로.
해마다 달에 한번은 그 시끄러운 ‘히어로 아저씨’가 찾아오고, 애들은 다들 신나하고, 그냥 계속 그럴 줄 알았었는데..
-토모에 씨가 죽었어. 그해 여름에.
난 그 때 병동이 아니라 정원에 있었어서 직접 봤거든. 지금도 기억이 나. 응급실 쪽으로 구급차 소리가 나기 시작해서 아아 또 큰 사고가 터졌구나-하고 생각하고 보고 있는데 웬걸, 그 문이 열리고 내린 사람이 아는 얼굴인 거야. 그 사람 좋은 카부라기 씨가 무서울 만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옷이며 손이며 피투성이가 돼서는 병원으로 뛰어들어오는데. 구급요원이며 이동식 침대같은 곳도 거기도 피투성이고. 카부라기 씨는 절규하는 것처럼 토모에, 토모에, 토모에, 하고... ....토모에 씨 이름 얼른 기억이 안났던 건 그 장면을 잊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어. 정말이지.
사고였대. 횡단보도에서 음주 트럭이, 그야말로 손도 못쓸 정도로 순식간에. 옆에 카부라기 씨가 있었는데, 한 발 먼저 나가던 토모에씨가 사고에 휘말려서, 눈 앞에서 그렇게. ...얼마나 지독한 일이었는지. 거의 즉사였다고 했어. 의사가 고개를 젓는데 코테츠 씨, 무릎까지 꿇고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울다가 기어이 울부짖으면서 절규하는데... 무슨 호랑이나 그런 짐승처럼. 듣는 쪽에서 심장이 부서져버릴 것같은 그런 절규여서. 너무너무 괴롭고 슬픈데도,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었어.
이제 저 사람 어쩌면 좋지. 못 살텐데.
그렇게 심한 충격을 받은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일, 드물잖아.
장례식장은 상주도 못 세우고 쓸쓸하게 치뤄지고, 코테츠 씨도 다치고 그랬었으니까 한동안 입원했었는데.. 실어증이 왔었어. 아니 그건 실어증 수준이 아니야. 상처 입은 짐승이나 그런 것처럼 말도 없고 낯빛도 어둡고, 항상 물끄러미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거야. 예전에 토모에 씨가 좋아하던 벤치가 거기 있었거든. 예전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자주 찾아가서 울어주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했지만 아무 것도 귓가에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어. 우는 것조차 지쳐버린 것처럼, 텅 빈 사람처럼 그렇게 망가져있어서. 이제 분명히 저 사람, 폐인이 되겠구나. 살아가지는 못하겠구나. 다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었어.
상상도 안가지 자기는? 항상 방글방글 웃는 얼굴밖에 못 봤을테니까.
그렇게 이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으려나 싶을 그런 때에. 소아과 병동의 어린아이 하나가 같이 병문안을 와서는, 같이 온 의사를 무심코 부른 거야.
‘엄마’ 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은 모두 부모처럼 보이니까 자주 하는 실수잖아. 그런데 그 순간에, 코테츠 씨가 반응해서. <엄마랑 같이 온 거니> 하고 대답을 해줬대.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사람 거의 반 년 넘게 말을 안하던 상태였었으니까. 다들 놀랐지. 그 후로도 계속 다시 반응 훈련도 해보고 말도 걸어보고 했지만 반응했던 건 어린아이의 ‘엄마’라는 한 마디. 그 외에는 전부 다시 받아들이질 못했어. 하지만 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거라든지, 가족에 관한 것들에는 작게나마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거야.
그 점에 착안해서, 키스 씨의 ‘가족놀이’가 시작됐어.
놀랐어? 우리 가족이 생겨난 전말이라는 게 이거야. 키스 씨, 원래는 소아과 정신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전문의였고, 코테츠 씨랑은 친구였어. 키스 씨가 아니었으면 소아과 병동의 히어로는 생기지도 않았을 거야. 그 때 어린 환자가 엄마라고 부른 것도 키스 씨고.
어떤 일에도 반응안하던 사람이 가족에 관한 것만큼은 반응하니까, 그걸 계기로 가족 연극을 하게 된 거야. 키스 씨가 엄마고, 병동의 아이들이 아이역할을 맡아서 병문안을 가는 설정으로. 신기하게도 조금씩 조금씩 코테츠 씨의 반응이 돌아와서. <엄마 키스 씨>한테는 약간이나마 말을 하게 된 거야. 애들은 어땠어요, 라든가 저녁에는 뭐 먹을까, 같은, 그야말로 소꿉장난같은 분위기였지만, 외부의 자극에 반응해주는 건 정말이지 반 년만이었으니까.
키스 씨, 원래부터 코테츠 씨랑은 친구였고 또 원래부터 박애주의자같은 사람이니까 잠자코 그 엄마 역할에 어울려줬었어. 코테츠상 토모에 씨에 대한 거나, 자기 상황에 대한 것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말도 하게 되고 얼굴도 밝아지고.
내가 ‘가족’의 일원이 된 것도 그쯤이야. 키스 씨 따라서 코테츠 씨의 병동에 놀러갔었는데. 나를 보고 ‘우리 큰 딸’이라고 하더라구. 정말이지 기가 막혀서. 나이 차이도 얼마 안나는데.
하지만 애들은 다 기대하는 눈으로 반짝반짝 하면서 보고 있고, 나를 딸이라고 부른 코테츠 씨 얼굴은 묘하게 천진해서. 그 뭐랄까, 상처입힐 수가 없는 느낌이어서. 맞장구 쳐줬지. ‘다녀왔어요 아빠’였나 뭐랬나.
그랬더니 행복한 듯 웃으면서 나를 꼭 끌어안는데, 그게 너무 어린아이같고 약해보이고. ..안 어울리게 코 끝이 시큰해져갖고는, 응.
응. 나도 그 때는 병동의 환자였으니까.
어마, 말해두지만 지극히 정상이었어? 성적도 발군 몸매도 발군 사교성도 좋고, 한점 흠집없는 고운 아가씨였다 이거야. 하지만 그 때만해도 오카마라는 것, 사회적으로 기분좋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시모어 가문같이 보수적이고 융통성없고 꽉 막히고 먼지 풀풀나는 돈다발 위에 앉은 사람들한테 나는 집안의 수치였던 거지. 나이도 안찬 처녀한테 몇 번이고 맞선자리를 강요하길래 보란 듯이 예쁜 옷에 장신구에 화장까지 하고 선 자리에 나가줬더니 일족들이 합심해서 날 병원에 쳐넣으려고 든 거야. 정말이지 실례지 뭐야, 레이디한테.
다행히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병원으로 와서 크게 문제는 없었고 미친사람 취급을 받는 일도 없었지만 어쨌든 가족들한테도 버림받고 섬세한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시점의 나니까, 뭐랄까 있잖아.. 코테츠 씨의 그 스스럼없는, 그 ‘딸’이라는 말이 괜시리 기뻐서. ...좀 구원이라도 받은 것같은, 그런 거창한 기분이 들어서.
정말이지, 심신상실자의 잠꼬대같은 소리라고 해도 할말은 없는데, 정말이지 사람은 멋대로, 자기 멋대로 구원받는다니까. 여하튼.
-그래서 나도 그 가족놀이의 일원이 되기로 한 거야. ‘큰 딸’ 네이선으로.
그 때만해도 그 가족놀이가 진짜 가족이 될 거라는 생각같은 건 안했어. 어디까지나 코테츠 씨한테 현실을 익히기 쉬한 첫 번째 스텝같은 거였으니까. 하지만 환자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다고 해야하나. 굉장히 정 없는 말이긴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반응이 늘어나고 나서도 코테츠 씨, 토모에 씨가 없는 현실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같았어. 겨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정도가 한계. 몸도 낫고 정신적으로도 어쨌든 의사소통이 가능한 레벨이 되었을 때는 이제 위에서 퇴원시키라고 했지. 하지만 아직도 치료가 필요한 환자잖아. 키스 씨는 그가 나가는 걸 반대했어. 병원은 돈이 안 된다고 거절했고. 그러니까 키스 씨. 환자를 혼자 둘 수 없다면서 코테츠 씨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 거야.
정말이지 멀끔한 전문의가, 아무리 환자라도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잖아. 키스 씨 원래부터 박애주의자같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다들 그 건 아니라면서 말리고 나도 마찬가지였어. 하지만 그래도 키스 씨 자기가 결정한 걸 굽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담당 의사로서, 아니 친구로서 함께하겠다. 그리고 함께 하겠다.’ 그렇게 잘라서 말해버리는데 어떻게 해.
그 때 즈음에 퇴원시기가 정해진 나도 그 집에 굴러들어가기로 했지. 어쨌든 집에서 쫓겨났으니 새 집을 구해야하는 상황이었고 키스 씬네 집은 크고 개인주택이었거든. 같이 살아주지 않겠냐고 키스 씨가 청해줬었어. 아무래도 둘 뿐이면 쓸쓸할 거라고. 그리고 굿맨 가문은 시모어 가하고도 연관이 있는 명문이라 집에서 내버린 자식이던 나도 시모어 가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 거니까.. 뭐 그런 거 다 계산하고 있었겠지 그 사람은. 시모어 가에 대한 부분만큼은 쓸데없는 호의에 가까웠지만. 나 결국 그 쪽 사람들하고는 완전히 연을 끊었고. 그래도 그런 부분까지 신경써주는 게, 키스 씨 정말이지 엄마같았다고 생각해. 지금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나중에서야, 나중에서야 ‘엄마’ 얼굴을 한 키스 씨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살짝 이야기해줬어. 코테츠 씨, 싱글벙글한 얼굴로 키스 씨한테 이야기해줬었대.
아이가 태어날 거라고.
아 정말이지, 신은 유쾌한 성격이 아닌 모양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한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거듭거듭해서 잔혹할 수 있을 리가 없어. 무슨 불굴의 의지로 절망 속에서 헤쳐나오는 영혼, 히어로, 이런 거라도 찍고 싶은 건지 뭔지. 하지만 그런 건 그야말로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잖아. 사람은, 사람은 말이지. 거듭거듭 상처받으면 무너진단 말이야. 절망 속에 있으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다구.
코테츠 씨 퇴원할 때에는 나도 파파라는 소리가 입에 붙었었고, 키스 씨도 자기 역할을 좋아했었어. 병원 관계자가 ‘할머니’ ‘이모’ ‘삼촌’ 그런 역할로 그 때 그 때 등장하기도 했고. 아이들 역할은 소아과에 장기 입원하던 아이들이 맡았지. 다들 좋아하면서 그 연극에 동참했어. 다들 외로웠으니까. 누군가가 아빠나 엄마라고 칭하면서 안아주고 뽀뽀해주는 기분이 얼마나 즐거웠을지. 하지만 그래도 그건 놀이였고 재활이었어. 나랑 키스 씨를 빼면 그 때 그 때 역할이 바뀌던 가족연극. 그러니까 키스 씨 집으로 이사할 때만해도 조금 이상한 상황에 놓인 친구들끼리 가족놀이를 하면서, 재활훈련도 겸해가는 거다 하는 그런 기분이었어.
그런데 당신이 오면서, 가족놀이가 놀이가 아니게 된 거야, 바니 군.
일곱 살쯤이었으니까 그 때 상황은 자기도 기억하겠지. 브룩스 가는 상류층이라서 집안끼리 아는 사이였고 자기네 부모님 두 분 다 의료 관계자였으니까. 장례식 장에는 키스 씨도 갔었어. 나하고 코테츠 씨도 갔고. 그 때쯔음은 여러 가지로 많이 나아져서 일상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거든. 사람들로 가득찼는데 누구도 브룩스 부부의 죽음이라든지 남겨진 아이에 대한 걱정을 하는 사람이 없더라. 그냥 돈이며 상속에 관한 이야기만 우글우글. 하여간 잘난 사람들은 다 머리 속에 돈으로만 채워넣는 병이라도 걸렸는지 몰라. 그 가운데에 당신이 있었어. 까만 양복을 입고 구석에 오도카니 혼자 서서 훌쩍훌쩍 울고있었다구. 그렇게 당신이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토끼 눈이 되어서 엉엉 울고 있으니까. 코테츠 씨, 아니 파파.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당신을 안아 올리고서는 대뜸 이야기한 거야.
‘바니 쨩, 우리 집 아이할래?’
아, 정말이지. 정말이지.
당신, 그 때 끄덕였으니까.
엉엉 울면서도 파파하고 불렀으니까. 정말이지.
그 후로는 난리도 아니었어. 당신은 엉엉 울면서도 파파 목에 꼭 달라붙어서는 떨어지지를 않고, 파파는 완전히 당신을 데려가기로 마음먹은 상태고. 브룩스 가는 원래부터 손이 귀했으니까 변호사를 빼면 변변히 상속 건으로 이야기할 친척들도 없었어. 당신 완전히 혼자였으니까 내버려두면 고아원이나 그런데 들어가게 될 거고. 우글우글와글와글. 파파가 한곁같이 당신을 데리고 올 거라고 주장하고 마마가 이런저런 수습을 함께 해준 덕분에 그나마 정리된 거지, 아니었으면 절대 재대로 처리 안됐을 걸. 어쨌든 좀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결국 당신이 우리 집에 왔어. 아니 애초에 파파 품에 안긴 뒤로 아예 손을 안 놨으니까 가족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맞을까.
정말이지 어릴 때 당신, 귀엽기는 오지게 귀여운 주제에 진짜 안 귀여운 애였다구. 항상 파파한테 딱 달라붙어서는. 낯가리고. 마마도 나도 파파의 덤 정도로밖에 생각 안했지? 그 파랗고 큰 눈에 한가득 어디 가지 말라고, 불안하다고 울 것 같은 기색이 가득해서는. 파파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쭉 당신이랑 한 침대에서 잤었으니까. 어리광쟁이 씨.
그렇게 뭐랄까.. 당신이라는 퍼즐이 들어오면서 우리집, 완전히 균형이 맞아버린 거야. 아빠와 엄마와 큰 딸에, 그리고 자라고 크고 배우고 사랑이 필요한 어린 남동생까지. 결혼이랑 똑같아. ‘아이’가 생기면, 그 때부터는 장난이 아니라는 거.
우습게도 당신이 들어오면서 정말로 파파는 다 나았어. 자기를 믿고 의지해주는 아이가 생겨서였을까. 일도 나가게 되고, 예전에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토모에 씨나... 사고에 대한 것도 알고 있는 느낌이었어.
요는 평화롭게 균형이 맞는 가정이 되어버린 거야. 억눌린 채 자라거나 성취향 때문에 고민했거나 했던 사소한 문제가 있던 사람들이, 파파의 치료라는 목적 아래에서 어설프게 뭉쳐있었던 걸 당신이 완전하게 이어 붙여버린 거야. 이안이랑 카리나가 가족이 되었을 무렵에는 ‘카부라기 가’가 완성되어있었고.
그러니까, 밉살맞은 동생 군.
자기가 뭐라고 하든지 좋아. 기묘하게 균형이 맞아버린, 어설픈 가족놀이라고 불러도 좋아.
나는 말이지, 이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해. 나를 나로서 소중히 해줬어. 병 때문이었든 뭐든 간에 내가 있을 자리를 주었어. 그건 키스 씨한테도 마찬가지고, 파파- 코테츠 씨한테도 마찬가지야.
그 때부터 지금까지 파파는 쭈욱 파파의 얼굴이었어. 이안이랑 카리나를 학교에 진학시킬 때도, 바깥에서 싫은 소리를 들어도 부득불 돈을 벌어와서는 당신들 용돈으로 쓸 때도 전부 헌신적으로, 진심으로 파파로서 최선을 다했단 말이야. 당신이 자라면서 밉살맞게 굴 때도, ‘친아버지도 아니면서’ 같은 소리로 그 사람을 상처입힐 때도. 완연하게 ‘아버지’ 얼굴을 하고 있었다구. 가족이라든가, 아이라든가. 그게 그 사람을 지지하고 받쳐주는 기둥같은 거였으니까. 당신 때문에 울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동안에도 전부, 전부 파파의 얼굴이었어.
한번 완전히 부서지고 망가졌던 사람이, 자기를 주워모으고 갈라진 부분을 붙여서 지금의 카부라기 가를 만든 거야. 잃어버렸던 자기의 가족을 겨우 되찾은 거라구.
그런데 그런 사람한테서, 남동생 씨는 다시 한번 가족을 빼앗고 싶어?
그냥 집을 나간다거나, 결혼을 한다던가 그런 문제가 아니야. 자기는 지금 ‘파파’를 부정하는 거잖아? 자기의 마음이 나쁘다는 게 아니야.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 쉽게 컨트롤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자기같이 진지한 성격인 아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애써서, 노력해서 그 마음을 감춰왔는지도 알겠어. 도저히 포기할 수 없으니까 이 집을 떠나겠다고 한 것도. 전부 들었어. 그러니까 나도 알아. 자기가 나쁜 건 아니야. 나쁘지 않아. 그렇지만.
나쁘지 않아도, 사람은 상처 입어.
상처 입어.
괴로워한다구.
그러니까 절대로 당신의 마음은 응원해줄 수 없어. 도와주지도 않을 거야. 최선을 다해서 반대하고 당신이 그 마음을 꺾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거야. 하지만 바니쨩은, 그런 거 신경도 안쓰겠지? 아니 쓰려고 해도 쓸 수 없겠지? 십 몇 년 이상 품어온 마음인 걸. 내 반대같은 건 아무 영향을 못 끼칠 거야. 지금 그렇게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로 울것같은 표정 짓고 있어도, 파파를 향한 마음을 포기하겠다는 말은 죽어도 못할 거잖아. 응, 그 것봐.
그러니까, 만일, 죽어도. 죽어도 그 사람에게서 지금 이 자리를, 함께 있을 자리를 빼앗겠다면. 나나 마마나 이안, 카리나같은 당신의 가족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이 자리를 부술 거라면.
파파는, 행복하게 해줘.
두 번 다시 불행하지 않게 해줘.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착각하지마. 지금도 반대야. 절대로 찬성 못해. 난 이 집의 장녀로 십 년 이상 살아왔는 걸. 미워할 거야. 방해할 거라구. 자기가 집을 나가는 것정도로는 만족 못해. 오카마의 원한은 무섭다구, 오뉴월에 서리는 못내리게 해도 한 겨울에도 용암같은 불꽃이 터지게는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것과 별개로, 상황이 흘러가버린다면 내가 원하는 건 결국 하나야.
당신을 미워하는 일이나 가족이 부서지는 일보다도, 파파가 상처받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
나는 말이지, 지키고 싶어. 이 집을. 내 가족을. 파파를.
나를 구해줬던 사람을.
한번,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던 그 사람을.
그러니까, 그러니까 바나비 브룩스 주니어군.
자기가 카부라기 가에서 떠나야할 만큼 그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면. 내가 바라는 건 한 가지야.말했잖아? 절망 속에 있으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다고. 누군가가 손을 잡고 끌어내줘야 하니까.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줘. 우리 가족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게 그 대가라면, 그 정도는 받아들여줄게. 피는 이어져있지 않아도, 내 소중한 가족이니까. 파파도, 자기도.
파파를, 코테츠 씨를 행복하게 해줘.
두 번 다시 울리지 마.
진짜 가족이 되어줘.
아아, 정말이지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심각하게 길게 했는지. 하지만 그게 전부야. 상냥한 큰누님이 해주고 싶은 충고도, 못난이 남동생이 듣고 싶어했던 파파의 이야기도 이 걸로 끝. 이게 전부. 나머지는 전부 젊은 두 사람에게 맡기겠어. 여자답고 마음씨 고운 큰누나의 출혈 대 서비스, 감사하게 받아들이라구. 날도 더운데 방문 꼭 닫고 둘이서 이야기라니, 상대가 남동생만 아니었어도 로맨틱했을텐데, 흥.
말해두지만 여기서 이야기는 전부 비밀이니까. 문을 나가면 누나는 아무 말도 안했다고 할 거야. 흥, 바이바이. 자, 그러면.
-행복해야 해.
.fin
카부라기 일가 드라마시디를 듣고나서 이 가족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생각하다가 두다다다 두드려본 것. 최종적으로는 해피엔딩 기원입니다. 'ㅅ'-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