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나 하늘인가요. 아니 그 위를 떠돌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거품. 아니면 바람에 흩어지는 하얀 구름처럼.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당신의 흔적이 아지랑이처럼 뜨거운 모래 사이로 아른거리는 낮도 있었습니다. 어떤 새벽에는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저수지 그늘 끝자락에 머문 당신이 푸르스름한 물 그림자로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 당신은 깊고 깊은 밤에 머무는 창백한 달이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아 그 달빛에 스치기라도 하면 여린 가슴에 온통 얇게 베인 상채기가 뒤덮여 소리내지도 못하고 숨죽여 울던 밤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그리움이었노라고.
모질지 못한 마음이 무너져서 영영 당신의 얼굴도 떠올리지 못하게 될까 둑을 쌓아올리던 그 시절에, 감히 당신의 이름도 부르지 못하던 그 시절에, 내가 품었던 그 마음은 정녕 그리움이었노라고. 그리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상처도 얕아질까하며 당신이 있던 기억 위를 슬그머니 더듬으면, 아직도 장벽 너머에 서슬퍼런 그리움이 눈물이 서러움이 담뿍 차 있어 차마 그 둑을 열지도 못하던 나날이었습니다. 언제고 사무치게 슬픈 밤에는 피처럼 번지는 괴로움에 묵힌 상처들이 터져나와 눈물로 나를 채워버릴까 두려워 잠들지 못하던 나날이었습니다.
그 둑이 세월에 흩어지고나면, 묵힌 상처들이 아물고 나면, 소리도 못내고 울던 밤이 지나가고 나면, 새벽에도낮에도 밤에도 나를 채우던 당신의 기억이 흔적이 상처들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겨우 켜켜히 쌓은 외로움과 서러움과 그리움을 파헤쳐서는 그 너머에 있는 당신에게 닿을 수 있을줄 알았는데.
그 문을 열고나니 그 안에는 한줌만큼 남은 기억이 부서질 듯 반짝일 뿐. 나의 당신은 한줄기 흔적도 온전히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시간은 멀리 안개처럼 흩어졌습니다.상처도 미움도 곱디고운 모래로 재로 부서져 내려앉아 마른 먼지만이 흩날렸습니다.
내 옛 사랑이 서러운 것은 이러한 연유입니다. 아프고도 괴로웠던 기억들이 아프지도 괴롭지도 아니한 것이 서럽습니다. 서글픕니다.
시간이 치유해준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다면 나는 차라리 낫지도 않았을테지요. 날카로운 칼에 베이고 가시에 찢기면서도 그 서럽게 사랑했던 기억들을 두른 채 살고 싶었습니다. 이 마음을 잊을 바에야. 당신을 잃을 바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