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쯤, 아직 세상이 너무 크고 물음표와 의문이 공기처럼 내 주위를 떠돌던 시절이었다. 오전 열한시 정도가 되면 이불 위에서 느긋하게 또아리를 틀고 앉아 햇살 속을 부유하는 먼지를 구경했다. 정오가 지나면 느긋한 공기는 돌연 세상에서 가장 활기찬 것으로 바뀌었고 놀이터의 흙무더기, 주차장의 흰 벽은 세상 다시 없이 멋진 신세계가 되었다. 노을빛이 얼마간 쓸쓸한 듯 맴돌다가 푸르스름한 빛을 남기고 사라지면 어슴푸레 퍼지는 땅거미가 오늘이 끝났음을 알려주었다. 피곤에 지쳐 돌아와 목욕탕에서 텀벙거리는 물과 흰 비누거품 사이에서 끝나지 않는 몽상을 실컷 펴고나면 하루는 발그스름해진 뺨위에 들뜬 추억을 남기고 사그러드는 것이다. 지치고 뿌듯해진 채 내 이부자리 위에 다시 누우면 저녁, 밤의 가라앉은 검은 어둠 속에서 상상은 다시 피어났다.

 

 

 이부자리 위의 몽상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것에서 시작되었다. 대부분 그 내용은 미래에 관한 꿈들이었다. 내일은 무엇을 할까 하는 기대에서부터 영원보다 멀어보이는 몇년 후에 대해서. 그리고 막연한 상상과 꿈 속에서 이야기들이 달콤하게 부풀고 나면 끝에서는 두려움이 울컥 솟아올랐다. 저녁 이부자리 위에서 맞는 상상은 아침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땅거미가 사그러들 때 얼마간 심장 언저리에 쓸쓸하게 고였던 외로움이 돌연 낯설고 무서운 것이 되어 귓가에 속삭이는 것이다.

 

내가 아주 많이 크고 어른이 되면 엄마아빠는. 엄마아빠가 없어진 이후에는? 그리고 또 그 후에는?

 

어린아이의 막연한 사고 속에서는 명확하게 표현할 단어들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그를 덮을 만한 다른 표현들도 찾지 못했다. 그저 검고 평온한 잠과 무서운 죽음의 경계선에 서서 허무의 손짓을 보았다.

 

 

죽음 후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이 '나'는 어디까지 이어지나요?

 

죽어서 다시 태어나면 지금 내가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알았던 것들은 다 사라질까.

그래도 그건 나일까.

천국이 있고 사후세계가 있다면 그 안에서 나의 의식은 얼마나 이어질까. 영원에는 천년도 이천년도 짧을텐데. 그 아득한 시간 속에서 내가 나로 있어야하나? 그건 도대체 얼마나 길고 허무하고


덧없고.

무섭고.

무섭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은 아득한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나는 두려움에 질려서 잠들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을 말로 꺼내놓을 수도 없었다. 아마 누구도 이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아득하고 아득하고 의미없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느 한 구석에 눌러 묵혀두고 없는 체하며 사는 그 죽음, 그 이후에 대하여.

 

하지만 죽음은 먼 곳에 있지도 않고 평등하지도 않다. 오셀로와 비슷했다. 그저 하얀 생에 등을 맞대고 있다가 돌아서서 검은 형체를 드러내는 것처럼 아무 곳에서나, 어디에서나 있었다.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는 것도 똑같이 일상이었다. 생과 사는 같은 비율로 삶 속에 뒤엉켜있었다. 아득한 것도 아니고 머나먼 것도 아닌 가까운 자리에 서서 특별할 것 없는 순간에 특별하지 않은 그대로 삶의 끄트머리를 잡아채어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음을 안다.

 

생이 내 눈에 보이는 실타래고 길이라면 죽음은 생 이후에 오는 순간이었고 끝이었다. 그게 도착지일지, 종언일지, 새로운 시작일지는 모른다. 이 곳, 생의 가운데에 있는 내 눈에는 비치지 않는다. 하지만 어린 시절 꿈의 꿈 속에서 그 막연한 경계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나는 죽음의 어렴풋한 선을 본다. 그것이 그리 멀리 있지도 않고 아주 낯선 것도 아니다. 죽음은 먼 곳에 있지 않고 그저 가까운 곳에서 보이지 않는 양 서 있는 것이다.

   

그 것은 보이지 않는다. 보아지 않는 끝인지 시작인지 변화인지, 선인지 점인지 면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생 속에 서 있는 동안에는 그 형체를 볼 수 없다.

보이지 않는다.

어둠처럼.



Posted by 네츠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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