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OE에서 목을 조르다말고 우는 신지를 보고 아스카가 남긴 최후의 한 마디.


"기분 나빠."


해석이 분분했던 단어인데 좀 우습게도 전 그 감독이랑 성우의 대화 끝에 나온 말이라는 일화를 듣고 나서야 무슨 생각으로 이 말로 끝냈는지를 알 것같았어요. 우연히 생각나서 쓱쓱 써봄.


이에 관해서 뒷이야기가 있는데, 맨 처음 정해진 대사 "너 같은 녀석에게 죽다니 정말 최악이야"가 마지막을 장식하기로는 부족하다고 생각되어서,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네 집에 들어온 남자가 널 강간할 수도 있는데 하지 않고 자위하면 어떨 것 같아?"라고 묻자 담당 성우인 미야무라 유코가 "기분 나쁜데요."라고 대답하여 그 대사가 탄생했다고 한다.



일본어에서 기분 나빠는 한국어의 기분나빠하고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게, 몸이 안좋을 경우에는 気分悪い,機嫌悪い같은 표현을 씁니다. 키분와루이 같은 경우는 머리가 어지럽다거나 정신이 멍하다거나 같이 신체적 이상으로 기분이 안 좋다, 몸이 아파 이런 느낌이고 키겐와루이는 몸 상태가 안 좋아, 컨디션이 나빠처럼 신체적인 이름으로 몸상태가 안 좋다는 느낌의 단어에요. 気持ち悪い(키모치 와루이)는 앞의 두 단어랑 다르게 신체 이상같은 게 아니라 생리적 혐오감에 가깝습니다.


<너 몸상태 안 좋아보인다?> <응. 기분이 안 좋아.> 気分悪い(O),機嫌悪い(O),気持ち悪い(X)

<어제 그 남자 어땠어? > <완전 기분나빠 이상한 사람이었어> 気分悪い(X),機嫌悪い(X),気持ち悪い(O)


그러니까 직역으로 번역되기는 하지만, 의역한다면 <재수없어> <역겨워>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아스카의 혐오감과 무시가 적나라하게 들어있는 문장이죠.


저 혐오감이 어디서 왔는가? 그 힌트가 저한테는 안노 히데아키의 저 대사였어요.



"네 집에 들어온 남자가 널 강간할 수도 있는데 하지 않고 자위하면 어떨 것 같아?"


문장을 보는 순간 생각했어요. 아, 이건 신지구나.


신지는 아스카의 내면에 꽤 혹독하게 파고들었던 남자아이입니다. 어른을 향한 동경의 상징같았던 카지상은 아스카에게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성인 여성,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의 이미지를 가져다주는 사람이었다면 신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요. 여기에 있는 아스카의, 부족한 아스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이대고 마는 싫은 '남자아이'입니다. 싱크로 테스트에서 결과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고, 망가트렸고, 그리고도 신경이 쓰였던, 하지만 나를 봐주지는 않았던 남자아이.


신지는 자기 안에 갇힌 어린아이이고 그 점은 아스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둘은 서로에게 가까이 있었고, 그래서 이 유리신경같은 아이들은 서로에게 조금씩 영역을 내줘요. 제리코 벽을 세워놓고 한 방에 누워있는 것이든, 서툰 속내를 잘 표현하지 못하고 홧김같이 키스를 하던 모습이든.


아스카에게 있어서 신지는 또래 남자아이이고, 같은 파일럿이고, 아마 자존심과 동경으로 꽉 차서 열 네살 어린아이인 자신을 계속 외면하고 벗어나고 싶어했던 아스카에게 지금의 자리를 확인시켜주는 존재였을 거에요. 누군가를 동경하거나 이 곳을 떠나서가 아니라, 에바 파일럿이든 중학교의 학생이든 아스카가 자기 일상 속에서,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의 이름 하에서 '여기에서' 시작될 수 있었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는 서로가 너무 미숙해서 성립되지 못합니다.


신지는 구원해줄 사람을, 도와줄 사람을 찾았고 아스카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신지의 최우선은 아스카가 아니었으니까요. 자기를 찾지 않는 신지에게 여성이 되어주기에는 아스카도 똑같이 어렸고, 그리고 아스카에게도 신지가 그만큼 중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열 네살 어린 여자아이의 입장이던 자신을 계속 해서 부정해왔던 아스카에게는 그런 어리고 부족한 자신의 세계의 일부인 신지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거겟지요. 신지는 멋진 구원자도, 성숙한 남성도 아니어서 어린 아스카를 다른 곳에 데려가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아이들이 발을 붙이고 살아야하는 것은 현실이고 지금 이 순간이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일그러진 듯 뭉쳐서 함께 흔들립니다. 신지는 내면으로, 아스카는 자존심 속으로 도망치고 있었지만 둘다 발은 서로의 옆에 선 현실에 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결국에는,결국에는 둘 다 이해할 타인으로서, 손을 내밀 타인으로서 옆에 있는 서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신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죠.


강간은, 분명히 폭력적이고 잔인한 행위지만 상대와 닿아야 할 수 있는 행위에요. 자위는 자기만족입니다.신지는 후자였어요. 아스카는 곁에 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신지의 고민과 상처와 괴로움은 자기 안으로 자라서 자기 안 에서 사라져갑니다. 리리스도 아담도 신지의 '내면'이지요. 외부에 서 있는 아스카와는 재대로 소통한 적도 닿은 적도 없었습니다.



내 집안에 있고 나를 상처 입힐 수도 있는 남자가 나를 보지 않고 저 혼자 만족한다면 어떻겠어?


이게 신지의 상황인 겁니다. 마지막 그 순간에 매달리고 울며 목을 조르던 날카로운 상처들까지 포함해서, LCL에서 현실로 돌아온 직후에도 신지는 아직 아스카에게 아무 것도 전하지 않았어요. 자기 감정 속에서 절망하고 울고 받아들이는 단계를 거치고 있죠. 그러니까 신지와 아스카가 대화를 나눈다면, 그게 상처가 되었든 사랑이 되었든 모든 것은 그 이후부터 시작될 겁니다. 그 이전까지 신지는 타인과 소통하는 것을 거부하는 어린아이였으니까요.


그러니까 아스카의 마지막 그 대사는, 역시 그런 자기 내면에 빠져있는 신지에 대한 혐오감과, 비아냥과, 애정과, 거부감이 모두 섞인 그런 '아스카'의 본심이라고 생각합니다.



"気持ち悪い。"





사족 : 전 그래서 코믹스 에바판에서 아스카가 신지가 아닌 카지의 환영 속에서 LCL이 되는 것도 납득했어요. (물론 다분히 레이엔딩 구조가 들어가긴 했지만) 극중에서는 아스카도 똑같이 어리고 외면에 가득찬 여자아이였고 동경의 대상인 카지 쪽이 훨씬 아스카의 '구원'이 되었겠죠. 세계가 리셋되어 다시 시작될 때, 신지와의 관계는 거기서 시작일 거구요.

Posted by 네츠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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