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올챙이 늪 어항 공주 발목뼈 개구리 물고기



큰 쇼핑센터에는 밤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폐장을 준비하려다 멈춘 것같은 시간 속에서 천천히 층을 돌려 구경했다. 분홍색 천으로 쌓여있는 옷가게 층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자 퍽 많은 사람들이 아직 불이 꺼지지 않는 1층 플로어에 모여있었다. 모든 옷들은 다 만원씩이었고 쓸만한 것이 있었지만 전혀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 옷도 있었다. 푸른 상의와 흰 치마의 원피스, 코트, 그리고 티셔츠 한벌을 골랐다가 옷 한 벌을 내려놓자 옆에 서 있던 누군가의 손이 날쌔게 그 것을 채갔다. 이도저도 다 귀찮아진 나는 결국 아무 것도 사지 않은 채 그 층을 벗어나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흩어져서 어두운 방안에 숨어있었다. 불을 켜자 자기들끼리 속살거리고 있었던 아이들이 어린 비명을 지르며 장난스레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중에는 분명히 위에서 본 여자아이도 있었지만 모른 채 입을 다물었다. "애들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문밖에서 힐끗 본 어두컴컴한 방안에는 사람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고 같았다. 물을 열고 들어서자 새까만 방 안에 한자 정도 되는 커다란 어항이 칠판 앞에 놓여있었다. 다가가서 보자 탁하고 더러운 물 속에 개구리와 이끼가 가득 들어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는데, 이끼로 물든 관목 위에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앉아있었다. 삐죽삐죽하게 잘려나간 단발머리와 가죽털옷을 입은 맨발의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당당하게도 내게 어항을 청소해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안에 있는 개구리를 다 내보내고, 돌을 씻고 물을 갈았다. 검은 주목이 이끼를 벗고 제 모습을 드러내고 돌 틈의 수초가 제 모습을 찾을 즈음에 그녀는 사뿐히 어항 안을 돌아다녔다. 깨끗해진 어항은 아름다웠지만 그녀는 어쩐지 쓸쓸해보였다. 나는 내 아비와 함께 살고 있었어. 아비가 떠나게 되면서 우리가 살던 늪은 이제 생명이 살기 어려울 거라며 나에게 이 어항을 주었지. 이 곳에서 사는 건 힘들지 않지만 역시 외롭구나. 그대는?


가늘게 노래하는 것같은 목소리를 들으면나는 의자르 가져다놓고 어항 앞에 앉았다. 가는 조명 아래에서 빛나는 어항과 어두운 자습실. 그리고 그녀와 나. 그녀는 물 속에서 한가롭게 물장구를 치거나 관목 위에 올라안 거나 했다. 나는 물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를 어루만졌다. 나도, 쓸쓸해. 그녀가 가늘게 웃었다. 그러면 그대, 나와 가겠는가. 목소리는 평온했고 어투는 질문형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가 말했어. 배우자를 찾으면, 수초 안의 개구리들이 늘어나도록 내버려두라고. 개구리? 개구리라면 아까 다 내보냈는데. 갸웃거리며 숙인순간 수초들 사이에서 모습을 내미는 작은 개구리들을 발견했다. 아비의 권속들이야.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물 안에서 어두운 이끼들이 산릉처럼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내 아비는 늪의 주인이야. 나는 당신을 데리고 나의 늪으로 가겠어. 달팽이와 개구리, 올챙이들. 미끈거리는 그것들을 보는 것이 썩 즐거운 기분은 아니었으며, 늪의 주인의 딸이라는 그녀의 본성이 무엇일지 걱정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어쩐지 순순히 그녀를 따라 어항 안으로 몸을 드밀었다. 


내 뼈는 산산히 부서져 흙 속에 섞이고 살은 물에 녹아 풀어졌다. 내 혼은 그녀와 손을 맞잡은데 흑녹색의 늪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곳은 평온하고, 어쩌면 아름답기까지한 곳이었다. 몸을 메꾸는 물과 진흙은 따뜻하고 편안했다. 내 손을 잡은 그녀의 방울소리같은 웃음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다. 


그 늪안에는 그녀를 사랑한 두꺼비가 있었다. 검은 피부, 고수머리에 까만 눈을 한 남자아이로 항상 멀리서 그녀와 나를 훔쳐보았다. "공주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인간의 혼이라니. 오래가지 않아 흩어져버릴 걸 사랑하는 건 이해할 수 없어." 어느 날 그의 볼멘소리가 내 심장을 갈라놓았다. 인간의 혼은 늪에서는 살 수 없었다. 언제고 녹아서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녀는 그걸 알고 있었을까. 두려움에 질려 차마 묻지 못한 채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내가 언제고 죽을 운명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차마 하지 못한 질문이 목 안쪽에 반복해서 걸리는 동안에, 설령 그녀가 나를 버릴 생각으로 사랑했다고 해도 도 나는 그녀를 미워할 수는 없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늪의 물이 더이상 평온하게 느껴지지 않고 붙잡은 손에서 온기를 느낄 수 없었을 때 나는 무너질 듯 두꺼비 소년을 찾아갔다. "내가 죽으면 너는 어떻게 할 거지?" "기쁠 거야. 하지만 그러면 공주가 슬퍼하겠지." 눈썹을 찡그렸던 검은 피부의 두꺼비 소년은 맑은 눈동자로 내게 말했다. "당신의 뼈와 살을 다시 모아줄게. 지상으로 돌아가." 


그는 그 말대로 흙 속에서 부서진 내 뼈를 주워모으고 진흙을 살덩이로 바꾸어 내 몸을 다시 만들어주었다. 90일 낮 90일 밤이 지난 후에 내 육신은 그녀의 손을 맞잡기 이전처럼 온전하게 돌아갔다. 단 한 곳, 왼쪽 발목뼈를 제외하고. "검은 물고기나 늪개구리가 먹어치운 모양이지. 어디에도 조각이 없었어." 두꺼비 소년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완전한 몸이 아니고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 방으로 돌아가 오래오래 울었다. 



백일째 아침, 두꺼비 소년이 나를 찾아왔다. "당신의 몸을 완성했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그렇게만 말한 두꺼비 소년은 절룩거리면서 멀어졌다. 나는 그의 곁을 따라 내 몸이 있는 곳으로 갔다. 진흙과 뼈를 모은 온전한 내 육신이 있었다. 발목뼈까지도. 나는 두꺼비 소년을 끌어안고 그에게 축복의 말을 남긴 후 그 몸으로 뛰어들었다. 늪의 초록물도, 검은 흐름도 모든 것이 멀어져갔다. 마지마으로 눈에 각인할 수 있었던 것은 늪공주가 아닌 두꺼비 소년이었다. 그의 왼쪽 발목이 흐물흐물하게 내려앉은 것을 보았다.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돌아왔을 때, 내 왼쪽 발목의 뒤꿈치는 짙은 얼룩이 새겨진 듯한 검은 빛깔이었다.



나는 살아있는 걸까. 진흙으로 만든 몸이 살아있어줄까.

늪공주는 나를 이용했을까? 아니면 사랑했을까?

늪은 좋은 곳이었을까, 나쁜 곳이었을까. 

그는 사랑하는 공주의 연인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을까? 



공주가 나를 사랑했었고, 내 혼이 흩어지는 것이 진실이었고, 나를 도와준 소년이 있었고.

공주가 나를 이용했었고, 나는 늪에서 계속 살 수도 있었고, 소년은 나를 미워했었고.


"의문은 수백 수천가지도 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늪공주의 남편이었던 사내는 눈을 내리깔았다. 적어도 두꺼비 소년은 나를 늪에서 내보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요. 나는 늪공주에게 모든 것을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진실을 알기보다는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것들만을 취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정체나 뒷 이야기에 대한 질문들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어요. 나는 내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채 그 곳을 빠져나왔으니. 어딘가에는 혼자가 된 공주가 새로운 배필을 맞고 있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낭군을 잃은 내 공주가 늪 한가운데에서 울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소년은 나를 미워해 쫓아내었을 수도 있겠고, 나를 돕기 위해 그러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답을 구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저, 내 발목에는 검은 얼룩이 생겼고, 그 것은 내가 '늪'에서 살았다는 징표이자, 한 소년이 공주를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비밀을 간직한 채, 그 짙은 녹색의 늪은 고요히 잠들어있을 겁니다.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은 채.

그러니 나는, 그저 아무 것도 묻지 않을 겁니다.

Posted by 네츠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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