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기를 쓰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근 1년즈음. 그야 일상의 일을 가만히 토해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 머뭇거리게 되었어요. 원인은 간단했습니다. 나를 미워하든 좋아하든 나에 대해서 품은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고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 때 알았어요. 모든 것을 기억하고, 남겨두는 게 능사가 아니구나. 그 때 머뭇거렸고, 무서웠고, 그리고 입을 다물게 되었습니다. 천천히.
2. 그런데 오늘 아주 오랜만에 지난 일기들을 읽어보다가 문득 떠올렸어요. 내가 쓰고, 또 쓰고 뱉어내고 했던 이유요.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잊혀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제고 사라져 없어져버릴 순간들, 기억들. 그렇다면 아주 오랜 후에 내가 그걸 보았을 때, 이미 까맣게 잊어버려 기억할 수 없는 먼 과거의 나를 다시 보았을 때, 그 때와 같을 수는 없더라도 그 시절의 기억이 어땠구나, 하는 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3. 저는 기억력이 썩 그리 좋지 않고 썩 집착하는 것도 없습니다. 관심을 보이는 게 드문 편이기도 하고. 저는 제가 만난 대부분의 인연들을 이제는 기억하지 못해요. 어린 시절부터 자주 이사를 다녔기 때문에 사람이 곁에서 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건 음.. 누가 나쁘거나, 이게 나를 다치게 했다..같은 류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냥 사람과의 이별이나 헤어짐이 당연했었던 거에요. 그 과거에 덧붙여서 초등학교 6학년 때에 죽을듯이 사랑했던 햄스터가 죽고 난 후에, 거창하지만 느꼈습니다. 어차피 모든 것은 떠나고 사라지고 없어질 거에요. 그리고 그런다고 내가 죽지는 않아요.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4. 상실은 슬플 거에요. 울고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그 전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되겠죠. 하지만 죽을만큼 사랑한 게 없어진다고 해서 죽지는 않아요. 죽을 수는 없어요. 언젠가는 익숙해지고 잊혀지고 사라집니다. 그건만은 알고 있어요. 삶이 아무리 길어도, 설령 지구의 수명만큼 살아도, 끝은 오고 떠날 순간이 될 거에요. 결국 언젠가는 사라지겠죠. 너도 나도, 이 모든 것들도. 그 후에 오는 것이 새로운 세계이든 폐허이든 관심은 없습니다. 그저 알고 있는 거에요.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이 없다는 걸. 그냥 그런 기분으로 주욱, 주욱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글을 남기는 건 그 깨달음에 대한 반동같은 건에요. 1초전의 나도 기억할 수 없지만, 같은 사람인채 남을 수 없지만. 이 때 내가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있겠지. 그러니까 제가 글을 쓰는 건 정말로 순간에 대한 기록이에요. 옷장같은 겁니다. 잡동사니로 꽉 들어차서 좀체 열어보지는 않지만, 어느날에는 문을 열고 기어들어가서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 편히 누운 채 오래된 옷냄새와 기억을 즐길 수 있는, 남은 들어오지 않고 좁지만 물건이 많고 희미하게 행복해지는 그런 거.
5. 졸린 채로 쓰는 건 별 이야기가 다 나오게 만드네요. 회사는 그럭저럭 다니고 있고, 힘들어서 죽게 되기 직전까지는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음 그렇지만.. 음 연애는 하고 있습니다. 저는 생각보다 무심한 성격이라 만난 첫날을 기억하고 있는 로맨티즘에 깜짝 놀랐어요. 저 말고, 상대방이 기억해줬습니다. 그 상실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감각..을 느낀 것도 연애를 해서 그런 것같습니다. 하나하나가 기억이 되고 더 알아가려고한다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나이나 하는 일이나 생일이나, 그런 사소한 것들이요. 내가 그런 것들을 정말로 시야에 넣지 않고 살아왔구나 싶기도 했고.
6. 졸리니 다음에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