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루 군, 나 예전부터 카오루 군을..!>
<미안. 나 히카루야.>
<엣?>
<이거 편지. 책상을 착각해서 넣었던 걸.>
<앗..>
만나는 장소는 대체로 방과후의 학교.
태연한 말투에 상대는 당황하고, 얼굴이 붉어진다.
<..그보다 괜찮다면 나와 사귀지 않을래? 예전부터 너 귀엽다고 생각했었거든. 카오루는 달리 좋아하는 아이 있는 것같고.>
<..그런.. 나, 히카루 군만 좋다면...>
<--그렇다는데, 히카루?>
준비물은 그애가 쓴 편지. 천연덕스러운 거짓말. 그리고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힘든 반쪽. 히카루가 받은 고백에는 내가 숨어있고, 내가 받은 고백에는 히카루가 숨어있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연기를 한다. 어떤 대답을 하든, 달라지는 건 없다. 다들 너무나도 가볍게 <그렇다면 너도 괜찮아>라고 수긍해버린다. 그러니까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런 녀석들에게 가볍게 복수해주는 것정도는.
<헤에- 최악이구나 너. 얼굴만 같다면 누구라도 좋다는 거야?>
<카오루.. 군이었던 거야?>
<응. 당연하잖아. 너랑은 달라서, 우리들은 우리들을 구별할 줄 아니까.>
<그런... 너무해!!>
보통은 울면서 뛰어가고, 화를 내는 경우도 있고, 쓰러질 정도로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 애들도 있다. 당연하지만, 그런 모습에 상처받는 일따위는 없다. 전혀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다. 그저 웃으며, 그 바보같은 고백을 한 계집애의 얼굴에 깨끗하게 찢은 연애편지를 던져주고, 서로 손을 잡고 돌아서는 것뿐. 잠시 뒤면 그 여자아이가 한 말도, 얼굴도, 그 여자아이도 잊어버린다. 우리들의 세계에 그 여자애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하지만 나에게는 아주 예전에 단 한번, 누군가가 했던 말의 조각이 남은 적이 있었다.
얼굴은 잊어버렸다. 이름도 잊어버렸다. 기억하고 있는 건 그 말밖에 없다. 그 여자애에 대한 것은 무엇하나 남아있지 않으니까, 그 애를 기억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긴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애들과 같은 말을 했었다.
<..너무해.>
<너무한 쪽이 누군데? 얼굴이 같다면 어느쪽이든 괜찮다니, 대단한 실례아냐?>
<그런 의미가 아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얼굴이 질릴만큼 울어제끼지도 않았다. 하지만 주먹만큼은 꼭, 아주 꼬옥 쥐고 있었다. 새하애져있었던 그 손만은 기억하고 있다.
<카오루와 히카루가 두 사람만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 곳과 이 곳은 단절되어있다는 것도.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한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있다는 것도. 그게 나쁘다고는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하지만, 적어도 내가 갖고 있는 열쇠를 맞춰볼 기회는 주었어야하잖아!>
마지막 말에서 그 애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히카루는 이해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나는 그 애가 하고 싶은 말을 알고 있었다. 그 애가 알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들여놓지 않는 우리들의 세계를 알고 있었다.
<..내 열쇠가.. 아니 누군가의 열쇠가.. 진짜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말하고 그 애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히카루는 잘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눈을 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이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었다. 그 시선에 대답을 해줄 수 없을만큼 나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끝에서부터 차가운 피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웃기지마.>
<카오루?>
<네가 그렇게 잘났어? 열쇠? 웃기지도 않는 소리하고있네.>
<카,카오루..>
대답도 하지 않는 그 여자애를 몰아붙일 듯 다가섰다. 히카루는 평소와 다른 내 태도에 당황하고 있었다. 안돼. 내가 이렇게 굴면 히카루는 당황해버리는데. 머리 한 구석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런 것을 신경쓸 수 없을만큼 화가 나고 있었다.
<잘 들어. 그딴 건 필요없다구.>
<...나,나는..>
<..나와 히카루도 구분하지 못했던 주제에 건방지잖아, 너.>
<...!!>
<멋대로 남을 구제하려 들지마. 꺼져버려!!>
얼굴을 후려치고 싶은 손을 최후의 인내로 꺾었다. 벽까지 몰린 여자아이의 바로 뒷벽에 주먹을 날렸다. 쾅, 하는 지독한 소리가 났다. 등 뒤에서 히카루가 비명처럼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거기서 페이드 아웃. 울지도 않았던 여자아이의 떨리는 말만이 검게 물든 시야 속에 남았다.
[..누군가는 열쇠를 갖고있을 거야.]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히카루가 걱정스럽게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을 내밀자 히카루는그 손을 꼭 잡았다. 다친 손등은 어느 틈엔가 반창고가 붙어있었다. 작게 웃으며 히카루에게 미안,하고 말했다. 불안해보였던 히카루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나 역시 안심했다.
나는 평소의 나로 돌아왔고, 우리들의 세계에는 아무 손상도 입지 않았다. 언제나와 같은 공간이었다. 나와, 히카루만의 세계. 히카루는 익숙한 그 세계의 공기 속에서 호흡하고, 움직이고, 말했다.
마음에 균열이 생긴 건 나뿐이었다.
<門>
돌이켜보면, 눈을 떴던 최초의 순간에 보았던 것은 자신의 얼굴. 아니 반쪽의 얼굴. 어머니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디자인의 일을 하는 만큼 굉장히 바쁜 사람이었고, 또 아이들을 양육하는 건 전혀 어울리지 않을만큼 손도 크고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는 섬세한 사람이었지만 우리들을 돌봐주기에는 너무도 바빴다.
<뭐하고 놀까, 히카루?>
<책읽는 건 싫은데.>
<히카루가 싫으면 나도 싫어.>
부모와 떨어진 아이를 만나러오는 어른 같은 건 없다. 부유한 집의 아이들이었으니만큼 유치원같은데 맡겨지지도 않았다. 언제나 살피고 있는 보모는 세계 바깥의 사람. 커다란 저택과 부족할 것없는 놀이도구와 모든 것들 가운데에서, 우리에게는 서로밖에 없었다. 카오루는 히카루. 히카루는 카오루. 서로밖에 없는 우리였던 만큼, 상대를 타인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위화감이 느껴질 만큼 우리는 함께였고 또 닮아있었다. 쌍둥이었으니까.
<히타치인>
<카오루 군>
<히카루 군>
학교에 처음 갔을 때, 우리는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히카루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들도 그랬지만) 상류층 자제들을 위한 사립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따위는 몸집이 작은 어른과 똑같았다는 것을.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말을 건네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뒤에는 반드시 조약과 제약이 따르는 거라고.
재미없는 사람밖에 없다고, 히카루는 말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히카루의 그 말은 수긍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엔가 나는 깨달아버렸다.
<게임하는 것도 슬슬 질리네. 나가서 운동이라도 할까? 카오루.>
<운동?>
<몸을 움직이는 것도 즐겁잖아.>
그건 내가 인식했던, 히카루와 나의 최초의 차이점. 히카루는 밝고, 잘 움직이는 성격이다. 비교적 조용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나와는 '달랐다.' 그리고 나와 다른 히카루의 차이점이 '사교적'이라고 부르는 부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히카루는 그룹의 중심이 되어서 움직일 수 있는 성격이었다. 지금은 단지 그렇게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히카루는, 두꺼운 담 너머의 '바깥 세상'에 아무런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히카루는 거기까지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우리들의 세계는 우리들만이 있으면 된다고, 그게 우리들의 룰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최초의 차이점을 깨달은 순간부터였다. 나는 우리가 세워놓은 장벽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려워졌다. 히카루가, 나를 놔두고 걸어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내가 할 수 없는 그 것을 히카루는 해낼 수 있으리라는 사실이.
<히카루 군. 카오루 군. 저기.. 반에서 영화를 보러가는데... 참가하지 않을래?>
<사양할게. 재미도 없을 것같고.>
그 다음 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에게 물어왔던 사람에게 먼저 대답한 건 히카루가 아니라 나였다. 히카루는 자신이 할말을 내가 했다는 것에 약간 의아해하는 눈치였지만 크게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래스의 임원인 그 애는 얼굴을 붉히며 물러갔다.
<..별로, 가도 괜찮지 않았어? 카오루.>
<굳이 갈 필요없다고 생각했거든. ..갈까?>
그건 의식적인 질문이었다.
<난 별로 상관없어. 카오루가 싫으면 나도 싫으니까.>
예상했던 대로 히카루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 웃음에 안도하는 내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팔을 맞대고 앉아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히카루와의 대화에 열중하면서 자신도 듣지 못할만큼 작은 소리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히카루는 이제 아무데도 가지 않는구나.
누구보다 가까운 히카루에게 들키지 않도록. 나는 안도하고 있는 자신을 깊은 곳에 꼭꼭 숨겨버렸다. 상류층 사회의 뒷속같은 건 이제 상관없었다. 그저 우리들의 세계에 다른 사람을 들여놓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카오루 군, 이번의 회의에->
<사양할게.>
<히카루 군, 반 단합회가 있는데..>
<필요없어.>
어떤 사람의 부탁도 거절했다. 제안도 전부 거절했다. 학교같은 건 시시한 곳이라고 생각했고, 히카루도 그랬다. 집에와서는 하루종일 같이 있었고, 학교에서도 함께 다녔다. 혹여 둘 중 누군가가 아프면 나머지 한 사람도 따라서 학교를 빠졌다. 그리고 차츰차츰 두 사람밖에 없던 세계는 두 사람 외에는 필요없는 세계가 되었다.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또 성장해도 우리들은 자신들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없었다. 히카루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하지만 나만이 알고 있었다.
우리들의 세계의 입구에 채워진 두꺼운 자물쇠.
그 자물쇠를 처음으로 채운 건 나라는 것을.
<열쇠를 가진 누군가가 있을 거야>
우리 둘 다 열쇠를 가진 사람의 존재따위는 신경쓰지 않은 척했다. 필요없는 척했다. 적어도 히카루에게는 그 것이 사실이었다. 히카루에게는 내가 있으니까. 카오루가 있으니까. 나에게 있어도 그 것은 진실이었다. 카오루에게는 히카루가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나는 열쇠를 가진 사람이 필요없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바랬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기를. 문을 열고 들어와서, 히카루를 데려가는 사람따위가 없기를.
'열쇠를 가진 사람'이 나타나는 것따위 나는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나는 분명 혼자 남아버리니까.
<함께 부를 만들지 않을래요?>
그러니까, 그가 처음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둘다 조금 신선해했고 그 바보같은 만큼 질리지 않는 태도에 끌렸지만. 나는 조금 불안했다. 아니 많이 불안했다. 결국 그의 말에 따라 부에 들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하지만 히카루는 확실하게 '스오우 타마키'에게 끌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히카루가 받아들인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닮아있는 우리는 어디까지나 함께였기 때문에.
아니, 사실은.
거절한다면 히카루가 가버릴까봐 두려웠다. 나를 남겨두고 가버릴까봐.
<그러면, 어느 쪽이 히카루일까요 게임-!>
다행히도 스오우 타마키가 끼어든 우리들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예전보다 훨씬 잘 웃고 더 밝아진 채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지만, 주변의 모두가 바보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해서 우리들만의 세상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문 너머의 풍경. 그 속의 바보같고 재미있는 장난을 히카루도 나도 즐기고 있었다. 마음 속 아주 깊이 묻어둔 불안감을 제외하면, 나도 즐거웠다.
하루히가 나타날 때까지는.
<틀리지 않았어. 오른 쪽이 히카루인 걸.>
찰칵, 하고 자물쇠에 맞는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미안, 카오루. 나 하루히가 좋아졌으니까.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매일매일 같이 다니지는 않을 거야.]
히카루가 차가운 얼굴을 하고 돌아섰다. 그 곁에 하루히가 서 있다. 하루히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끈적거리지도 않고, 무언가를 꾸미는 눈도 하지 않고, 언제나 맑은 눈으로 똑바로 앞을 보고 있었고. 하지만, 하지만. 비명이 터져나올 것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내버려둔 채, 두 사람은 곧장 멀어져가고 있었다. 잡아야했다. 잡아야했다. 잡아야...
"...싫어!!!"
있는 힘껏 손을 내밀었을 때, 잡힌 것은 허공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벽공기에 휩싸인 낯익은 방. 침실이었다. 퍼뜩, 옆을 돌아보았다. 곁에는 엉겨붙듯이 해서 잠든 히카루가 있었다. 조용하고 나직한 숨소리를 내며 깊게깊게 잠들어있었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나는 다시금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히카루의 숨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수없이 계속되어왔던 몇천번의 밤처럼, 히카루가 곁에 있었다. 손을 뻗어보았다. 히카루가 잡혔다. 허상이 아니다. 울 것같은 기분으로 몇번이고, 다행이다라고 중얼거렸다.
몇번이나 반복되는 것일까. 손을 뻗어 확인하는 이 행위는. 그리고 몇번이나 반복되는 것일까. 이 꿈은.
..또 몇번이나 반복될까. ..이 죄책감은.
서로밖에 없는 세상에 있다는 건 고립이나 다름없다는 건, 사실 알고 있었다. <벽>을 처음 알아챈 건 자신이었으니까. 그리고 히카루에게 그 벽이 당연한 것인 것처럼 만든 것도 자신이니까.
'히타치인 히카루와 히타치인 카오루는 꼭 닮았다.'
어릴 때부터 들어오던 말이었다. 너무도 닮아서 구분할 수 없다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거울처럼 닮은 상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했다.
<그럼 어째서 우리는 둘인 거야? 하나였으면 좋을텐데.>
합창처럼 나오는 말은 진심이었다. 아무도 구분할 수 없는 우리였다. 내가 히카루인 척해도, 히카루가 나인척해도 다들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서로 나누어져서 태어난 걸까. 이렇게나 닮았는데. 이렇게나 같은데.
하나였다면 좋았을텐데.
"..정말, 하나로 태어났다면 좋았을텐데."
어릴 때 이후로 잊혀졌다고 생각했던 그 말을 혼자서 반복해보았다. 히카루가 대답하지 않는 그 말은 쓸쓸한 것처럼 울렸다. 하나였다면 아무 고민이 없었을 텐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과 손을 맞잡고 걸어나가도 아무렇지도 않았을텐데. 남겨져버릴 거라는 두려움 같은 건 느끼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그래도, 역시 두 사람이었다. 하나의 세포에서 분열되어 나온 우리들이지만. 분열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히타치인 히카루'와 '히타치인 카오루'라는 별개의 사람으로 태어나버린 이상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나는, 우리가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싫어할 수 없을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면, 분명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겠지만.
..위로같은 이 온기도, 서로 기댈 수 있는 장소도 없었을 테니까.
<누군가는 열쇠를 갖고 있을 거야>
몇천번이나 똑같이 들려오는 마음 속의 목소리를 향해 역시 마음 속으로 속삭였다.
열쇠를 누가 갖고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어.
올곧은 눈을 하고 있는 상냥하고 가까운 사람. 그녀는 주저함도 어려움도 없이 우리들 세계의 문을 열었다. 아직 나가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균형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가족놀이처럼 이루어진 구성은 곧 망가져버릴지도 모른다. 문은 열려있는 상태이니까. 마음만 먹으면, 히카루는 언제든지 걸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겨져버릴 자신도 문이 열린 틈을 타서 다른 기댈 수 있는 누군가를 만들어버릴까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놓을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도 가까운 반쪽을. ..언젠가, 혼자 남게 되버릴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는 열쇠를 갖고 있을 거야>
자신의 속에서 환청처럼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잊으려하며 나는 잠든 히카루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 이불을 끌어올려 덮었다. 히카루의 색색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히카루의 심장고동이 맞닿은 자리에서부터 전해져왔다. 그 심장의 고동을 들으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아직은 먼저 걸어가버리지 않는, 자신의 반쪽의 온기에 안도하면서.
FIN.
06년 10월 5일.
더블오 도피 두번째로 연성물 정리칸을 뒤지다가 하나 꺼냈습니다. 애니메이션에서 카오루의 마음이 조금 더 진지하게 다뤄졌길래 신나서 썼었습니다. 이후에 원작에서는 상큼하게 정리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