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영원히 혼자인 사람을 사랑한 사람을 알고 있어.
나? 나는 그 사랑에 빠진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구요.
단아한 옷을 차려입은 여자는, 흡사 아무 것도 비치지 않을 것처럼 맑은 눈을 하고 그렇게 말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있는 그 모습은 맑은 날에 서 있는 대나무 같았다. 흔들릴 일도 꺾일 일도 없을 것 같은 모습으로,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술잔에 담아 흘려보냈다. 처연함도 서글픔도 없는 목소리는 다만, 비칠 듯이 투명했다.
화족의 생활이라는 건 정말 아무 것도 없어요. 고운 비단옷에 다도에 예의범절. 화술 같은 것. 관계만이 전부인 것 같은 세상이라 그 사이에서는 아무도 마음을 갖지 않는 곳이었죠.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많은 공통점을 찾아내는 데에 필사적이라 아무도 이야기 하고 있는 대상을 바라보지는 않아요. 그 너머에 새겨져있는 것들을 보지요. 누구의 아들, 무엇의 소유자.. 응, 그러니까 결국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거에요. 그런 것에 익숙해져있던 나도 어차피 그런 인간이었겠지만.
그래서 그를 만났을 때는 기뻤어요. 똑같이 예의바르고 똑같이 정중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배경을 보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순수하게 앞을 보고 말했어요. 그리고 가끔 그 눈이 열망으로 젖어드는 것도 보았죠. 그 대상이 나이기를 간절히 바랬어요. 어쩌면 동경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나에게는 불가능할 것같은 감정을 품은 그를.
그와의 혼담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요. 아버지는 그가 전도유망한 청년이라고 말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어요. 정말로, 진짜로 그 사람과 함께 서서 살아갈 수 있다니. 얼마나 믿을 수 없는 행운이었는지. 어쩌면 그의 그 눈이 나를 봐주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기적같은 기쁨에 젖었어요.
그가 아버지를 찾아와, 나를 아내로 달라고 하기 전까지는.
그가 아버지를 찾아와, 나를 그 사람의 아내로 주라고 청할 때까지는.
다만 그는 말하더군요. 자신의 약혼녀와도 같은 위치에 있었던 나에게 말하더군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당신이 나를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그 때즈음 나는 화내는 것조차 잊고 있었어요. 그 남자의 눈이, 살아있는 눈빛이 나를 보며 ‘부탁’하더군요. 그 열기가 담긴 눈으로 나를 보더군요. 그 때 생각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될 수 없다해도 그가 나를 바라봐주는 일은 또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어차피 그와 함께 할 수 없다면. 이 거짓밖에 없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를 봐줄 수 있는 남자의 도움이 되자고.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그리고 그를 만났습니다.
아니, 그들을 보았습니다.
새하얀 눈이 내리는 날에 그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아니 거기 있던 건 한 사람과 또 한 사람. 닿아있어도 닿지 않는다는 건 그런 감정이더군요. 그 때 아마도 나는 깨달았습니다. 평생 그 두 사람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여자가 되리라는 것을. 아니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공범이, 혹은 소중한 여자가 될 수 있겠지요. 그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준 여자로서 그에게는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지요. 그저 그날 깨달았습니다.
그는 평생 그 사람을 가질 수 없으나 그 사람에게 의미있는 ‘인간’은 또한 평생 그 뿐입니다. 영원히 엇갈리며 갈구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나는 아마 먼지만큼의 가치도 없을 테지요.
그저, 그 것뿐.
신부의상을 입고 새하얀 덧옷을 입은 내 옆에서 그 남자는 다만 감정없는 눈으로 서 있었습니다.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이었지요. 여인의 매력으로도 무엇으로도 정복할 수 없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남자였습니다. 희미한 색향마저 감도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같은 아름다움. 한 겨울에 피어난 매화처럼 붉고,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갑고, 눈처럼 새하얗고, 그리고 겨울처럼 사라져버릴 것같은 아름다운 남자. 그 사람은 나와 같은 귀족이면서도 우리들의 세상은커녕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일조차 없을 것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나의 남편은 되어주지는 않았습니다. 나를 봐달라고 매달리거나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아내인 여자는 물론이고, 이 세상의 무엇도 시야에 담아두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가문의 여자로서 그에게 몸을 맡겼습니다. 눈처럼 차가운 그는 지극히 싸늘하게 나를 안았고, 그가 그 하얀 눈 속에 숨긴 붉은 꽃 같은 감정을 내비친 것도 나의 손길에 의해서는 아니었지요. 그 밤이 악몽 같았냐고, 괴로웠냐고 묻는다면 그 것들을 느끼는 것조차 나에게는 불가능하겠다고 말하겠습니다. 내가 가장 사모했었던 남자가 그동안 무엇을 담아왔는지 그 날에 처음으로 깨달았지요. 마물이 살아 숨쉬는 밤이었지요. 맞닿은 남자의 손길보다도, 몸짓보다도 그가 바라보는 시야의 너머에 나는 홀려있었습니다. 그래요, 정말로. 마성이 날뛰는 밤이었습니다..
여자로서 누군가를 사랑하지는 못해도 어머니가 되는 것은 가능하던 시대였기에 나는 기꺼이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그 남자의 아이가 아닌 내 아이였지요. 그리고 그 남자가 아니라 그가 나의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주길 바랬습니다. 복수요? 그런 것은. 그저,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은 것같은 그로서는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니까요.
세월은 안온한듯이 흐르고, 피어올랐던 감정이 살해당한 그 밤 이후로 나는 아이들의 어머니로서만 다만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정이 사라져도, 어린 날들이 죽어가도 살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더군요. 무감각해지듯이 날카로워지는 감각을 가슴에 품으면 그만일뿐.
- 하지만 내게는, 당신이야말로 맑고 투명한 유리같은 여인으로 보이는 군요.
문득 그렇게 말했을 때, 잔을 입가에 대었던 여인이 고운 손을 내려 술잔을 밀어놓았다. 나를 돌아본 아름다운 얼굴에 다만 희고 흰 달빛같은 미소만이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보인다면 세월이 나를 그렇게 벼려내어서겠지요. 마음에 품은 것도 갈망했던 것도 다만 차가운 달이었을 뿐이니, 그 것을 비추던 마음이 유리가 된들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겠어요.
단지, 그 것뿐이지요.
그렇지요?
후유키 상.
달빛 아래서, 여인은 부서질 듯 하얗게 웃었다.
그녀가 부른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나는 차마 묻지 못했다.
fin.
생각해보면 7년 후 재회했던 그 날에 요시야스가 후유키를 안고 죽어줬더라면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을텐데. 모두에게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