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는 눈보라가 둔중한 음악처럼 길거리에 울려퍼지곤 했다. 햇빛과 눈과 추위는 빈민가와 로열 스트리트에 평등하게 내리쬐었지만 평등하지 않은 지위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무엇도 공평하지 않아, 모피코트를 입은 여인들이 마차를 타고 거리산책을 나서는 날씨에도 우리 구역에서는 몇 명씩 얼어죽는 이가 나오곤 했다. 


「발을 모포 바깥으로 내 놓으면 안된단다, 조심하렴.」

「얼어붙은 것들은 함부로 만지지 말아야돼. 냉기에 다칠 수 있으니까.」

「거리 바깥으로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

「난로 옆을 벗어날 때는 방한복과 구운 돌을 꼭 챙겨가렴」


엄마의 잔소리는 노랫말처럼 이어졌지만 대다수는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잔소리나 어른의 충고를 한 귀로 흘려넘기기에 좋은 어린아이여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 잔소리를 잊어버리기에 현실은 너무나 절박하고 잔인한 것이어서 우리는 같은 말을 두번씩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 것들은 교육이나 예절이 아닌 생존의 문제였으므로. 부족한 석탄이나 부족한 땔감, 식사, 모포. 모든 것은 우리를 굶주리게 하기에 충분했고 성마른 햇볕이 성큼성큼 짧아져 하얀 재만 남은 난롯가 앞에서 막내동생의 맨발을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을 때에는 치미는 설움에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말할 수도 있다. 판자집의 삐걱이는 널빤지 벽 틈으로 눈보라가 들이쳐 아침이면 녹은 눈이 얼어붙은 이불 아래서 깨어나야했던 그 시절이 축복이었다고. 버석버석 메말라 뼛속까지 스미는 차가운 공기, 맨날로 뛰어야했던 빈민가의 차가운 돌쩌귀조차 무섭게도 따스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이라고.


긴 겨울은 혹독했고, 무엇보다도 잔인했다. 




「배급은 평등하게 이루어질 겁니다. 줄을 서세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여자의 인도에 맞추어 사람들은 한꺼번에 웅성웅성 움직이기 시작했다. 항상 외치는 말은 똑같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서 끌어당겼다. 


「이리와 넬.」

「누나, 나 추워.」

「입 다물어. 체온을 뺏기니까.」


막내 동생 넬은 콧물을 크게 훌쩍이고 내 뒤로 달라붙어 섰다. 울지 말라고 그렇게 다그쳐도 넬은 자주 울음을 터트렸고 동상이 올까말까한 넬의 눈매는 항상 빨갛게 얼어붙어있었다. 이를 갈면서 덮고 있던 머플러를 벗어서 넬의 목 아래에 꽁꽁 싸맸다.


「누나, 안 추워?」

「추워. 짜증나게 추워. 그러니까 입닥쳐.」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넬이 내 옷깃을 잡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곯머리를 내며 말했다.


「너 그렇게 일일히 기죽지 마. 여섯 살이나 됐으면 더 남자답게 굴어보라고.」

「그치만 누나..」

「조용히 해. 줄이 움직여.」


나는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고 넬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넬은 절뚝이면서 내 뒤를 쫓아왔다. 

「누나..」

「닥치라고 했지.」


쌀쌀맞게 으르자 넬은 내 뒤에 꼭 붙은 채 고개를 숙였다.


「줄을 서세요! 배급은 평등하게 돌아갈 겁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배급막사 주변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믿어.' 머리 위에서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시에라에 사람들은 너무 많았고 모든 것은 적었다. 나는 조바심을 내며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빌어먹을 꼬맹이들, 비켜! 모포와 방한구로 둘둘 두른 사람들이 짜증을 내며 손을 휘저었지만 키가 한 참 작은 우리는 밟힐 위험은 큰 대신 손에 붙잡힐 위험은 적었다. 


「줄을 서세요!」


어느 정도 비집고 가자 계속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넬의 손을 꽉 잡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치인데다가 질질 끌린 넬은 소리도 못내고 히끅히끅 울고 있었다. 


「누나, 나 다리가 아파..」

「이따가 막사 가면 다시 봐줄게. 지금은 밥 받아야돼.」


넬의 오른쪽 발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피가 돌지 않는 것처럼 파랗게 얼어있었지만 어떻게 취할 조치가 없었다. 동편에 있는 막사로 데려가면 힐러가 있다고 했지만 어린애 손으로 뚫고 가기에는 사람도 너무 많았고, 거길 다녀오는 사이에 우리 막사에는 우리가 있을 자리가 없어질 게 뻔했다. 배 안쪽에 품고 온 나무 그릇 두개를 꺼내 넬에게 내밀었다.


「꼭 잡고 있어. 놓치면 오늘 밥이 없으니까.」

「응..」

「울지마. 누나가 어떻게든 해줄 거니까.」


낼은 빨갛게 얼굴 얼굴을 들고 다시 코를 훌쩍였다. 나도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 얼른 눈물을 참았다. 식수도 식량도 부족한 상황에서 우는 건 사치였다. 여섯 살 꼬맹이한테나 허락되는 일이다. 



나눠주는 빵은 딱딱했고 치즈는 돌같았다. 따뜻한 것은 없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데울만한 연료를 아껴야했다. 하지만 그건 왕가가 나쁜 게 아니었다. 배급은 평민과 빈민과 귀족에게 모두 평등하다고 했다. 그저 양이 충분하지 않을뿐. 내 키만큼 높은 배급대 앞에서 나는 손을 휘저었다.


「부인, 빵 하나만 더 주세요. 집에 아픈 엄마가 있어요.」

「본인이 오지 않으면 배급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
「엄마는 동상에 걸려서 못 걸어요.」

빵을 나눠주던 여자가 멈칫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나를 보다가 다른 빵을 하나 더 집어주려 했다. 그 때 여자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람이 그녀의 어깨를 툭치고는 고갯짓으로 바깥을 가르켰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이어진 피난민들의 줄은 끝도 없었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손을 움직여 한 개의 빵만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규율로 정해진 일입니다. 부상자에게는 따로 배급이 주어질 거에요.」
「하지만 엄마는..」
「빨리 움직여!」

머뭇거리는 여자를 대신해서 내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소리질렀다. 나는 소리도 못내고 내 빵과 치즈와 물이 담긴 그릇을 움켜쥔 채 배급대를 지나쳤다. 누나, 누나- 넬의 절뚝거리는 발소리와 울음섞인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막사까지 가지고는 못갈 거야. 어디 다른 데를 찾아보자.」
「응.」

넬은 걷기 힘들어해서 음식을 쥔 채 막사까지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인기척을 피해서 거리를 돌아 나왔다. 먹을 것은 뱃 속에 숨기고 있었다. 새로 즉위한 폐하는 평등하게 배급하라고 지시한 모양이었지만 배급 이후의 것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거리를 슬금슬금 걷다가 성벽 한쪽 틈에 쪼그리고 앉았다. 두터운 벽이 냉기를 조금은 막아주는 곳이었다. 

「얼른 먹어야 돼, 넬. 안 보이게 조금씩 꺼내구.」
「응..」

넬은 고개를 수그린 채 빵을 꺼냈다. 손 안에서 조금씩 녹여서 뜯어먹거나 물에 담가서 먹기 쉽게 해야했다. 다행히 시에라의 '테고리' 덕분에 얼음처럼 차가워지기는 해도 얼어붙을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는 빵과 치즈를 손톱끝으로 뜯어내서 물그릇에 담갔다가 조금씩 씹어 삼켰다. 남이 보지 않게 빨리 먹어야했으므로 우리는 둘 다 말하지 않았다.

「도와줄까?」

그래서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 우리는 둘다 놀란 토끼처럼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누구야!」

나는 팔을 뻗어서 넬을 내 뒤로 숨겼다. 넬은 바싹 겁에 질려서 내 등뒤로 파고 들었다. 

「경계심 대단하네. 반응속도가 장난 아닌데.」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남자의 얼굴은 그림저거 드리워져 잘 보이지 않았다. 성에서 '배급'이 시작되기 전에는 아이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납치되곤 했다는 이야기들이 괴담처럼 떠다녔다. 나는 으르면서 넬을 내 등 뒤로 꾹꾹 눌러넣었다.

「먹을 거라면 못 줘. 이 애도 못 줘. 당신 누구야?」
「둘다 바라는 건 아닌데.. 니들은 여기서 뭐한 건데?」
「식사를 하고 있었을 뿐이야. 불만 있어?」
「난 그냥..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남자가 곤란한듯 뺨을 긁적였다. 악의는 없어보였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오든간에 무언가는 빼앗기게 되어있다. 독오른 눈초리로 노려보자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대로 남자는 뒤로 천천히 물ㄹ러났다. 이대로 떠나줄까? 경계어린 눈으로 보는데 등 뒤에서 우는 소리가 났다.

「누나......누나, 나 너무 아파...」
「울지마 넬!」
「하지만 나.. 다리가...」

넬이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저도 모르게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넬을 돌아보았다. 바닥에 흐트러진 넬의 옷자락을 걷어올렸다. 등 뒤로 우겨넣느라 성의 차가운 돌벽과 내 몸 사이에서 짓눌린 넬의 발이 파랗다못해 까맣게 질려있었다. 

「넬.. 이거, 이거 언제부터 그랬어?」
「어젯밤.. 누나... 히잉..」

넬의 파란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울지 마, 습관처럼 머플러에 둘둘 감긴 넬의 얼굴을 두 손으로 덮어 눌렀다. 동편의 막사까지는 어른 걸음으로도 하루는 꼬박 걸어야했다.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어찌할 바를 몰라 두 손으로 넬의 차가운 발을 쓰다듬었다. 써늘한 냉기가 밀려왔다. 넬의 발이 따뜻해지지는 않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아빠. 목까지 무거운 것이 차올랐을 때, 등 뒤에서 또다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도와줄까?」

아까 전에 말을 걸었던 남자였다. 고개를 들자 어쩐지 난처해보이는 연녹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도와줘. 도와줘. 목소리가 되지 않은 말이 목에 걸려 입이 뻐끔거릴 뿐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남자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도 울지마.」

부드러운 목소리가 묘하게 따뜻해서, 나는 내가 울고 있음을 겨우 깨달았다.




씨엘 완결 즈음에 해서 긴 겨울 이야기. 혹은 제뉴어리랑 도터 이야기..? 


Posted by 네츠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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