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가로운 수요일입니다. 작년 이 맘때에도 이랬을까요. 인생에 다시 없이 느긋한 시기를 보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늦게까지 자고 일어나서 밥을 챙겨먹고 하고 싶은 걸 하고. 지난 주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왔어요. 십이국기, 테메레르, 또 뭐가 있더라.. 아 고스트헌트도. 공부나 지식을 위한 게 아니라 순전히 즐기고 재미있어하기 위한 책들입니다. 오랜만에 읽은 십이국기는 느낌이 많이 달라져서 그게 굉장히 기뻤어요. 중학교 때에는 그냥 본문을 따라가는 게 전부였는데 지금은 행간의 뉘앙스를 읽을 수 있게 되면서 거기에서 말하고자했던 게 뭔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건 전적으로 일본어가 는 덕분이에요. 십이국기는 한없이 직역에 가깝다보니까 그 뉘앙스가 얼핏 이해가 안 갔거든요. '도오시테모, 도 잇타라 캉가에테미루케도' '도오시테모'! 라든가. 이게 '제발, 이라고 한다면 생각해보겠지만' '제발..'로 번역되었다던가. 저 도오시테모를 직역하면 "어떻게 해서든"이라는 뜻이고 어떻게서든 (부탁한다고) 한다면 생각해볼게하는 뉘앙스인데 말 자체는 어떻게해서든 이라고 하면 생각해볼게, 라는 말에 어떻게해서든! 하고 도오시테모를 말해버리는 게 재밌다는 느낌입니다. <꼭 좀 해주세요하고 말하면 생각해볼게> <꼭 좀 해주세요하고!> 같은 느낌이 들어있는 것같은 느낌적 느낌.. 한국어에서는 살리기 어려우니까 말 좀 많이 바꿔야할 것같아요. 


2. 여튼 이런.. 뭐라고 하지 문장 하나하나에 좀 더 힘을 실어서 읽게 되었더니 더 이입이 잘되더라~하는 이야기입니다. 슈쇼우의 '그런 것,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같은 말. "내가 그렇게 대단할 리가 없잖아요!" 의 뉘앙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십이국기는 지나치게 직역이라서 느낌이 안 살았던 게 맞는 것같아요. 이렇게 써놔도 제가 번역할 수 있을리도 없지만..orz


3. 십이국기의 번역 질과 별개로 번역가이신 김소형님을 참 좋아했어요. 아마 델피니아 전기의 영향이 컸습니다. 델피니아 전기는 본문만큼이나 번역자 후기가 재미있었어요. 극 중에 나온 이야기에 대한 소소한 주석("진명"에 대한 이야기)이나, 책 속에서 묘사되지 않은 내용에 대한 신빙성 넘치고 유머러스한 이야기.(셰라가 지은 녹색 그라데이션 드레스) 또 이런 후세대가 보고 싶어요! 월리랑 레티시아의 대접이 너무 다르지 않아요? 같이 읽으면서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가 참 많았거든요. 시리즈에 대한 역자분의 애정이 느껴지데다 재미있는 글들이라 작가 후기보다 훨씬 기대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다른 번역가분들의 후기를 접하게 되었을 때는 훨씬 평범하게 신변잡기나 '다음 시리즈의 그들을 기대해주세요'같은 간단한 내용들이 많아서 모든 역자님들이 이렇게 쓰시는 건 아니구나, 하고 조금 아쉬워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럴까 인터넷에서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는 충격이 컸습니다.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재미있는 글을 쓰시는 분이라 역자가 아니라 어떤 활동을 하시든 좋은 걸 만들어내실 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건강문제때문에 델피니아 번역이 마지막이라는 후기를 읽었을 때만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새삼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4. 음 화요일, 그러니까 8월 6일의 서울~경기도는 엄청났습니다. 구름 한덩어리가 서울+경기도 하늘을 온통 뒤덮었거든요. 비가 내리는데 너무 세차고 거세서 비 사이에 옅은 파도가 일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만큼 하얀 물안개가 일고, 번개가 뇌우처럼 미친듯이 떨어졌어요. 미스트의 시야에 토르의 번개를 끼워넣은 듯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희고 파란 빛줄기로 떨어지는 번개를 베란다에서 봤어요. 천둥도 엄청나게 치고. 창문을 다 닫아놓았는데도 부엌의 채광창을 열어놨더니 빗물이 방충망에 달라붙어 덩어리지는 바람에 작은 틈으로 비가 줄줄 새어들어와서 30분도 안되는 사이에 부엌 바닥이 온통 젖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2n년밖에 안살았지만 처음보는 비였어요. 태풍도 장마도 아니었는데 그런 거 있죠. 고기압의 틈을 따라 비구름이 고이는 바람에 벌어진 현상이었다고 합니다. 


5. 폭우인만큼 오래가지는 않아서 한두시간만에 개어버렸어요. 그렇게 개고나니 맙소사, 세상이 얼마나 깨끗한지요. 공기중의 불순물이 다 날아가서 다른 시까지 보일만큼 시야가 맑았습니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무슨 서울~경기도 전 지역을 세탁기에 넣고 돌린 것같은 느낌이었어요. 재미있는 경험이었던지라 기록해둡니다.


6. 음 조금 쓰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지만.. 어쨌든 적어둡니다. 저는 전공상이든 취미상이든 일본이라는 나라를 접할 기회가 많아요. 그래서 그 나라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한국과 얼마나 다른 나라인지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대하지 않을 부분은 기대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역시 예쌍치도 않은 곳에서 실망하는 거 뼈아픈 경험입니다. 원망할 생각도 안 들어요. 그냥 아, 다르구나. 일본의 작품에서는 참으로 쉽게 서로 알아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만(제가 좋아하는 에바에서도 그렇죠) 이 나라 사람들이 진정 서로 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평화롭게, 같은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와카리아우를 논하는 건 쉬워요. 하지만 다른 입장에서, 다른 믿음을 가진 상태에서 알아가려고 한다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한 한국은 후자를 위해 죽도록 싸워온 나라에요. 전투적이죠. 무력으로 입을 다물게 하고 말그대로 피로 자유를 챙취한 역사가 있습니다. 술자리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고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싸우는 어르신들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에요. 그렇게 격렬하게 토하고 이야기하고 싸우고 화해.. 음 화해까지 가기 힘들긴 하지만(웃음) 하는 문화권의 사람으로서 일본이 이야기하는 평화 혹은 대화가 무척이나 가시적인, 애매한 것으로 들려서 쓸쓸해질 때가 있어요. 평화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대화하자고 말하지만, 그 대하가 하하호호 웃는 게 아니라 서로 싸우고 화내고 피를 흘리는 거라도 할 준비는 되어있나요? 이런 기분. 역사문제나 영토문제를 떠나서 서로 알아가자고 말하는 것치고 알아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 작품이나 경향을 본 적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것도 한국과 일본의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급진적으로 피터지게 싸우면서도 다 토해내고 달려가는 한국, 느리고 느리고라도 싸우지 않고 웃으면서, '조금씩'을 당연히 하면서 핵심까지 다가가는 데에 시간을 들이는 일본. 어쩜 이렇게 다른 나라인지. 


7. 6번의 길고 긴 이야기를 쓴 건 개인적으로 겁나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던 그 말 때문에 그런 거 맞습니다. 6번에서 한국과 일본의 방향성이 다른 거야 다른 나라니까 그렇다치고, 그 달라서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에 대해서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한 소리를 하는 것에 우선 화가 났습니다. 근데 다음 순간에 또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저 사람들에게는 나라와 사람이 같지 않겠지. 저 악의가 다수를 향하는 건 아니겠구나. 한국에서는 그게 맞는데. 또 이런저런 생각들.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유쾌한 일은 아니라서 뭔가 적지 않이 식어버렸습니다. 음, 씁쓸했어요. ..이런 저런 것들을 한참 생각하고나면 그냥 입을 다물게 됩니다. 설득도 대화도 납득도 피곤해져서. 남이 나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내 말을 옮기려고해도 재대로 이루어지지는 않겠지요.


8. 실없는 이야기를 길게 썼더니 배고픕니다. 최근 발견한 맛난 레시피는 라면에 양파를 가늘게 썰어넣는 것. 아삭아삭하고 시원해집니다. 그거나 해먹어야겠어요.

Posted by 네츠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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