왁자지껄한 연회의 끝이었다. 다다미를 죄 갈아엎기라도 할 듯 젊은 혈기로 날뛰어대며 이기지도 못할 술을 들이킨 동료들은 하나둘 널부러져 잠이 들었다. 호기를 부리며 불러온 기생들도 물러가고, 잠든 이의 숨소리를 헤치지 않으려 나직하게 켜놓은 호롱불 몇 개만이 연회장을 비추고 있었다. 꿈 속에서 입맛을 다시는 녀석이나 술병을 꼭 끌어안은 채 고롱고롱 코를 고는 녀석들이 달빛 아래서 어슴푸레하게 드러났을 뿐 깨어있는 녀석은 없었다. 남은 술과 음식이 어지럽게 흩어진 상 한켠에서 아직 기운이 남은 이들이 몇몇 서로 잔을 부딪히면서 남은 대화를 이어가던 것도 한참 전에 끝났다. 연회장을 채우던 활기는 적지않이 사그러들어 조용한 밤 한구석으로 스며들었다.
"술이 세구나, 신스케."
깨어있는 것은 자신과 녀석, 단 둘뿐이었다. 도련님같은 행색을 어디하나 흐트리지도 않고 녀석은 연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와 똑같이 단정한 자세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와 대꾸했다.
"너야말로 말술이잖아, 즈라."
"즈라가 아니라 가츠라다. 무슨, 천천히 마셨을 뿐이야."
미간을 가볍게 찡그리며 한 말이 무색하게, 가츠라의 앞에는 두자리 수를 너끈히 넘을 술병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었다. 어릴 적부터 집안의 어른들에게 술을 배웠다던가. 술에 주도고 뭐고 있을리 없지만 녀석은 마시는 모양새도 따르는 모양새도 하나같이 단정한 주제에 부어넣은 주량에도 한계가 없다. 애주가는 아니어도 술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중 일순위는 가츠라 고타로겠지. 하잘것없이 이어지는 생각에 피식 어이없다는 비웃음을 띄웠다. 비웃음인 것도 모르는 양 녀석은 애를 어르는 어미같은 말투로 말했다.
"너야말로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냐, 신스케. 귀병대원들 전원이 한잔씩은 따라준 것같은데."
"한잔씩 따라준 것만 보고 대신 마시겠다고 잔 뺏어간 건 못봤나보네."
"그랬었나?"
"녀석들이 나 과보호하는 게 하루 이틀이냐."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수십명의 대원들이 둘러싸고서 한잔씩 따라주겠다 청했을 때는 대장이라고 신경쓰는 모습에 마냥 뿌듯했는데, 잔을 채우는 즉시 다른 놈이 마셔버리고 다시 채우기를 반복하는 모습에는 기가 찼더랬다. 가츠라는 형이라도 되는 양 가볍게 웃었다.
"그만큼 사랑받고 있는 거다."
"퍽이나. 지들끼리 술병 비우기 아쉬우니까 괜히 나를 걸고 넘어진 거지."
"다 낫지도 않은 걸 알면서 무리시키고 싶지 않았겠지. 그.."
거기서 가츠라는 조금 머뭇거렸다. 어디를 말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천인과의 싸움에서 얻은 상처였다. 엇나간 칼끝이 얼굴을 깊게 긋고 지나갔을 때에는 아프다는 생각보다 분노가 먼저 치솟았다. 그 후로도 이어진 것은 고통보다는 열기였다. 얼굴에 엉겨붙는 뜨거운 감촉이 성가셔서 미친듯이 날뛰었다. 마침내 전장에 서 있는 적의 모습이 모조리 사라지고나서야 진득하게 쏟아지는 피를 깨달았다. 그저, 그 정도의 상처였는데.
"칼에 독이 묻어있었다고, 쵸우 씨가.."
"허풍이야. 다 나았고."
답지않게 조심스럽게 말하는 녀석의 말을 귀찮은 듯 허리부터 잘라버렸다. 물론 거짓말이다. 진찰하러 왔던 의사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 상처가 좋지 않아 영영 앞을 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한쪽 눈만으로 보는 것은 눈에 무리가 가. 다른 눈도 언젠가는 멀게 될 게야.' 걱정이라기보다는 한숨에 가까운 노익장의 말을 들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한 눈으로 살아갈 세월의 길이를 헤아려야할 만큼 먼 미래의 일을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지금은, 저 걱정으로 가득찬 친우의 시선이. ..성가셔서.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가만히 냅둬, 그냥. 긴토키고 사카모토고 안 그래도 주위를 뱅뱅 돌면서 시끄럽게 해댔는데 너마저 그러면 못 참아."
걱정어린 눈길로 응시하는 녀석의 눈동자를 똑바로 쏘아보며 입에 담은 말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문지방을 찢고 제 손바닥을 손톱으로 후벼파며 참아야했던 고통이든, 진물과 피가 엉켜서 축축히 젖어든 붕대 아래로 스미는 타오르는 아픔이든 단 하나라도 녀석의 앞에서 흘릴 생각은 없다. 안 그래도 형님행세를 하면서 챙기려고 드는 저 녀석 앞에서만큼은.
"나라고 해서 널 걱정하지 않는 건 아니다만."
"충분히 느껴지거든요, 알아. 그만해도 돼."
"..그래."
어른스레 대답할 생각이었는데 성가신 것을 치워버리고 싶어하는 어린아이마냥 말투에는 어리광이 섞였다. 가츠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묵묵히 술을 한 잔 입가로 옮겼다. 달빛이 그대로 비추는 창가에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은 차라리 한폭의 그림이었다. 앞에 늘어선 술병들은 정말로 혼자 다 비운 모양이다. 부하들의 등쌀에 거의 술을 못 마셨던 자신이야 그렇다치고, 이 시간까지 깨어있는 녀석은 정말 괴물같은 말술이라고 혀를 찼다. 저게 잘도 들어가는구만. 어이가 없어 가만히 응시했더니 한없이 진지하게만 보였던 가츠라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신스케."
"왜."
"한가지 부탁해도 될까."
"몸 조심하라느니 전투에서 조금만 더 진중하게 굴라느니 하는 잔소리면 안 들어."
"잔소리라면 하루 삼시 세끼를 잘 챙겨먹으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할 거다."
"절대 안 들어, 남이사."
"애시당초 신스케 너는 편식도 심하고 식사예절도 나빠서.."
"진짜 잔소리로 넘어가기냐? 좀, 내 엄마도 아니고."
짜증섞인 어조로 말하며 어깨를 퍽하고 때렸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식습관과 식사예절과 유년시절에 대해 줄줄히 늘어놓던 녀석은 그것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동안의 침묵. 조용해진 분위기가 머쓱해져서 끝내 못 이기고 퉁명스레 입을 열고 말았다.
"관두고 원하는 거나 말해봐. 기분나쁜 거 아니면 들어주든지 말든지."
"기분 나쁘면 안 들어줄 거냐."
"생각좀 해보고."
"매정하기는."
"..알았어, 들어주면 되잖아. 뭔데."
어린애가 투정부리는 것같이 철없는 어투로 건넨 말에 스스로 좀 창피해졌지만 유년기의 친구는 개의치 않는 것같았다. 말을 고르듯이, 혹은 생각에 잠긴 듯이. 창밖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녀석은 달에 부서질 것같은 얼굴로 가만히 웃었다.
"나중에 네가 죽고나면 나한테 줘라."
그, 왼쪽 눈. 속삭이듯 말하는 녀석의 얼굴이 달빛에 부서질 듯이 새하앴다. 밤에 스며들 것같은 조용한 어조였다. 온화하게 떨어지는 목소리는 너무도 담담해서 대꾸할 말을 잃었다. 여전히 부드러운 분위기로 자리에 앉아있던 가츠라가 가볍게 손을 뻗어왔다. 피하지 않았다. 검을 쥐는 사내의 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단정한 손끝은 뺨 위를 스치는 듯 하더니 이내 부드럽게 왼쪽 눈가를 쓰다듬었다. 칭칭 감아놓은 붕대 아래, 눈의 형태를 덧그리듯이. 천천히, 다독이듯이. 애무하듯이. 상처자국 위를 나비의 날개라도 만지듯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표정은 한없이 다정했다. 동생을 달래는 형처럼. 아이를 어르는 어미처럼. 그런 얼굴을 하고, 녀석은 울것같은 눈으로 웃었다.
"...무슨 헛소리야. 새끼 손가락을 잘라주는 유곽 기녀쪽이 차라리 애교있겠네."
"안되나."
"가져다 어디에 쓰겠다고. 장식도 안될 거."
목 아래에서 울컥거리는 것을 삼키느라 대답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애써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게 대꾸했다. 그런가, 하고 녀석이 손을 거두었다. 언제 쓰다듬었냐는 양 쉽사리 멀어진 가츠라는 그대로 상 위의 술잔을 집어들었다. 채워넣은 청주가 찰랑찰랑 소리를 냈다. 취기 하나 오르지 않은 단정한 얼굴을 하고 손안의 술잔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웃었다.
"받으면 소중히 하겠다만."
"퍽이나 소중히 할만한 물건이겠다. 흉물이야."
"왠지 너는, 언제고 멀리 가버릴 것같은 기분이 들어서."
뭐라도 남겨주겠다고, 그렇게 말해줘. 중얼거리듯 말한 목소리가 밤의 어둠 속으로 잦아들었다. ..항상 그렇게, 걱정이나 하고. 혀를 차는 데 심장이 먹먹해졌다. 달빛 아래서 호롱불의 작은 심지가 가늘게 떨어 그 너머로 앉아있는 녀석의 얼굴이 일순 흐려졌다. 시선도 맞추지 못하는 다정한 친우를 향해 모른 척 어깨에 팔을 둘렀다.
"기분이다, 찌그러지고 망가진 거라도 괜찮으면 줄게."
농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가츠라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가 묵묵히 응시하고 있는 손안의 술잔에는, 청렴한 달 그림자가 가만히 드리워져있었다. 다음 순간에 가츠라는 술잔을 들어올려 입 안으로 단숨에 털어넣었다. 청주의 향이 훅 끼쳐왔다. 어머니가 아이한테 그리 하듯이, 부드러운 손길로 끌어안겨진 것은 그 직후였다.
-나도 퍽 오래 간직할 명줄은 못되겠다만, 소중히 하마.
귓가에 스치듯 남은 목소리에는 웃음기마저 서려있어 한순간 현실을 잊게 만들었다.
찰나의 연회 속에 들떠보아도,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은 전장에서 검을 휘둘러도 종래에 닥쳐올 결말은 변하지 않았다. 눈 앞에 뻗은 길은 한참 멀었으나 더없이 짧을 것이며, 목숨을 불태운 그 앞길에 드리우고 있는 것은 암흑이다. 지금 눈 아래로 스미는 어둠처럼 텅 비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공동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아무 것도 모르는 양 어미처럼, 혹은 아이처럼 끌어안은 녀석의 팔 안에서 가만히 웃고는 위로하듯 그 등 뒤로 손을 둘렀다. 같은 길을 걷고, 걸어서 같은 끝을 맞게 될. 형제이자 가족, 친우이자 전우인 그를, 그저 끌어안았다.
fin.
06.드라세나 (Dracaena) : 반드시 지켜질 맹약
당연하게 반어법입니다. 다카스기 신스케가 아직 동료들과 함께 있었고 절망하지 않았을 시절.
한참 전에 썼던 나비의 독과 이어지는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왼쪽 눈은 아무 것도 안 남아있겠지요. 가츠라는 알면서 한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