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신의 카오신에 대해 되씹다가 아무래도 납득이 안 가서 쓱쓱. 조낸 동인 설정이라서 치가우와 치가우요 치가우 세번 시전하셔도 AT 필드로 튕겨냄.
카오신을 보다보면 제일 많은게 '지고지순한 카오루'인 것같습니다. 신지를 사랑하고 아껴주고 자기를 다 바치는 그런 헌신적인 애정이요.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죄를 대속해주는 단계까지 가버린 헌신적인 애정을 헌신이 아니면 뭐라고 하겠어요. 의문을 품는 건 그겁니다. "그 헌신이 카오루x신지로 이어질 수 있는가?" 죄송한데 저한테는 NO입니다. 그래서 제 안의 카오신은 헌신하는 카오루x그런 카오루를 사랑하는 신지로 이어지는 게 아닙니다. 열심히 고민해봤는데 제 안의 카오신은 쌍방형 짝사랑입니다. 겁나 일방적인 방식으로.
이게 갑작스레 원 줄기까지 올라가고 레이와 아스카까지 끄집어내서 해야하는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해보죠 뭐.
구극, "에반게리온이라는 기체를 빌려서 주인공 소년의 내면을 펼쳐놓고 극복해나가는 이야기(by 신육계)"에서 다룬 바와 같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카리 신지입니다. 상처도 겁나 많이 받고 유리같이 섬세한 신경에 민감하게 날이 서 있는 열 네살의 어린 아이. 구극에서의 감정은 날것 중에서도 날 것이고 EOE에서 보여준 장면은 서사나 극이라기보다는 감정을 화면으로 옮겨서 그려내는 데에 집중합니다. 사람들의 소리, 거부, 단절, 오해, 외로움, 갈구, 상처, 갈등, 비난, 분노, 고통. 그 모든 인간의, 관계의 고통에 대해 신지가 거부하는 순간 세상은 LCL로 무너져내립니다. 타아의 구분 없이 모두가 느슨한 연결 아래서 하나가 되서, 차이에 괴로워하지 않고 오해로 다치지 않아도 되는 세계.
하지만 그 세계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아스카"입니다. <너하고만은, 죽어도 싫어.> 신지가 박살난 자존감으로 휘청거리고 있는 민감하고 유리같은 신경의 소유자라면 아스카는 자존심으로 바닥난 자존감을 무장하고 있는 여자아이입니다. 내 안을 들여다보지 마. 나를 보지마. 내가 싫어. 위로 가야 돼. 드러내지 않을 거야. 나를 필요로해줬으면 좋겠어. 나를 사랑해줘. 하지만 내 쪽에서 매달릴 수는 없어. 내가 약자가 될 수는 없어. 소거법으로 나를 선택하는 걸 용서할 수 없어. (저는 아스카도 좋아하지만 이건 "이카리 신지"의 이야기이고 아스카의 거부는 계기가 되었을 지언정 전부가 되지는 않기는 합니다.) 어쨌든 아스카의 거부 이후로 세계 속에서 녹아들어가던 신지는 불연듯 눈을 뜹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아야나미. 혹은 아야나미의 얼굴을 한 리리스. 피아의 구분이 없는 결합 속에서 자신 안으로 녹아들어있는 그녀를 신지는 자신에게서 분리합니다.
그 손은 무엇을 위해 있어?
- 다른 사람의 손을 붙잡기 위해 있어.
아야나미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서로 다른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관계를 맺는,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내는 길을 신지는 택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기억하는 한 누구나 원래의 형태로 돌아갈 수 있어." 자기를 버릴 수는 없노라고,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고. 그 길을 갈 수 있게 해준 이정표가 미사토의 목걸이었죠.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태아처럼 안온하게 쉴 수도 있지만 고통과 상처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그런 관계를 맺는 어른에게서 건네받은 유품. 그 목걸이를 쥐고 있는 소년은 서로 다르더라도 이해해 나가는 길을 택합니다.
그리고 분리되어 나온 세상 속. 아직은 피아의 경계가 완전히 구분 지어지지 않은 현실. 꿈에서 깨어난 세상 속에는 타인이 있고 여전히 오해하고 상처받아야하는 관계가 있고, 내가 좋아했던 여자아이. 구해달라고 매달렸던 아이. 나를 거부한 여자아이. 나를 받아주지 않은 여자아이. 상처와 오해와 고통의 증거. 분노와 도피. "나를 싫어할 거라면 사라져버려."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다시 밀려오면서,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지만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는 여자아이의 목을 조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뺨을 쓰다듬는 손. "네 그 손은 무엇을 위해 있어?" "서로에게 닿기 위해 있어." 닿을 수도 있어요. 죽일 수도 있어요. 해치기 위해 들었던 손과 닿기 위해 움직였던 손. 소년은 울음을 터트리고, 그 모순되고 약하고 방황하는 감정을 본 여자아이는 <아스카> 답게 대답합니다. 더이상 소년에게 상냥한 세계의 일부가 아니니까. 서로 하나가 되어있는 LCL이 아니니까. 신지를 처음으로 거부했던 그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로서, 상냥하지 않은 세계에서 살아가기로 한 소년에게, 소년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할 뿐인 대답을 입에 담습니다. "기분 나빠."
에바는 뻐렁치게 빡센 세계관 설정으로 헤매게 만들기는 하는데 이야기에 담은 메세지는 정말 단순해요. 다만 예리할 뿐이죠. 세상은 너를 위해 있지 않아요. 다치고 상처도 입어요.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요. 살아가요. 그게 어른이 되는 법이에요. 진짜 소통을 하는 방법이라고요. LCL 연출이 워낙 압도적이라서 녹고 무너지는 데에서 다들 멘붕했지만 그 메세지는 이, 어머니에게서 이별을 고하고 아이가 어른이 되는 길을 택하는 장면에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신지가 오메데또를 한 거기도 하고. 어머니의 요람에는 이별을. 아버지의 뒷모습에는 감사를, 성장을 택하는 아이들에게는 축복을.
여튼 이러한 이야기 일련의 흐름 속에서 세 여자가 지니는 포지션은 조낸 명확합니다. 카츠라기 미사토는 부족하고 서툴어도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애어른, 신지에게 있어 이정표. "어른의 키스야. 돌아오면 그 다음을 하자." 아야나미 레이는 소망의 구현. 신지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모습을 전해주는, 신지가 답을 찾기까지의 과정. "그 손은 무엇을 위해 있어?"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는 세상의 존재하는 타인의 상징. 하나가 될 수도 녹아내릴 수도 없고 자신에게 상냥하지 않지만, 그래도 닿을 수 있는 타인. "너하고만큼은 죽어도 싫어."
여기서 저는 조낸 돌직구 질문을 던집니다. 나기사 카오루는? 관계를 괴로워하는 이카리 신지는 미사토의 이정표를 손에 쥔 채 레이 안에서 관계의 필요성을 깨닫고, 아스카를 통해서 관계를 맺습니다. 신지는 레이와 결합을 거부하고 손을 잡으면서 "그 손은 타인과 마주하기 위해 있어"를 깨닫습니다. 기억나세여? 신지가 타인과 손을 잡았던 건 처음이 아닙니다. 카오루랑도 잡았었어요. 그 전설의 목욕탕 신에서(...) 그런데 왜 그 때는 깨닫지 않았을까요?
여기서카오신 이론으로 돌아옵니다. 카오루는 "상처주는 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카오루는 헌신적으로 신지를 사랑해줍니다. 구극이든 신극이든, 아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만화판에서는 '나기사 카오루'의 감정에 대해 좀 더 지면을 할애하긴 했지만, 카오루는 신지에게 있어 마음을 위로해주는 존재이자 동경의 대상이고, 마음을 열 수 있는 상대이고(구극),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알려주는 빛이자 죄마저도 대신 떠 안아주는 애정을 베풀어주는 사람(신극)입니다. 요컨대 카오루는, 신지에게 한없이 상냥한 대상인 거에요. 거부하고 상처에 두려워하는 타인이 아닙니다.
<손과 손을 잡을 채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배의 노를 저을 수는 없어요. 가라앉을 뿐이죠. by rurutia.>
카오루와의 관계는 정상이 아닙니다. 타인은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해주지도 이해해주지도 않아요. 하지만 카오루는 그렇게 합니다. 설정상에서는 그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의미적으로는 고립된 신지에게 이끌어줄 대상으로서 배치되었기 때문이죠. 카오루와 있는 한 신지는 상처받지 않습니다. 상처주지 않는 타인이니까요. 사처받지 않는 관계 속에서 신지가 만족한다면 변화는 찾아올 수 없습니다. '서로 다치더라도 알아가는 것'이라는 의미를 처음부터 부정하고 있는 게 카오루와 신지의 관계입니다. 카오루는 100% 나에게 맞춰주는 타인이니까요. そんなのほかにいるわけがない。 무조건적인 이해와 애정과 헌신. 신지를 그 속에 남겨두면 이야기는 당연히 굴러가지 않을 것이므로 모든 에바 시리즈에서 카오루는 어떻게든 신지와 이별을 고합니다. 미사토, 아스카, 레이와 다르게 카오루는 관계에 대한 신지의 상처에, 공포에 어떤 해답을 주는 역할은 하지 않아요. 카오루의 방향성은 오히려 '왜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대답이에요. "너에게는 살아갈 가치가 있어." 카오루가 신지에게 남겨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말, 애정어린 유언.
그 점에 있어서 카오루와 신지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모습은 아닙니다.(그걸 위해 카오루는 인간이 아닌 사도로 등장했죠) 카오루와 신지의 만남은 "신지에게 살아갈 가치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한" 만남이에요. 아담이 자기 목숨을 버리고 너희들에게 미래를 맡길 만큼 너는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생명이야. (구극) 혹은 네가 지은 죄는 내가 떠맡아 안고 가겠어. 너는 행복해지는 길을- 미래를 생각해. 원죄는 사라졌으니까, 살아갈 앞 날에 대해 생각해.(신극) 따라서 신지는 카오루를 통해 관계에 대한 감정을 느끼지 않습니다. 카오루와의 관계를 이정표로 삼지도 않고 해답을 찾기 위한 시간으로 찾지도 않고 거부와 마주하는 순간으로 여기지도 않아요. 카오루와 신지의 관계는 그저 평화롭고 안정적이며 완벽합니다. 교감하는 것 자체로 완벽할 수 있는 관계. 상처받지 않는 카오루와의 대화. 따라서 카오루와 신지의 만남은 극에서 던지는 '타인과 마주하기'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둘의 관계는 다른 타인들과는 맺을 수 없는 관계이며 한쪽이 한쪽에게 감정을 남기고 가는 것일뿐 연속되는 관계가 아니니까요.
입에 침이 마르게 설명했는데 요약하자면 이상의 내용에 기반해서 카오루와 신지의 관계는 극에서 논하고자하는 '서로 상처입고 부딪히면서도 알아가기 위해 손을 잡는 것'이라는 관계에서 멀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카오신이 헌신을 기반으로 상사상애하는 관계로 생각할 수가 없는 거에요. 서로에게 맞춰주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맞는 관계라니, 그건 이상한 거죠. 사실 이 둘의 소통은 굉장히 일방적이기까지합니다.
카오루는 신지에게서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아요. 카오루의 헌신은 철저하게 자기완결형입니다.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되돌려받으려하지 않으며, 주는 방식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자기 위주입니다. 카오루는 신지에게 아쉬움을 느끼거나 보답을 바라지 않아요. (그 점에서 만화판 나기사는 훠얼씬 인간적이었죠) 심지어 잘 뜯어보면 호의를 받아들이는 신지가 어떻게 생각할지 별로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릴린에 대한 감상, 신지에 대한 자신의 느낌, 조근조근한 어조로 자기 감정을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신지에게 받아달라고 채근하지도 않습니다. 거절해도 네가 그렇다면, 하고 넘어갈 것같아요. 카오루는 신지를 사랑하고 아끼지만 그 감정을 공유하려고하지 않습니다. 나는 너를 좋아해. 여기서 끝. 네가 나를 좋아하기를 바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으며, 함께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떠나는 순간에 상대가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생각 안하는 애정. 너는 살 가치가 있으니까 나는 대신 죽을게. 그 헌신적인 카오루가 자기 죽음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전혀 생각안할 수 있는 건 이 애가 신지를 사랑할 지언정 '나와 신지'로 이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겁나 일방적이에요.
신지도 카오루에게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봅니다. 그 이상은 알려고 하지 않아요. 피아노, 망가진 S-dat, 다정하게 건네주는 말, 함께 본 별, 호의와 애정. 어떤 타인도 처음 만나는 다른 이에게 그런 것들을 주지는 않아요. 카오루는 줍니다. 어떤 타인도 아닌, 인간(릴린)도 아닌 사도니까요.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신지는 성장한 어른이 아니고 관계를 맺을 수 있을만큼 성숙한 인간도 아니고 상황조차 다른 사람을 배려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여 자기를 회복하는 데에도 벅찹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그렇듯이 자기의 중심은 자기한테 있는 거죠. 구극에서는 동경과 애정때문에 함께 있는 것으로도 만족해서 카오루에 대해 더 알려고 하지 않았고 신극에서는 카오루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세계를 그렇게 만들어버렸다는 죄책감에 짓눌리는 것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카오루에게 다가가지 않습니다. 받는 것으로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신지와 카오루의 관계에서 카오루는 지극히 비인간적이에요. 자기를 주장하거나 드러내는 일 없이 철저하게 신지에게 맞춰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추하고 부족한 부분까지도 포함해서 알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는 신지는 자기가 보고 싶은 카오루만 봅니다. 추하고 부족한 부분을 갖지 않은 사도 타브리스는 그걸 어렵지 않게 해내죠. 이건 호의와 애정은 될 수 있어도 연애는 될 수가 없어요. 상대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고 부딪히고 싸우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게 되는 연애랑은 아주 다른 거죠. 상대에게 맞춰준 삶. 조건없는 호의. 거기에 익숙해진 신지가 타인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하면 분명 거절 당할 거에요. 카오루가 이걸 알고 있었든 몰랐듯 카오루의 사랑이, 헌신이 신지의 성장에 도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구극에서 신지가 변화할 수 있었던 건 카오루와의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카오루와의 이별을 통해서였죠.
카오루와 신지의 관계는 그리하여 따뜻한 물에 들어가있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구석구석 상처받은 곳까지 스며들어 낫게해주고 살아갈 기력을 주고, 그 후에는 말라버리는 물. 그게 나기사 카오루이고 그 물에 기대어 치유받고 물을 벗어나면서 성장하는게 신지입니다.
뭔가 겁나 길게 썼는데, 그래서 저는 단순히 "카오루가 신지한테 헌신적이니 신지도 카오루를 좋아할 거야 해피엔딩"이 되는 전개에 동감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애정일지 모르지만 사랑은 아닙니다. 신지가 섹스하고 있는 미사토를 보고 더럽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연애는 서로 바닥까지 보는 거 아니었나요. 그 점에 있어서 저 둘의 애정은 쌍방 짝사랑이에요.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것만 보고 서로에게 나쁜 부분을 보지 않는다니. 차라리 다친 아이를 품어주고 키워준다는 의미에서 어머니의 사랑같은 거라고 하면 모를까. 그 어머니의 사랑은 하나밖에 없는 거고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신지에게 있어 생애 두번 찾아올 일은 아닌 거잖아요......
원작 따지기는 여기서 끝내고, 공식에서 다루는 카오신의 관계가 저런 식으로 느껴지는 이상 커플링 덕질!을 하려면 저걸 기반으로 両思い가 되는 건 싫습니다. 다르고 맞지 않는 부분을 부딪혀가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으로서 부딪히는 관계가 있어야 상사상애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런 사건에 대해서는 특별히 아직 생각한 게 없어, 여전히 제 카오루는 신지를 목하 '짝'사랑하고 있고, 달리 붙잡을 끊이 없는 신지도 마음껏 카오루에게는 기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헌신에 기반한 러브러브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싫습니다. 카오루의 헌신은 자기완결형으로, 신지의 의견을 구하지 않고 신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줍니다. 헌신적이긴하지만, 그 감정이 신지과 소통하는 것이 되기보다는 카오루 안에서 결말을 짓고 끝내버리는 거에요. 죄의 대속 좋죠. 열 네살 어린 애 앞에서 웃으면서 폭사해버리는 거 아니라면. 그 점은 신지도 별 다를 것 없어서 자기를 위해 준비된 것같은 이 소년에게 의지하면서도 항상 카오루보다는 자기자신이 우선입니다. 카오루의 헌신만큼 자기도 배려를 해줄 생각은 안해요. 당연합니다, 어린애니까요. 그리고 애들은 연애 못하죠.
그래서 이 둘로 커플 덕질을 한다면 그 것보다는 성장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렇게 입아프게 떠들어놓고도 내 안의 카오루와 신지는 그렇게 성장 안해쒀!를 외치게 되기 때문에(...) 제 안의 카오신은 여전히 서로에게 짝사랑중입니다. 기대고 다독이려 애쓰는 어린아이들. .....아무리 생각해도 전 만화판 나기사가 제일 신지와 연애라는 형태로 가까워질 수 있을 것같아요. 부딪히고 화내고 자기 감정을 밀어붙이고 거부당하고 당황하고. 아니 물론 에반게리온의 의미상 카오루랑 연애하면 신지의 성장은 거기서 끝날테니 소레 무리..하게 되겠지만 그건 공식이 알아서 할 일이니까 저한테는 알 바 아니란말입니다(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