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렇게, 자신은 무언가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잃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플랜은 엑시아에 전송시켜두었으니까. 실시간 예측은 이어지니까 접속 켜둬줘? 아, 출격은 14:00 pm. 북아메리카쪽이니까 잘만하면 오래 걸리지는 않을거야. 정확한 좌표는-"
솔레스탈 비잉의 내부. 뛰어난 전술예측가인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가 건담 마이스터들을 상대로 ‘무력개입’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그 플랜의 내용이나 그들의 위치로는 지극히 무게있는 장소지만 슬라이드 앞에 서 있는 젊은 여성과 그 앞에 나란히 앉은 열 여섯에서 스물 넷 사이의 청년들은 왠지 모르게 하계 강습이라도 연상시킬 듯한 느낌이었다. 그나마 가장 잘 들어야할 주역은 열 여섯살의 소년이다. 이번 계획에는 대인전이 포함되지 않는 점도 있어 어느 정도 기분이 가벼워진 탓이었을까, 왠지 모르게 귀엽구나 싶은 기분에 저도 모르게 풋 웃어버린 스메라기는 화면을 끄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더 필요한 건?"
"없어."
묵묵한 목소리로 말을 짧게 끊은 가장 어린 파일럿- 세츠나 F 세이에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익숙해진 그녀는 별로 머쓱해하지는 않았다. 당황해서 혀를 찬 건 리더격인 록온 스트라토스였다. 그가 그럴 것은 없을 텐데도 미안, 하고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사람좋은 그에게 스메라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록온은 태평한 목소리로 앞서 가는 세츠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세츠나. 아무리 그래도 연상을 상대로 좀 더 예의를 차려야지?"
막내를 다독이는 형같은 목소리였다. 세츠나는 반응이 없었다. 평소에도 무뚝뚝한 아이였지만 오늘 따라 더 하다고 막연히 생각했을 때, 문득 록온은 세츠나의 체온이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도 막연하게 전해오는 열기.
..설마.
"..세츠나?"
"건드리지...."
풀썩.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세츠나!!!"
열이 난다거나. 몸이 아프다거나. 머리가 욱신거린다던가. 베인 상처가 아프다던가. 긁힌 곳이 쑤신다거나. 다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감각을 심각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눈 떴어?"
"...."
눈을 떴을 때 시야를 온통 채운 건 연한 비취색깔이었다. 척박한 사막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빛깔이었다. 멍하니 아름답다고 생각하다가, 세츠나는 이내 그 것이 동료 파일럿의 눈동자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니구나. 왠지 모르게 납득하며 세츠나는 몸을 일으켰다. 정확히는, 일으키려고했다.
"..아..."
휘청.
"가만히 계세요, 이 도련님아."
고개를 든 순간 어찔하고 무너지는 몸을, 록온은 잔소리많은 어머니처럼 받쳐 안아 다시 눕혀주었다. 아직 상황파악이 덜된 눈으로 세츠나가 올려다보자, 피식 웃은 록온은 움찔하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세츠나의 귀에 무언가를 가져다 댔다. 삐삐, 하고 울리는 전자음에 일순 몸을 굳혔지만, 록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것을 꺼내더니 적힌 수치를 읽었다.
"37.8도. 좀 떨어지긴 했네. 그래도 누워있어."
"..무슨.."
목이 말라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아차차, 하고 혀를 찬 록온이 컵을 집어들어 입에 대주었다. 컵을 잡으려 했지만 록온은 놓아주지 않았다. 무리하지마, 하고 핀잔에 가까운 어조로 말하고 컵을 기울여주는 그의 박력에 눌려서 세츠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차가운 물이 목을 적시는 감촉이 좋았다.
"쓰러지고서는 39도까지 올라갔다구. 너 자기 몸은 스스로 돌보는 거라는 말은 알고 있는 거냐?"
그릇을 달그락거리면서 말하는 목소리에는 걱정이 배어있었다. 그런 말을 하는 주제에 지금 실컷 남을 돌보고 있는 거라는 자각은 있는 것일까. 열 탓인지 어른거리는 머리로 어울리지 않는 불평을 떠올렸다. 그 느낌을 떨쳐버리려 애쓰며, 세츠나는 굳이 소리를 목 바깥으로 밀어올렸다.
"..플랜은?"
"변경. 까진 아니고, 엑시아에서 버체로 수행기체가 바뀐 것뿐이야."
"..내가.."
"병자는 쉴것. 그게 만고의 법칙이잖아?"
토닥토닥 머리를 두들겨주고, 록온은 쌩하니 나가버리던 티에리아가 마지막으로 ‘어서 나아 임무를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티에리아 다운 소리지-하고 그는 웃었지만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저, 빙긋 웃는 진녹색 눈동자가 몹시 상냥하다고 새삼 생각했다.
"자, 수건 갈자-"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은 한가로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록온은 적신 수건을 비틀어 물기를 짜냈다. 성인 남자의 큰 손이 수건을 비틀어짜는 모습이 묘하게 낯설어 세츠나는 열에 들뜬 눈으로나마 그 쪽을 바라보았다. 멍한 머리는 록온의 손을 보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감지하기까지 제법 시간을 소요했다.
젖은 천을 만지면서 장갑을 낄 수야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딘가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록온은 서늘한 수건을 세츠나의 이마 위에 꾹꾹 얹어주고 만족스레 웃었다. 해열제라던가, 냉각시트라던가. 그런 물건이 시중에 나온 건 이미 몇 백년도 전부터고, 톨레미 내에도 당연히 의료도구는 얼마든지 있을 거다. 그런데도 선택지는 얼음물에 적신 손수건. 몹시도 록온 스트라토스다워서 한숨이 나왔다.
"그러고보면 너 낮에 밥도 안먹었지? 기다려, 환자식이라도 해줄테니까. 어떤 게 좋아?"
".....환자식?"
"하아?"
돌아서며 경쾌하게 말하던 록온이 돌아섰다. 약간 떨더름하게 웃고, 그는 몹시도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처럼 곰살맞은 태도로 물었다.
"..저기 세츠나군? 환자식 먹어본 적 없어?"
"..환자가 먹는 음식?"
"에이,알고 있잖아-"
"이론적으로는."
막힌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놀라는 록온의 얼굴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목은 따끔거리고 머리는 아픈데도, 이 상태는 어쩐지 편하다. 눈을 깜빡이는 세츠나를 보고, 록온은 어린 동생에게 이상한 것을 질문받았을 때 대꾸할 말을 못찾는 형같은 얼굴을 하고 곤란한 듯 손가락을 두드렸다.
"좀 더 몸을 챙겨. 환자식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야."
".........응."
"그래야 착한 애지."
옅게 웃고, 록온이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상냥한 색의 갈색 머리. 조금 큰 체격. 그 뒷모습을 새겨두듯 눈을 깜빡였다. 문득 피로가 밀려와, 세츠나는 쓴 듯 옅게 웃었다. 그 것도 오랜만이었다.
고통이나 병환을 겪지 않았던 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인생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도 더 많이 다치고, 더 많이 아팠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그런데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던 건, 그저 그 장소에서는 ‘아프다’라는 어리광이 통하는 곳이 아니어서였다. 총소리. 피. 죽음. 매캐한 흙먼지와 화약냄새. 모래맛이 나는 빵. 거친 땅. 그런 것들이 일상에 배어있는 그 장소에서 고통은 고통이 아니었다. 그저 익숙해져가는 감각중에 하나였다.
"세츠나- 어라, 너 약먹고 자야된다?"
"안 자."
"눈이 졸렸는데. 일단 좀 먹고."
쟁반에 김이 오르는 음식을 받쳐들고 돌아온 록온은 다정하게 잔소리같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조금쯤은 선선하게 그가 하는 말들을 받아들이며 세츠나는 록온이 이끄는 대로 상체를 일으켰다. 묽게 만든 수프를 담은 수저를 입가까지 굳이 옮겨주는 록온의 과잉보호에 세츠나는 가타부타 불평을 하진 않았다.
입안에 확 퍼지는 부드러운 맛의 수프를 삼키면서 세츠나는 졸음에 찬 눈을 반쯤 떴다. 잠과 열 때문에 다소 희미해진 시야에, 록온의 새하얀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크고, 강한 선의, 평범한 남자의 손. 알 수 없는 감정은 그래서였다.
...만일 아버지가 있었다면, 당신같은 느낌이었을까.
여인의 고운 손과 품에 안아주는 애정같은 건 오래전에 피색으로 물들어서 지워져버렸다. 그건 아직도 입을 벌리고 있는 상처같은 것이라서, 세츠나는 그 것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큰 손으로 돌봐주는 애정은 기억보다도 아픈 상처에 뒤덮혀있는 과거 속에서도 없었다.
"세츠나?"
록온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츠나는 몸을 숙여 록온의 가슴에 기댔다. 자신보다는 한참 큰 남자의 존재는 그의 유년시절에는 분명 없던 것이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이 의사 가족관계에 순순히 몸을 내맡길 수 있는 건지도 몰랐다. 과거에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이 사라진 ‘아버지’의 존재. 그 것이 살아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저 기대어 보호받는 아이로 있어도 될 것같은 안락한 장소.
솔레스탈 비잉에 들어온 이후로도 자질구레한 부상은 있었다. 어딘가 다친다거나. 몸 상태가 나빠진다던가. 그래도 딱히 치료를 받아야겠다거나 아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그냥 견뎌낼 수 있는 것이었다. 반복되서 쌓이는 상처가 이윽고 딱딱하게 굳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흉터가 되는 것처럼.
...그런데, 지금 자신은 아프다.
세츠나는 옅게 웃었다. 그러한 약한 소리는 소란 이스라힘으로도 세츠나 F 세이에이로도 허락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살모의 죄를 저지른 어린아이에게 돌아갈 장소가 없다는 것은, 14세의 어린 아이에게도 확실히 각인으로 남아있었다. 하물며 제 손으로 변혁을 위한 살육을 결심한 파일럿으로서는.
"세츠나?"
한번 더 물어오는 남자의 짙은 앰버 블루의 눈동자가 걱정스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다정했다. 허락되어서는 안되고 스스로 원했던 적도 없는 장소를, 대상을 바라게 만들만큼.
...나를 약하게 하는 건 분명 당신이다.
구원을 바라는 것따위. 도움을 바라는 것따위. 자신은 진작에 그러한 감정들을 내버렸다. 세상에 신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그 날부터. 따라서 세츠나 F 세이에이로 있기 위해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한없이 다정했다. 쉬어 기대어도 좋다고 속삭여주기라도 할 것처럼. 반발을 느끼면서도 그 애정을 거부하고 싶지 않은 자신이 있었다. 알고 있다. 지속되어서는 안되는 감정이다. 이어져서는 안되는 나약함이다.
그래도. 기대어 눈을 감은 지금이 너무도 평온했다.
세츠나는 그래서 록온에게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저, 안겨 잠드는 아이처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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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다 해도 된다고 토닥토닥 웃어주고서 간 놈이 나쁜놈. 동생이 무슨 꼴 당해도 할말 없습니다, 땅땅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