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우주처럼 빛날 때, 하늘에 비치는 검은 빛깔들이 노회한 노인의 얼굴 위로 내려앉는 세월처럼 깜빡일 때에, 인간이 사는 시간이 덧없노라, 그렇게 속삭이는 유구하고 항구한 빛들을 볼 때, 결코 영원을 말할 수 없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 인간의 눈동자를 한 채.
너는.
아마 너는 내가 보아온 14년 간의 생명들 가운데서 가장 약하고 어리고 연약하고, 그리고 또 섬세하고 가엾고 아름다워서.
아침이 시작되기 전 그 폐허 속에 네가 앉아있다. 작은 어깨를 웅크리고, 미성숙한 자신을 지우려는 듯 힘겹고 슬픈 모습으로. 누에고치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가려는 유충처럼. 가는 햇살이 어깨를 스칠 즈음 너는 그 어깨를 가볍게 떨며 팔 안으로 고개를 묻는다. 아침이 온 것을 슬퍼하듯이.
그래도 너는 뻗는 내 손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고치 틈에서 몸을 일으켜 다시금 빛 아래 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너는 피아노 앞에서 손을 움직이기를 주저한다.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로, 음이 시작되기 전 그 최초의 순간까지. 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흰 건반 위에서 머뭇거린다. 누군가 이정표를 건네주기를, 자신에게서 책임을 앗아주기를, 남김없이 포기하게 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나는 말없이, 그 손의 옆자리를 지킨다. 건반 위에서 손가락이 서로 스치면 네 귓가에는 붉은 물이 들어, 연탄곡은 꿈 속으로 빠져든다. 네 현실을 멀리 뒤로 두고.
종종 너는 차가운 식판을 앞에 두고 먼 곳을 바라보는 얼굴을 한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드리워진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어, 나는 늘 그래왔듯이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닫는다.
-먹어도 돼? 그럴 자격이 있어? 나는, 살아있어도 돼?
어린 눈동자 깊숙이 절망을 품고, 너는 답을 구하듯이 내 앞에서 침묵한다. 나는 미소와 함께 너의 질문을 삼켜, 모른 척 내장 깊숙한 곳으로 밀어넣는다.
무너진 도서관의 폐허 속에서, 너는 정성스러운 손길로 무의미해진 활자의 조각들을 끌어모은다. 그늘 속에 감추어진 책들은 빛에 바래거나 바람에 찢겨지지도 않아 너는 익숙한 책등을 쓰다듬을 때마다 깜빡,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밝은 얼굴을 한다. 14년 동안 침묵해 있던 공간 속에 부드러운 온기를 불어넣으려 네 손을 바쁘게 움직인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문다. 그 곳은 무덤이며 남은 책들은 그 유해라고, 14년간 풍화된 것은 책이 아니라 인류이기에, 이제와 그 책의 기억은 아무런 의미가 없노라는 그 말을 내뱉지 못한다.
밤이 내려앉고 쌓아올린 책 위로 새로운 것들을 얻어놓고 돌아온 너의 어깨는 유독 힘이 없어, 하루 분의 생명을 다 써버렸노라고 그리 말하는 것처럼 우울해보인다. 워크맨의 같은 트랙을 끝도 없이 반복하는 너는 허물처럼 덧없고 메말라 부서질듯이 반짝인다. 또다시 하루가 끝났어도 너는 여전히 우울한 일상에 짓눌려가고 있다는 것을 감추려는 듯이.
나는 내 곁에 누워 움츠린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듯이. 말없이 고개를 돌려 품안에 얼굴을 묻는 너는 어른에게 기대려는 아이처럼, 어머니를 찾는 아기처럼 연약하고 순수해서. 나는 말없이 그 뒷머리를 끌어안아, 어깨에 스치는 네 숨소리를 듣는다. 까만 머리에 뺨을 묻고서, 하나의 심장소리를 나누어가진 양, 몸을 울리는 너의 고동을 나누어듣는다.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태어났어.>
어른이 아닌 이 팔은 남김없이 끌어안아 주지 못한다. 어른이 아닌 몸은 남김없이 보호해주지도 못한다. 품안에 넘치는 너를 가만히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 전부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 지켜보는 것, 곁에 있어주는 것. 분명히 나는, 무겁고 괴롭고 우울한 그 곳에서 너를 완전히 꺼낼 수가 없다.
작고 가여운 아이. 의지할 곳이 없는 현실 속에서, 무너지는 발치를 보지 않으려 필사적인 아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목소리를 위로로 삼으려는 듯, 끌어안은 너의 팔은 힘을 더한다. 이 외의 모든 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그렇게 울고 싶어하는 것처럼. 떨리는 팔을, 어깨를, 내리깐 눈꺼풀을 바라보면서, 거짓없는 진심을 너에게 전한다.
나는, 네 모든 괴로움을 떠맡아줄게. 죄도, 그 보속까지도.
노래하듯 나직히 흘러나온 목소리에 네 속눈썹이 움찔하고 가늘게 떨린다.
..카오루 군.
카오루 군.
..카오루..군.
여린 너는, 끝내 눈물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네 목소리가, 그 눈물의 대신임을, 나는 안다.
fin.
카오루가 에바큐의 히어로가 아니라 히로인이 된 건 지고지순한 순정(...)때문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