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찬란한 봄이 지나고 차가운 겨울이 찾아왔을 때, 오딘의 둘째 아들 로키는 제가 다른 아스가르드인들과 달리 추위를 타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것이 단순히 자신의 체질이 달라서라고 믿었다. 물의 마법을 사용하는 이는 얼음의 기운에도 강하다는 것이 원로 마법사의 설명이었고, 로키는 자신이 성 안에서 몇 안되는 물의 마법사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그 믿음에도 불구하고, 열 다섯번째 겨울이 찾아왔을 때 그는 성 뒷편의 산을 올랐다. 하얀 눈은 베일처럼 세상을 뒤덮고 있었고 만물은 몸을 수그린 채 겨울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하얀 눈밭을 걸으며 로키는 조용히 절망했다. 산등성이를 걸으며 그는 뺨 위로 내리는 하얀 눈을, 발끝을 적시는 얼음장같은 물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얼음 위를 걷는 그의 맨발은 결코 얼어붙지 않았으며, 눈 사이로 토해내는 그의 숨은 희게 질려있지 않았다. 절벽끝에 멈추어서서 그는 겨울 아래로 파묻힌 아스가르드의 궁성을 바라보았다. 위대한 아버지의 것이며 아스가르드의 영광. 그 성의 주인은 그가 아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얼어붙지도 차가워지지도 않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로키는 이내 눈을 꽉 감아버렸다.
2.
그 차가운 겨울에 토르는 왕의 후계로서 정식으로 임명받았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도 잊게 만들 성대한 연회장 속에서 어린 토르는 마음껏 자신의 영광에 취해있었다. 대다수의 아스가르드인 들은 몰려오는 겨울의 추위를 싫어했으나 토르는 여름날의 찌르는 듯한 햇살만큼이나 겨울철의 싸늘한 하얀 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덮는 하얀 눈은 고요하고 눈부셨으며,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는 들이쉴 때마다 그의 심장과 폐가 얼마나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지 상기시켜주는 것들이었다.
겨울의 추위를 날려버릴 듯한 화로와 음식들 앞, 떠들썩한 공기와 젊은 영광에 취한 토르는 연회장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자신의 동생을 찾았다. 소란을 싫어하고 말수가 적은 동생은 일찌감치 연회장을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토르는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술잔을 마지막으로 죽 들이킨뒤, 화톳불에 잔을 내던지고 정원으로 나섰다. 취기와 떠들썩한 웃음소리로 무르익은 연회장은 주역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연회장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토르는 부르르 떨며 흰곰가죽 외투를 어깨 위로 끌어올렸다. 지난 겨울 자신이 사냥해온 곰에게서 얻은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무겁긴 했지만 퍽 따뜻했다. 로키에게도 같은 것을 선물했으나, 추위에 강한 로키는 성가셔서 싫다며 그 외투를 어딘가에 처박아놓은 채 잊어버리고 말았다. 뼛속까지 시리는 추위에도 그는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 술로 달아오른 더운 입김을 토하자, 하얗게 얼어붙은 그 것이 길을 만들듯 넓게 쳐저나갔다. 몹시도 추운 날이라고, 토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끝으로 동생의 흔적을 더듬었다. 추위 속으로 가라앉은 정원을 한참 해매고서야, 토르는 정원 한켠에 나 있는 가지런한 신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겨울용 덧신을 신지 않은 신발자국. 아무리 많은 눈이 내려 뼛속까지 추위가 엄습해오는 날에도 동생은 가벼운 걸음으로 눈 사이를 걸어다니곤 했다. 그렇게 따뜻하게 입으라고 말을 해도. 토르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발자국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얼마 걷지 않아 토르는 조심스럽게 멈추었다. 눈 속에 사슴가죽으로 만든 가벼운 신이 떨어져있었다. 이 겨울에 이런 신을 신을 사람은 하나뿐이다. 신을 주워올린 토르는 그 신 옆으로 나있는 맨발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이 추위에.
토르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을 맛봤다. 부어넣다시피 마신 술로 데워진 뱃속까지도 조여드는 날씨다. 토르의 얼굴에서 여유가 처음으로 사라졌다.그는 손끝이 곱아드는 바람도 무시한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눈 속에 파묻혀있는 발자국은 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3.
얼마나 걸었을까. 흰 곰가죽 외투의 아랫부분이 눈의 물기를 먹어 묵직해지고 그도 곧 다시 얼어서 딱딱한 돌덩어리가 옷 끝에 매달려있는 듯했다. 수염에 엉긴 더운 숨이 얼어붙어 버석버석하는 소리를 내고 무릎 아래의 감각이 사라질 지경이었다. 눈이라기보다는 얼음덩어리에 가까워지고서야 토르는 높게 솟은 산등성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토르의 시력은 살이 에이는 추위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그 형체가 동생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발 아래로 왕국의 무수한 빛을 깔아놓은 채 로키는 물끄러미 그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달빛에 드러난 얼굴이 토르의 눈에 들어왔다. 맨발로 눈을 딛고 섰는데도 하얗고 창백한 얼굴에는 얼어붙은 듯 표정이 없었다. 깊고 짙은 녹색 눈동자는 무감정하게 먼 곳을 보고 있었다. 하얀 눈 위로 도드라지는 녹색의 옷이, 검은 머리카락이. 얼어붙어 사라질 것처럼 싸늘하고 차가워 토르는 그만 걸음을 멈추었다.
그 인형같은, 동상같은, 얼음같은 얼굴이.
다가서려던 토르는 멈칫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로키의 추위에도 달아오르는 일이 없는 하얀 얼굴은 무표정한데도 어딘가 덧없어보일만큼 서늘했다. 얼음처럼, 눈처럼 한순간 눈에 휩쓸리면 그대로 사라져버릴 듯한. 토르는 상대의 감정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지닌 선명한 본능이, 동생에게 품고 있는 애정이 그의 걸음을 멈추게했다. 이성적으로라기보다는 감정적으로 토르는 자신이 지금 그의 옆자리에 서는 것이 해서는 안될 일임을 알았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동생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토록 차갑고 창백한 얼굴을, 표정을 그는 결코 지어본 적이 없었다. 추운 얼음 속에서 살아가는 요툰하임의 서리거인들이 아스가르드의 봄에 찬란하게 피어나는 새싹과 태양의 빛을 이해할 수 없듯이 토르에게도 눈 앞의 풍경은 어렴풋이 형체로나 그려볼 듯 결코 손에 잡힐 듯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지금 로키의 곁에 다가서는 안된다고, 토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감정에 휩싸인 얼굴을 다른 사람에게 보인 어린 전사들은 자신의 나약함에 상처를 입는다. 토르는 자신의 어린 동생이 이미 한 명의 전사로서 사고하고 있음을 알았다. ...돌아가야할까. 엄습하는 추위 속에서 토르는 쓸쓸하게 생각했다.
4.
밤하늘이 어두워지고 별이 아스가르드의 하늘을 수놓기 시작할 때에 로키는 서 있던 자리에서 되돌아섰다. 밤의 어둠 속에서 궁성을 가득 채운 열기는 더욱 빛나고 있었고 그 환희는 심장 안쪽에 도사리고 있는 무언가를 찔렀다. 로키는 탄식보다 비웃음에 가까운 한숨을 내뱉었다. 녹색 눈의 괴물이 뱀의 혀를 날름대기 전에 벗어나자. 눈이 내리고 있었고 맨발로 딛는 눈결은 차가웠으나 단지 그뿐, 몸을 얼어붙게 하지도 해를 가하지도 않았다.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내려왔을 때, 로키는 하얀 눈발에 묻힐 듯이 서 있는 커다란 그림자를 발견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은빛 털이 눈에 뒤덮여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곰이다. 재빠르게 판단한 로키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림자는 이미 너무 가까웠다. 사냥을 나설 때면 네 다섯씩 무리를 지어서 사냥하던 것흘 혼자서 물리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마술의 스펠을 외우며 마력을 모으려는 찰나, 눈에 뒤덮인 곰이 손을 흔들었다.
"이런, 로키."
로키의 초록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눈에 뒤덮인 곰의 얼굴부분이 젖혀지더니 별안간 어린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이 나타났다. 코며 뺨이 전부 얼어버린 것처럼 불그죽죽한 빛이었다. 로키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스펠을 없앴다.
"..형?"
"산책하러 나왔는데 우연이구나."
"산책?"
"그래."
토르는 자랑스러운 듯 벙긋벙긋 웃었다. 그 머리에서 한참동안 쌓였던 눈덩어리가 우수수 떨어졌다. 어이가 없어 로키는 형을 바라보았다. 곰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토르가 한참이나 자랑했었던 흰곰 가죽 외투였다. 사냥에서 직접 잡았다며 들떠서 자랑하는 것을 들었었다. 토르는 혼자 잡은 것마냥 위세가 등등했지만 실은 함께 간 어른들의 조려기 더 컸다는 말에 그를 남몰래 비웃기도 했었다. 그런데..
"무슨 산책을 머리에 눈이 덩어리로 쌓일 때까지 해?"
"어, 음.. 이 산은 볼게 많아서."
"퍽이나.."
"너도 내려가는 길이면 같이 가자꾸나!"
씩씩하게 외치는 토르를 보며 로키는 미간을 찌푸렸다. 넓다 한들 왕궁의 아이들에게는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한 이 산에 특별히 눈에 띌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하물며오늘 같은 날에는. 어이없다는 마음을 담아 노려봤지만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기세 좋게 토르는 로키의 옆에 나란히 섰다.
"같이 가자고."
"......."
같은 말을 다시 반복하는 그를 로키는 한심하다는 마음을 가득담아 노려봤다. 추위로 꽁꽁 얼어 떨지도 않는 토르는 모른 척 씩 웃었다. 로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싱글벙글한 토르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은 로키보다 조금 빨랐지만 토르는 눈치채지 못한 것같았다. 한숨을 푸욱 내쉰 로키는 종종걸음으로 보조를 맞추었다.
눈길에는 두 쌍의 발자국이 새겨졌고 그 끝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fin
'제 안의 토르는 로키를 좋아하네요'라는 문장과 함께 적어뒀던 내용이었는데 그럭저럭 써 올립니다.
건드리지 못하지만 멀어지지도 않을 소년 시절의 토르. 상처받아도 구원도 받고 있었을 로키.
토르는 로키를 '이해하진 못하지, 그래도 내 형제니까'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같아요. 자기가 들어갈 수 없는 장소도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음 ㅇㅇ 하고 받ㅇ들일 것같은 타입. 로키는 형이 가진 자기와 다른 부분을 짜증내고 싫어하면서도 제 쪽에서는 밀어낼 수 없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