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그림자처럼.
혹은 빛처럼.
떠올라 스며들었다.
쓰러질듯 서늘한 여름밤이었다. 하늘에는 어두운 달이 떠있었다. 하나뿐인 낡은 침대 위로 스미는 달빛은 빛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림자에 가까워서, 어슴푸레하게 드러난 초라한 모든 것들에는 짙은 음영이 깃들었다. 잠 못들은 듯이 뒤척이다가 성마른 곰팡내가 스민 낡은 이불이 목께까지 꼭꼭 덮여있음을 알았다. 옅은 미소를 짓고 바라본 옆자리에는 큰 덩치를 구겨넣기라도 할듯, 침대 끄트머리에 몸을 꼭 붙이고 누운 남자의 검은 형체가 동그란 산처럼 떠올라있었다. 손을 뻗어 그 어깨를 토닥였다. 낡은 이불을 온통 나에게만 둘러주고, 자신은 맨몸으로 웅크리고 있는 내 상냥한 친구의 어깨를.
「편하게 자.」
부드럽게 부르자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손길에 막 일어난 척 그는 몸을 뒤척였지만 그가 잠들지 못했음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고통을 잊게해주는 약을 온 혈관에 스미게 한 후부터 그는 깊게 잠들어 본 적이 없었다. 또다시 찾아올 고통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지나치게 긴장한 신경, 또 그를 좀먹은 어둠. 모든 것들이 그의 평안을 방해했으며, 방해했고, 방해할 것이었다. ..가엾게도. 손끝으로 그의 뺨을 더듬어내려갔다. 흉측한 마스크 너머로도 여전히 선량한 눈을 하고 그는 조심스럽게 손 위에 손을 겹쳤다.
<..탈리아.>
「나의 친구.」
그의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답하듯 그렇게 말하고, 그의 어깨 아래로 파고들어 한 이불을 나누어주었다. 그는 불편한 듯 몸을 뒤척였지만 내 손에 저항하지는 않았다. 한덩이가 될 듯이 몸을 붙이고 앉아 기어이 평온한 숨을 내쉬는 그의 팔 안에서 스미는 평화에 미소지었다. 그 온화함에 떠밀리듯 몸 안에 품은 독을 천천히 쉬어냈다.
「준비는 됐어, 베인.」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친밀하고 조용하게 어깨를 두드려주었을 뿐이다.
함께 있을 때 베인은 대체적으로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 자신이 그의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스크너머로 울리는 우울하고 낮은 목소리는 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짐승의 것에 가까웠다고, 내 아버지는 불쾌한 듯 그렇게 말했었고, 그는 대꾸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잠들 때까지 귓가를 떠다니던 부드러운 노래소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었으나 종국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아버지를 설득시키지 못할 나의 말이 그를 상처입힐 것을 알았기에.
-고통이, 그를 망쳐놓았다.
「나는 우리의 어둠 속을 기억해.」
입술 사이로 노래하듯 흘러나온 말은, 초라한 달빛으로 채워진 이 곳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불쌍한 괴물, 내 다정한 보호자가 괴로운 듯 눈을 감는 것을 보았다.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그 뿐이었다.
그를, 그리고 나를 키웠던 구덩이의 감옥에 대해서 생각한다. 갈 곳 잃은 욕망과 분노와 공포가 어지럽게 뒤섞여 서글픈 절망을 낳았던 나의 요람, 나의 도시. 그 곳에서는 생명조차 죄인의 낙인 속에서 자신이 맞이하게 될 죽음을 응시하며 태어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불행히도 우리는 평온할 수도 있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빛, 그 처절하게 눈부신 좌절이 없었다면.
창살 너머로 메아리치는 비명과 죽음을 마주하며 자라왔던 내 유년시절. 그 구덩이 속을 헤메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불행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불행이 될 수도 있었다. 너무나 익숙하게 스며들어 그 것이 절망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게 될 그런 암흑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차가운 돌 바닥 위로 스미는 햇살처럼, 내 곁을 끊임없이 부유하던 기억은, 너무나도 찬란했다.
말해두어야 한다. 속세의 사람들은 그 곳을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이라 말했다. 그러나 알아야한다. 그 곳은 세간에서 논해지는 것처럼 완전한 어둠 속에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 곳은 머리 위로 태양빛이 부서지는 모래처럼 스며드는 곳이었으되, 그저 그 온기가 닿지 않는 깊은 수렁 속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였다면 차라리 어둠은 보이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차가운 햇살은 그 모든 것을 우울하고도 선연하게 드러내었다. 서로의 죄깊은 눈동자를 응시해야하는 동안, 축축한 돌바닥과 갈라진 손바닥과 쿰쿰하게 떠도는 절망의 빛깔이 드러나는 동안 우리가 품은 암흑은 빛 아래에서 더 깊어져갔다.
치미는 기억 속에 입술 끝에 경련이 일었다. 가늘게 떠는 몸을 알고 친구는 위로하듯 등 위를 쓸어주었다. 그 품 안으로 파고들다시피하며 모래처럼 부서지는 과거의 기억들을 주워올렸다. 어둡고 우울한 기억 속에서 유리파편처럼 빛나는 여인의 모습도 있었다. 사랑하는 내 어머니. 황금과 융단 깊은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보석과 빛으로 뒤덮인 채 살아왔었던 나의 어머니. 인생에서 단 한번 품었던 열정을 대가로 자신을 지옥 속으로 떨어트린 여인은 불행할만큼 고결했다. 자신의 인생 전부를 부수어 지옥 속으로 밀어넣은 후에도 누군가를 원망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과거의 추억과 성마른 현실 사이에서 천천히 부유하듯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나를 안아주었던 것은 여인의 팔. 그러나 나를 키워주었던 것은, 보호자의 손.
흉터로 뒤덮인 그의 심장 위에 손을 겹쳤다. 나를 지켜주고 키워주었던 친구는 성마른 울음소리를 목 안쪽으로 접어넣었다. 낮게 울리는 진동같은 그 목소리의 그를 보며 괴롭게 웃어주었다. 입을 틀어막는 기계와 금속 너머에서, 얼굴을 파먹히다시피한 흉측한 상처 너머에서, 변함없이 다정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 또한 어둠 속에서 나고 자랐으되 빛을 동경하며 자란 사람이었다. 구덩이 속에 스미던 어둠 속에서 그는 죽음과 삶을 제 친구인 것처럼 양 어깨에 얹고 살았다. 아직 소년이어서 절망과 고통을 모르던 그 시절에, 그는 갓 태어난 나를 내 어머니의 손에서 건네받아 안아보았다고 했다. 서툰 손길로 안아본 어린아이와 한번 본 적도 없던 분위기를 품은 여인을 동경하여 그는 자신이 품고 있던 모든 애정을 어린아이에게 나누어주려 애썼다. 어리고 조그만 여자아이에게 베풀어준 은혜는, 이미 넘치도록 베풀 줄 아는 누군가의 선의라기보다는 생경한 것을 부드럽게 다루려 애쓰는 괴물의 서툰 노력에 가까웠으리라.
「당신이 나를 그 곳에서 구해줬어. ..그건 고귀한 일은 아니었을 거야, 그렇지.」
<탈리아.>
「당신이 어설픈 선의나 도덕으로 나를 구한 게 아니었어서 기뻐.」
속삭이듯 스미는 말은 진심이었다. 구덩이의 바깥으로 나를 밀어올려주던 손은, 이별을 고하던 목소리는 도덕과 선을 아는 사람들의 것은 아니었다. 짐승의 발버둥, 혹은 제 보물을 지키려는 이기심처럼 추하고 격정어린, 그리고도 처절한 생존의 몸짓이었다. 우리가 살았던 어둠 속에서 익숙한 방식으로, 익숙한 삶으로 그는 나를 구했다. 겹쳐지는 손끝에, 닿은 어깨 끝에 조그만 온기가 배었다.
「나는 우리가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는 걸 알아, 베인. 그러니까.」
차가운 금속으로 뒤덮인 나의 수호자. 그 때와 변함없는 그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었다. 한결같고 부드러웠으며 지독히도 메마르고 고갈되어 병들어있었던 나의 다정한 보호자. 부드러운 돌처럼 무너져내렸던 가여운 나의 사랑. 손끝으로 쓰다듬는 입술의 감촉은 이미 기억 속에 풍화되어버리고 남은 것은 금속의 우울한 감촉뿐인.
「그에게도, 우리의 어둠을 되돌려주자, 베인.」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서.
어둠 속에서 몇번이고 기어오르는 단 한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발밑에 뚫린 공동을 피하여 자신의 삶도 행복도 지옥 속으로 밀어넣은 채 그 가장자리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자였다. 내 아버지의 핏값과 제 양친의 핏값을 양손에 쥐고 지옥을 선의로 구하겠노라고 공언하고 있는 자였다. 거대한 착오와 고뇌속에서, 어둠 속에 스며들면서도 먹히지는 않겠다고 어리석은 외침을 반복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진짜 인간의 추악함을. 삶의 비정함을. 광기를.」
노래하듯 단어를 하나하나 주워올렸다. 살아왔던 삶에서 녹아내린 깊은 독과 증오가 묻어있은 그 말들을.
어둠이 사라질리 없다. 지옥 속에서 선의와 도덕을 구현할 수 있을리 없다. 지상 위에 펼쳐진 타락 속에는 반드시 어둠이 스민다. 그 위로 빛을 부어넣어본들, 그림자는 깊어지고 또 깊어질 텐데. 타락은 불어나고 또 불어날텐데. 이름뿐인 정의에 기대어 평온한 암흑 속에 목마른 빛의 갈망을 부어넣는 남자. 그 죄많은 손에 움켜쥔 핏값을 치루게 할 이유는 그 것으로 충분했다.
<..네 아버지의 유지를 잇겠어.>
다정한 괴물의 목소리는 추악하리만치 우울하게 방안을 채웠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주겠노라고. 남자의 세상에, 그가 모르는 진짜 어둠을 풀어놓아주겠노라고. 우리들의 고향처럼 어둠이 범람하는 그 곳을 남김없이 재로 만들어주겠노라고. 벅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듯 그 품에 고개를 묻었다. 피와 죄악으로 물들었으며 고통으로 범람하는, 그럼에도 여전히 다정한 내 수호자의 품 안으로.
「함께 가.」
애정도 사랑도 아닌, 고요한 선고였다. 그는 말없이 팔을 둘러 어린 시절의 그 때처럼 나를 보호했다. 이 손길에 둘러싸인 채 돌아가는 어둠 속은, 지상 위에 펼쳐질 우리들의 고향은, 빛 한점 스미지 않을 어둠과 절망 속으로 매몰되어 죽음 속으로 가라앉겠지.
그 것은 손가락 사이에서 사락거리며 부서져내리는 모래처럼.
부드러운 어둠 속의 평온이었다.
fin.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보고서 베인x탈리아를 외친 건 나밖에 없겠지...!!
원작팬들이보면 이중삼중사중으로 쳐맞을 것같은 SS이긴 한데 너무 몰입이 되더이다. 제가 탈리아/베인이었다면 브루스를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했을 것같아요. 진짜 지옥 속에서 살아봤고 살아왔던 사람이라면 같은 지옥(고담시티와 양친살해)를 겪고도 빛을 끌어들이려는 남자를 어떻게든 끌어와 지옥 속으로 밀어넣었을 것같습니다. 머리 위의 빛이 잔혹하다는 걸 아는 삶이었으니까 더더욱. 어설프게 어둠을 흔들지말고 그 안에 녹아버려. 이런 느낌. 이 두사람은 결국 그 잔혹한 과거와 자기 핏줄의 죽음에서 시작되는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라, 벗어나려고 하고/경계를 넘지 않는 브루스를 보면 똑같은 꼴로 만들어주고 싶다는 집착에 시달렸을 것같음. 조커도 그렇고.. 참.. 배트맨을 죽이고 싶다(X) 배트맨의 신념을 부수고 싶다(O)라니, ..배트맨에 나오는 악역들은 배트맨 사랑하는 거 맞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