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소리가 울려서 문을 열자 헤실헤실 웃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깔끔하게 차려입혀 내보낸 양복에는 온통 술냄새가 배어있었다. 덤으로 차려놓은 식사는 이미 다 식어버린 후였고, 시계는 새벽 세시였다. 엉망으로 취해 들어온 동거인에게 화낼 맘도 들지 않아 그녀는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남자를 응시했다.
"변명? 사죄? 어느 쪽?"
"..다녀와씁니다-"
"내가 당신 어머니였으면 지금 당장 외출금지선언을 내렸을 거야."
팔짱을 끼고 던진 말에 남자는 해맑게 웃으며 90도로 고개를 꺾었다. 술에 취하면 혀가 짧아지는 버릇은 대학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숙인 그대로 휘청하고 쓰러질 뻔한 남자의 어깨를 붙들며 볼멘소리로 중얼거리자, 술냄새와 담배냄새에 절어있는 남자는 쿡쿡 목으로 웃었다.
"세실이 우리 엄마가 되려면 백 번은 다시 태어나야할 걸."
"뭐야, 지금 마음 넓게 용서해주는 사람에게 시비거는 거야?"
"하지만 정말이야, 어머닌 엄청 좋은 여자였으니까."
"만난지 5주년 되는 기념일날 새벽 세시에 기어들어온 남자를 챙겨줄 정도면 충분히 좋은 여자입니다, 라일 디란디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재대로 서지도 못하는 그를 지탱해주며 따박따박 찌르자 제발로 몸을 일으키려고 그나마 애쓰고 있던 라일은 갑자기 그대로 체중을 실어왔다. 하마터면 넘어질뻔하는 찰나에, 그는 아이처럼 팔을 둘렀다. 꽉 끌어안는 그에게 몸을 바싹 붙인 채로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소리쳤다.
"..뭐하는..!"
"-꽃이 있었어."
웃고 있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있었다. 풀죽은 듯 중얼거리는 그 말을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뭐?"
"..꽃이 있었어, 거기에. 그 것도 두 개."
"라일, 아파..!"
"..그 사람이 아니야. 절대 아니야."
"라일!"
야단맞는 아이가 제 몸을 웅크리듯이 그는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합리화하려는 듯한 한마디 한마디마다 끌어안은 힘이 더 세졌다. 조여들어오는 팔에 저항해봤지만 그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듯이 필사적인 어투로 반복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가 아니야. 그 사람이 아니야. 형이 아니야.
"..이거 놔!!"
너무 세게 끌어안은 팔을 풀어내려고 발버둥치던 세실은 온힘을 다해 라일을 밀쳐냈다. 좀처럼 떨어질 것같지 않았던 남자는 세게 밀어내는 순간에 어이없이 밀려 넘어졌다. 자국이 남은 어깨를 쓸며 세실은 두어걸음 물러섰다. 쿠당탕하는 볼썽사나운 소리와 함께 현관에 나동그라진 라일은 잠시 줄이 끊어져나간 인형처럼 멍하니 앉아있었다. 거센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향해 라일이 고개를 들었다.
"..누구라고 생각해?"
처연한 목소리였다. 올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짙게 가라앉아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같은 어린애같은 얼굴이었다. 그 상처입은 얼굴에 세실은 팔의 아픔도 잊어버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그녀는 감정을 억눌렀다.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되..는 거잖아."
"하지만 두 개였어, 세실."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현관에 주저앉은 채 라일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작년에는 하나도 없었는데."
현관의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멍한 목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실은 잘 알고 있었다. 애시당초 그가 어딜 다녀왔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도 그 곳이었다. KPSA의 자살폭탄테러였어요. 묘비를 앞에두고 그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웃었었다. 애도하는 듯한 연보라빛의 꽃다발 옆에 그 것과 꼭 닮은 꽃다발을 내려놓으며 그는 처연한 얼굴로 묘비를 쓰다듬었다. 그런 그가 너무도 안되보여서 연락처를 주고 받았었다. 예상과 달리 그는 금방 연락을 취해왔다. 그리고 그는 조급한 사람처럼 관계를 진행시켜나갔다. 곁에 있어줘, 세실. 그 말을 들은 것은 만난지 2주가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함께 살기 시작하고서 그는 어려운 것을 말하는 아이처럼 서툴게 살아있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무덤 앞에 놓이는 두 개의 꽃다발과 매년 보내오는 통장의 금액. 그 것만이 형제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같은 얼굴로 웃었다.
"..이제는.. 내가.. 내가 있잖아?"
비참해지는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그녀는 고개를 모로 돌렸다. 라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실 스스로도 자신이 한 말을 믿지는 않았다. 라일은 그 것에 의지하고 있었다. 동거인보다도, 연인보다도 훨씬 더. 만난지 한달도 되지 않아 동거를 원할 만큼 사람에 굶주려있고 외로워했었으면서도 자신은 그에게 있어 그 꽃다발보다, 통장에 쌓이는 금액보다, 곁에 없는 형제보다 중요한 존재가 된 적이 없었다. 작년 이 날에 함께 그 장소를 찾아갔을 때에 언제나 놓여있었던 꽃다발은 없었다. 텅 비어있는 대리석 단 위에 자신이 들고온 꽃을 내려놓으며 라일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파랗게 질린 그를 부축해서 집에 돌아오고난 후 라일은 곧 집을 나갔다. 일주일가량이 지나 그가 간신히 돌아왔을 때는 화낼 기력도 없어져있었다. 지친 얼굴로 소파에 주저앉은 그는 쓴 웃음을 띄우고 입을 열었다. 사실은 작년부터 그가 송금해오던 금액이 끊겨있었다고, 그렇게만 말했다.
폭탄테러와 사라진 쌍둥이. 평범한 방법으로 열 몇살 된 어린애가 쌍둥이 동생에게 학비를 대줄 수 있을리가 없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라일이 이렇게 초조하고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았다. 틀림없이 그의 형제는 안 좋은 일을 하고 있었겠지. 그리고 그가 남겨오던 자취가 사라졌다. 그 것을 실감할 수록 그는 불안해했다. 그런 형따위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아이처럼 울면서 매달려오기도 했다. 그런 그가 안쓰러워서, 가여워서, 사랑스러워서 곁에 있었다. 곁에 있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있는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팔을 뻗어 그를 안아주었다. 라일은 순순히 몸을 맡겨왔다. 턱밑에 닿는 갈색 고수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그에게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라일. 아무 일도 없어. 넌 지금 혼자가 아니야.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뛰고 있던 그의 심장이 가라앉아가는 것이 붙잡은 몸을 통해 전해왔다. 문득 이렇게 그를 안고 있는 것이 참을 수 없을만큼 괴로워졌다. 라일. 라일. 나는 당신을 돕고 싶어. 돕고 싶지만.
나는, 나는 돌아보지 않는 남자를 언제까지나 사랑해줄 수 있을 만큼 좋은 여자가 아니야.
머리 속으로 치밀어오르는 말들을 억누르며 세실은 울음이 올라오려는 것을 참았다. 그녀를 위로하듯이, 아니 그녀에게 기대듯이 그는 느릿하게 팔을 들어 세실의 허리를 안았다. 방금 전과는 다르게 힘이 하나도 없는 몸짓이었다. 세실은 몸을 기대오는 그를 끌어안고, 싸늘한 현관에 앉아서 반복해서 그에게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괜찮아. 아무 것도 아닐 거야. 괜찮을 거야. 나는 여기에 있어. 당신은 누구도 잃어버리지 않아. 당신은 여기있어. 여기있어.
끌어안은 그의 체온은 차가웠고, 삼키는 눈물은 쓴 맛이 났고, 반복하는 거짓말은 달콤했다.
fin.
06. 偽り (거짓) / 雨ふらし
어젯밤에 쓰다 치웠는데(22일 오전 5시 25분) 그냥 이어 썼습니다. 도피는 답이 되지 않습니다. 묵은 상처자리에 얽매여도 그 상처를 외면해도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뚝뚝뚝 떨어지는 건 똑같아요.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