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살 위의 오라버니는 치킨 먹을 때 닭다리를 양보할 수 있는 인격자다. 먹을 욕심만은 태산보다 높고 마리아나 해구만큼 깊은 나로서는 따라잡을 수 없는 경지다. 오빠는 닭다리 안 좋아하냐고 물어봤을 때 오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싫어하는 건 아닌데 그렇게 좋아하진 않으니까 더 좋아하는 사람이 먹는 편이 낫잖아." 옳거니.
무진장 새삼스럽지만 세상 사람들 마인드가 다 오빠만 같으면 쌈날 일 없겠다 싶었다. 아부지도 남하고 싸우느니 양보하는 게 이기는 거라고 생각하는 분이고. 나는 오빠나 아빠같이 생각하려면 아직 한참 먼 것같지만. 노력하자, 노력. 새삼스럽게 이 생각을 하는 건 역시나 정치판 때문. 안철수씨가 대통령판에 나갈까말까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 한 거라고는 양보밖에 없는데 참 순식간에 치고 올라왔고, 이 분은 아마 정치적 속내나 계산같은 것도 없었던 거 아닌가 싶어져서.
2. 정치 이야기를 잘 하지 않게 된 건 내가 제대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는지 확신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나는 음.. 뭐 촛불소녀같이 제 1지망으로 나간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애써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참, 보면 볼 수록 이판도 저판도 내 취미가 아니었단 말이지. 촛불집회에 나갔을 때 나는 대통령에게 물러나라고 외칠 생각이 없었다. 그냥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게 답답했던 것이다. 등록금(지금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수험, 사립계 특수고 300개, 4대강, 고교생이던 내가 열심히 조사하고 생각했을 때는 절대 옳지 않은 것같던 일들이 있었고 거기에 대해 내 의견을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갔더니? 거기는 좀더 원색적이고, 급진적이고 거친 목소리들이 있었고 내 소리는 거기에 휩쓸려갔다. 지금도 거기 나갔던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거기 나간 건 그 하나의 표식같은 거였으니까. ..하지만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지나치게 치우친 사람들의 시선은 결국 반대쪽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에 관심끄고 살기에 나는 지나치게 한국인이니, 지금도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냥 말을 아끼게 된 것일뿐. 내가 원하는 건 당파싸움이 아닌데, 정치판은 참 뭐하는 짓인지.. 최악이냐 차악이냐를 두고 고민하는 게 답답하다 싶다. 이것도 어린애같은 소리일려나. 나꼼수를 안들으려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데 음.. 응. 뭘 믿고, 뭘 생각하고, 뭘 지지할지 내 자신이 좀 더 성숙하게 들을 수 있을 때가 아니면 휩쓸려가기 쉬울 테니까.
3. 무슨 이야기 쓰려다 여기까지 왔지.. 오늘 메지로쨩이 하루마키 해주고, 용언니가 순대 해주시고, 나는 미역국 만들어서 메구랑 시쨩이랑 놀러와서 맛나게 먹었다. 배부름 배부름. 하루마키는 먹고 있으면 뭔가 뱃속이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오이 사실은 잘 못먹는데 소스때문인지 아삭하고 시원하고 맛있었다. 재료는 삶은 새우, 오이, 돼지고기, 시금치..? 상추? 라이스페이퍼에 싸서 돔양꿈+레몬+고춧가루 소스로 슥슥슥. 메지로 고마워용.
4. 월요일 꼬박 해리포터를 읽었다. 혼혈왕자+죽음의 성물. 각잡고 읽어본 게 오랜만인지 처음인지.. 다섯시간+네시간 정도 걸렸다. 장대한 순정삽질남 스네이프에게 눈팔려서 몰랐는데 죽음의 성물은 생각보다 빈 구멍이 많았다. 복선은 기가막히게 깔았는데 해리의 '직감'에 의지하는 장면 너무 많지 않은감.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가벼웠던 1,2부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구멍이었는데. 내가 큰 걸까 조앤롤링이 자기 작품에 너무 빠졌던 걸까. 그렇다고 비판하거나 지적하기에는 나도 이 이야기와 함께 성장해온 케이스라 빈부분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부족분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컸다. 죽음의 성물이 몇권 완결이었더라.. 이야기 전부를 해리와 론과 헤르미온느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진행한거나 다름없었는데 다른 애들한테도 조금만 더 지면을 할애해주지. 애초에 애들 후일담도 너무 짧았지만orz
5. 시리우스에 대한 부정이 두번이나 나왔다고 지적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헤르미온느+덤블도어가 각각 지적한 집요정에 대한 지나친 차별과 학대가 그것. 아 집요정이라기보다는 크리처지만.. 머리가 조금 크고 읽어서 그런가 단편적으로 보이던 이야기가 더 입체적으로 보이게 된 건 좋은데 그 시선으로 본 해리 포터 + 시리우스 + 스네이프가 한꺼번에 조금씩 짜증나는.. 면이 있어서 울컥했다. "말포이같은 녀석이 아니면 이런 짓까지 당할 필요는 없다"라든가. 이거 "난 차별과 흑인이 싫어"랑 뭐가 다릉건가요.. 아니 딱히 싫다기보다는.. 애들이라고 확실히 다 잘난 게 아니구나 싶어지는 그런 기분. 내가 5권 이후의 해리포터를 좋아하지 않았던 건 3권에서 제임스와 릴리의 진실된 친구이자 해리의 보호자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같았던 시리우스가 한꺼번에 부정됐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3권에서의 시리우스는 해리에게 같이 살자고 말하고 기뻐하는 대부였는데 5권에서는 해리한테도 혼나고 스네이프한테도 비웃음당한 끝에 막나가서 거의 자폭에 가깝게 죽는.. 그런 사람으로 나왔단 말이지. 해리한테 대놓고 "제임스라면 재미있어 했을텐데"라고 하지 않나. (이 아버지 제임스에 대한 인식 변화도 거의 롤러코스터급이다) 근데 뭐.. 보고 읽고 롤링이 말한 "시리우스는 아즈카반에서 정신연령이 멈추었어요"라는 말도 접하고 하다보면 아 결국 그 부족한 부분을 다 더해서 시리우스인거구나.. 하고 맥빠진 인정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그런 기분이었다.
6. 스네이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릴리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은 예쁘긴 하지만 그렇다고 얘가 릴리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않았던 걸 부인할 수는 없단 딜레마가 심해서리. 까놓고 말해 릴리가 이해해주거나 스네이프를 택하거나 혹은 좀 더 못된 여자거나 했으면 스네이프는 덤블도어랑 영원히 손 안 잡았겠지. 무슨 유태인 여자는 사랑하는데 유태인은 다 죽여버리겠다는 나치즘 사상도 아니고. 너 하나만 예외라는 건 있을 수 없는 건데. ...근데 그렇다고 이기주의자라고 치부하기는 그 여자에게 결국 인생을 건 것도 사실이라. "그녀의 가족 전부를 보호해주세요." 죵니 이기적인데 거기서 양보했다는게 또 용서할 수 있는 부분이라.... 심난심난. 확실한건 스네이프는 릴리를 빼면 나쁜놈인 건 맞는데, 릴리를 스네이프에게서 뺀다는 건 불가능했다는 거다. '제임스의 아들'인 해리가 스네이프를 인정해준 건 그 애정과 헌신에 대한 나름의 인정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스네이프가 살아있었을 때 화해는 못했을 것같았음. 릴리의 아들이긴 한데 제임스의 아들이기도 하잖슴. 초록눈만 아니었어봐라. .... 어라이거 어째 폭풍의 언덕이다? 히스클리프랑 헤어턴에 캐시를 끼얹으면 딱이네요. 여튼 그런.. 입체적이고 불완전한 성품들이 확확 드러나는게 어린 시절 읽던 캐릭터 군상의 흠처럼도 보이면서 그게 더 사실적이다 싶기도 하고 애매한 기분. 롤링이 좋은 작가인지는 여전히 모ㅡ겠지만 좋은 스토리텔러인 건 맞는 것같다. 직관으로 다 때우는 전개는 그렇다쳐도 만든 세계가 엄청난 걸. 그래서 한국의 해리포터 테마파크는 언제 개장하나여. 관련 뉴스 다 지워졌던데 설마 도루묵인가..ㅠ
7. 전혀 상관없는데 쓰다보니 운명의 딸..아니고 뭐였지 여자의 집이었나 웃는 여자였나. 샤워하는 동안 멍하니 그게 뮤지컬로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아름다움을 타고나서 타락의 길을 걷다가 마지막에는 선을 택하는. 그와 동시에 한 1900년대에 만들어졌어야 쇼킹한 무대가 되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아마 푸치니 오페라 쵸쵸 부인(마담 버터플라이), 투란도트, 토스카 줄거리 리뷰를(오페라 아니다 그냥 리뷰가)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게 원인이 되었던 것같다. 지금 세대에서 보면 진부하겠구나 싶으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전개. 투란도트를 끝까지 집필했으면 비극이 되었구나 싶기도 했다. 아니 자기를 사랑하던 여종이 칼리프 비밀 지켜주겠다고 맞아죽었는데 사랑의 힘으로 투란도트의 얼음같은 마음이 녹아내린다는 게 말이 되냐?
8. 으음 쓰다보니 또 폭주했구나 싶어서 싱숭생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