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좋은 어느 여름날 오후의 일이었다. 샤이어의 모든 풀밭이 선명한 녹색으로 빛나는 계절이었다- 벌레의 울음소리부터 숲 속 어린 나무의 가지 사이를 스치는 바람소리까지 모든 것이 생명력으로 가득 차 빛나고 있었다. 호비튼 또한 활기로 가득찼다. -활기 넘치지 않은 때가 있기나 할지 모르는 것이 호빗들이긴 했지만- 여름은 여름이었다.
호비튼의 모든 어른 호빗들은 쨍쨍한 여름 태양빛과 그 아래에서 익어갈 보리 이삭들, 그리고 그 보리 이삭으로 만들게 될 맥주의 황금빛 거품에 이르기까지 술집에 모여앉아 환담을 나누곤 했다. 여자 호빗들 옆에 붙어앉은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아직 입에 댈 수 없는 그 액체의 맛을, 달콤하고 부드러운 어떤 맛을 상상하며 시럽을 굳혀서 만든 당밀과자를 빨아먹었다.
메리와 피핀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그 어느 쪽에도 들지 않는 호빗이었다. 그들은 잠자리를 잡으러 다닐만큼 어리진 않았지만 동시에 서리를 그만둘 만큼 어른인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나이쯤 되면 당당하게 펍에서의 한 잔을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또래의 호빗이 한 잔을 즐기기 위해서는 펍에 모여있는 수많은 어른 호빗들의 농담과 조언을 감내해야했다.
피핀은 첫음주에 대한 소문과 농담, 술자리에 대한 격언이 어지럽게 뒤섞이는 가운데서 즐기는 즐기는 맥주 한잔보다는 강가에서의 낚시-그리고 운 좋다면 구운 물고기까지-를 주저없이 선택했다. 메리로 말할 것같으면, 그가 고른 것은 전적으로 맥주냐 물고기냐가 아니라 피핀의 말을 들어주느냐, 그렇지 않느냐라는 선택지였다. 메리는 고민했지만 결국 익숙한 선택을 했다.
"이 것 봐, 메리, 내가 지금 막 잉어를 잡은 것 같아!"
"피핀, 그건 너무 작아. 그리고 흙내도 날 걸."
백번쯤은 반복된 것같은 들뜬 피핀의 목소리를 들으며 메리는 백번쯤 반복한 대답을 끈기 있게 들려주었다. 대체 뭘 보고 먹을 게 있다고 생각한 걸까? 그 물고기의 크기는 호빗의 손으로도 손가락 마디가 하나 될까 말까 했다. 하기사 피핀이 온통 물을 헤집어놓은 바람에 어지간한 크기의 물고기들은 다 도망간 후였을테니 저 것이라도 잡은 게 기적이기는 했다. 피핀의 기대로 부풀어올랐던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맥이 빠진 듯 시내 돌쩌귀 사이로 붙잡았던 물고기를 놓아주었다. 피핀은 물놀이에도 지쳤는지 텀벙텀벙 물을 헤치며 강변으로 올라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청룡정에 갈 걸 그랬어. 어쨌든 먹을 게 있잖아."
"거기 가면 툭네 집안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고 싫다며?"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그리고 어쩌면 삼촌도 바쁠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이모도. 아 숙모도. 그리고 숙부랑, 당숙부랑, 당고모랑, 당고모부랑..."
"알았어, 알았어."
손을 꼽으며 늘어놓기 시작한 피핀을 한 손으로 제지하고-결코 그 혈기왕성하고 생기발랄한 툭 집안의 수많은 친척들 중 하나라도(혹은 전부가) 반드시 그 펍에 있지 않겠냐는 생각은 안드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메리는 피핀이 무겁다고 투덜거리다가 강변에 도착하자마자 나무 아래에 던져놓은 짐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갸웃한 피핀이 텀벙거리며 강변에서 나왔다.
"그게 뭐야, 메리?"
"이럴까봐 먹을 걸 좀 싸왔어. 빵하고, 와인하고, 그리고-"
"! 메리! 굉장해!!!"
"우왁!"
탄성을 터트린 피핀이 곧장 등 뒤에서 메리에게 돌진했다. 가방을 뒤적이느라 몸을 숙이고 있었던 메리는 등 뒤에서 덮쳐누르는 피핀의 체중을 이기지못하고 그대로 가방 위로 나동그라졌다.
"피핀! 먹을 게 다 엉망이 되잖아!"
"그래서?! 두 번째 아침을 챙겨온 거야? 점심도? 간식도? 저녁하고 야식도?!"
"여기에서 살 생각이야?!"
"살 만큼 가져왔어?!"
"피-핀!"
함께 구른 피핀도 몸이 성할 리 없건만, 메리가 찌푸리든 말든 피핀의 목소리는 행복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강물에 폭 젖어있던 탓에, 피핀이 기쁨에 차서 손을 휘두를 때마다 물이 뚝뚝뚝 떨어졌다.
"피핀, 옷 안 벗어놔도 돼?"
"태양빛이 이렇게 좋은데 뭐! 먹는 사이에 마를걸?"
피핀은 명랑하게 대답했다. 곱슬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강가의 돌들 사이로 까맣게 젖은 얼룩을 남겼다. 그러고보면 여름의 더위로 찌는 듯했던 메리의 몸에도 팔이며 다리에 피핀이 엉겨붙은 부분이 축축하고 서늘하게 남아있었다. 메리는 저도 모르게 살짝 얼굴을 붉혔다.
"메리! 얼른 먹자! 나 두 번째 아침도 아직 안먹었단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그런 메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피핀은 발랄하게 졸랐다. 메리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짜부라든 가방 속에서 찌그러진 빵과, (다행히 깨지지 않은) 와인과, 강가의 밭에서 살짝 실례해온 양배추와 당근을 꺼내놓았다. 아침에 어머니가 싸주셨던 당밀과자와 비스킷까지도. 피핀의 얼굴이 꽃이라도 되는 것처럼 활짝 펴졌다.
"메리이! 당장 결혼해줘!!"
"50세가 넘은 후에 다시 오시지? 먹기나 해."
"응! 응!"
피핀은 어린애처럼-실제로 어린애라고 메리는 생각했다- 웃으며 차려놓은 음식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금방이라도 집어먹을 기세였고 메리도 말릴 생각이 없었지만 강의 흙이며 풀이 메리의 손과 얼굴에 얼룩덜룩 묻어있었다. 잠깐 기다려, 그렇게 말하고 메리는 강의 물에다 가방에서 꺼낸 손수건을 담가서 꼭 짜냈다. 피핀이 눈을 데록데록 굴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메리는 손수건을 한손에 들고 피핀의 손을 닦아주었다. 식사가 코 앞인 것이 기뻤는지 피핀은 얌전했다. 뺨의 뻘을 흝어내며 피핀이 기분 좋은 듯 가늘게 웃었다. 메리는 그게 꼭 새끼고양이의 울음소리같다고 생각하다가 도리질쳤다.
들뜬 피핀이 음식을 먹어치우는 모습은 식사를 하고 있다기보다는 장난에 흠뻑빠진 것같았다. 입안에 음식을 가득 밀어넣고 활짝 웃는 바람에 부스러기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물에 젖은데다 빵 부스러기며 사탕과자 조각이 얼굴 언저리에 잔뜩 붙어있는 모습은 장관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피핀은 웃음을 터트리며 메리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이거 진짜 달아, 메리! 맛있어!!"
"당밀로 만들었으니까 그렇지. 어머니가 만들 때 너도 옆에 있었잖아?"
그 때는 애들이나 먹는 거라고 했으면서-라는 말이 목끝까지 올라오려는 것을 꾹꾹 누르고 메리는 잠자코 빵을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랬던가? 밝은 목소리로 한귀에 흘린 피핀은 다시 당밀과자를 우적우적 입안으로 밀어넣기 시작했다.
"잠깐, 피핀, 많이 있으니까 그렇게 서두르지-"
"우엣취!!!!"
만류하려던 메리의 목소리를 타이밍좋게 울려퍼진 피핀의 재채기 소리가 가로막았다. ..숨을 들이쉬었던 메리가 힘겼게 눈을 떴다. 눈을 동그랗게 뜬 피핀이 메리를 응시했다. 피핀의 앞에 서 있던 메리의 얼굴에는 잘게 부서진 당밀과자 조각들이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처럼 우르르 붙어있었다. 피핀의 얼굴이 웃음을 참느라 잠깐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곧 성대한 웃음소리와 함께 배를 붙잡고 구르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아하하하하!! 하하하핫!! 메,메리, 얼굴, 얼굴에- 아하하하하!!!"
"...그렇게 웃기냐, 피핀..?"
"그,그게, 사탕조각이, 얼굴에, 얼굴에- 푸하하하하!!"
피핀은 거의 바닥을 구르며 웃어대기 시작했고, 철저한 피해자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웃음거리가 된 메리는 부동자세로 굳어있었다. 저지른 게 누구인데 웃고 있는 거야- 스스로는 나름대로 어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봤자 피핀과 크게 다르지도 않은 나이인 메리의 가슴 속에도 울분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이대로 버리고 가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간신히 웃음을 멈춘 피핀이 (여전히 웃다못해 눈물이 눈꼬리에 달려있는 채로) 메리에게 다가왔다.
"미안해, 메리- 너무 웃겨서!"
"됐어, 닦을 거니까 수건이나 줘."
"어? 아깝게 왜?!"
아깝긴 뭐가 아깝다는 거야? 메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에, 피핀의 얼굴이 시야 한가득 밀려왔다. 어라, 메리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피핀은 망설임하나없이 직격해, 아직도 메리의 뺨에 달라붙어있던 사탕과자조각을 혀로 핥아냈다.
불의의 사태에 메리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꽉 굳어버렸고, 피핀은 여전히 신중하고 즐겁고 기민하게 자신의 입술로 메리의 얼굴에 묻은 설탕 조각들을 하나하나 핥아냈다. 뺨, 눈가, 코끝- 그리고 당황해서 벌리고 있는 입술까지도.
피핀은 한발 뒤로 눌러나 충격으로 굳은 메리의 얼굴을 옆에서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씨익 웃었다.
"깨끗해졌지?"
"너..너..너 무슨 짓을 한거야?!"
한 발 늦게 제정신으로 돌아온 메리가 거의 비명처럼 소리질렀다. 아마 강변 구석구석까지 울려퍼졌을 것이다- 귀끝까지 새빨개진 채 발을 동동 구르는 메리를 보고 피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먹을 걸 남기면 죄라고 한 건 메리잖아?"
"그,그거랑 이건 아주 달라!"
메리는 거의 불타는 고구마처럼 된 얼굴로 소리질렀다. 메리가 자주하는 잔소리 중 하나를 훌륭하게 인용한 피핀은 뭐가 문제냐는 양 메리를 응시했다. 평소대로라면 뭐라고 잔소리를 해줘야할 순간이었지만 메리는 어떤 말을 해야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잠시 메리의 반응을 기다리던 피핀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펼쳐놓은 식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명랑하게 말했다.
"그럼 먹던 거 계속 먹는 거지? 나 아직 비스킷 세 개 밖에 못 먹었어."
아마 그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가 메리의 무언가를 끊어놓았던 모양이다.
"...피핀."
"응?“
메리의 목소리를 따라 피핀이 고개를 돌렸다. 메리는 잠자코 그 어깨를 붙잡았다. 피핀은 멍한 얼굴로 메리를 올려다보았다. 메리가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피핀이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고개 숙인 메리의 입술은 피핀의 왼쪽 귀에 닿았다.
좀 더 정확하게, 메리의 혀가 피핀의 뾰족한 귀끝에서부터 부드럽게 움직여, 귓바퀴 아래까지를 꼼꼼하게 흝었다.
"...?!"
메리가 입술을 떼는 것보다 한 발 늦게, 피핀이 귀를 감싸리고 몸서리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충격과 놀라움이 뒤섞여 동그랗게 뜬 눈을 바라보며, 메리는 가까스로 말했다.
"거기도 붙어있었어. 그- 당밀 조각."
좀 더 태연하게 말할 요량이었지만 메리는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피핀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메리는 괜스레 콧잔등을 긁적였다. 한동안 마주 본 채- 하지만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침묵이 흘렀고, 먼저 견디지 못하게 된 쪽은 메리였다.
"그럼, 가서 마저 먹자. 음, 손도 씻고."
어설프게 말한 말에, 피핀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종종걸음으로 돌아서서 펼쳐진 식탁보 너머에 앉았다. 메리도 자기가 먹던 빵을 집어들었다. 피핀은 비스킷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거의 갉아먹듯이 조심스럽게 먹었다. 메리는 빵맛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다르긴 다르구나. 아주."
비스킷을 반쯤 갉아먹던 피핀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메리는 태연한 체 했지만, 귓불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