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곳에 하얀 사자가 있었다. 그녀는 암컷이었고 푸른 눈을 가졌다. 어린 시절 그녀는 한 인간 소녀의 곁에서 자라났다. 어느 지역의 총독의 어린딸은 하얀 이를 가진 맹수를 사랑했고, 그 하얀 사자도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거의 한 살이 되었을 때 사자는 처음으로 바깥으로 나갔다. 담은 낮았고, 그 앞에 서 있는 경비들은 연약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잘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공격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가벼운 몸짓으로 정원의 문을 빠져나갔다. 융단이 깔려있던 궁전이나 초록 풀이 우거진 정원에 비해 그 바깥은 척박하고, 덥고, 메마르고, 모래의 냄새가 났다. 그녀는 처음으로 내딛는 모래의 감촉을 신기하게 생각하며 어슬렁거렸다. 짐을 들고가던 이국의 여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고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렸으나 그녀를 공격하는 사람은 없었다. 총독의 어린 따님이 사랑하는 흰 암사자- 그 것이 그녀를 지켜주는 이름이었다. 

도시의 외곽까지 달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어떤 야생이 전신을 내달리는 것을 느꼈다- 양탄자 위에서는 발톱을 내밀 필요가 없었으나, 모래 위로 파묻히는 발에는 갈고리처럼 힘 준 발톱이 튀어나왔다. 뜨거운 태양이 그녀의 털을 바싹 마르게 했다. 그녀가 멈추어섰을 때 익숙한 사람도 건물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말라서 부서질 것같은 몇 그루의 나무 사이에서, 자신과 비슷한 외관을 가진 동물들이 길게 늘어져있었다. 그녀는 그 것이 동족이라는 것을 몰랐으나 호기심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두 마리는 암사자였고 한마리는 숫사자였다. 그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린 암사자를 보았다. 그녀는 운이 좋았다. 숫사자는 암컷을 공격할 생각이 없었고, 두 마리 암사자에게 그녀는 아직 어려 경계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 너는 어디서 왔지?

암사자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 인간들의 도시. 내 아이의 궁전에서 왔어요. 사자가 가볍게 그르렁거렸다. - 너는 인간들에게서 자랐구나. 야생에서 돌아오지는 못할 거야. 다른 사자가 느긋하게 몸을 바닥에 비볐다. - 하지만 저 아이는 푸른 눈에 흰 털을 갖고 있어. 마성이지. 저 애는 마법을 부릴 수 있을 걸. 목소리는 노래하듯 울렸다. - 마법이요? - 그래. 푸른 눈에 흰 털을 가진 암사자라면 마법의 일부야. 넌 평범한 사자로 남지는 못하겠구나.

그녀는 몸을 돌려 절벽을 기어올랐다. 뒤에는 자신의 동족들이 남아있었으나 그녀는 그들이 자신의 무리가 되어주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숫사자만이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다음 해에, 총독의 어린 공주가 열병으로 죽었다. 암사자는 찢어지는 슬픔에 울부짖었다. 어린 아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으며 숨도 쉬지 않았다. 암사자는 자기가 사랑했던 어린 것의 시체에 기대어 3일 밤낮을 울부짖었으며, 그녀가 통곡하는 동안 인간들은 감히 무서워 다가오지 못했다. 어린 공주를 잃은 왕비와 총독만이 그녀의 곁에서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푸른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고 사자의 품에 안긴 어린 공주의 시신은 썩지도 않았다.

3일의 밤과 낮이 지나고 총독과 왕비가 슬픔에 지쳐 눈을 떴을 때 거기에는 놀라운 광경이 있었다. 어린 공주는 여전히 숨을 쉬지 않고 있었으나, 공주와 똑같이 생긴 어린 소녀가 공주를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총독은 마성의 존재가 어린 공주의 영혼을 해하려 온 것이라 생각해 고함을 지르며 칼을 뽑아들었다. 왕비가 뒤에서 그를 말렸다. 왕비는 천천히 아직도 뚝뚝 눈물을 떨어트리고 있는 어린 소녀에게 다가갔다. 공주는 검은 머리에 초록눈이었으나 눈 앞의 아이는 하얀 백금발에 푸른 눈이었다. 그 점만 제외하면 그 외모는 공주와 완전히 같았다. 왕비는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어린 소녀는 울음을 터트리며 왕비에게 안겼다. 왕비는 그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 이름은 어린 공주가 자신의 하얀 암사자에게 붙여주었던 이름이었다.  

공주가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신묘한 동물이 그 영혼을 바쳐 자신의 목숨과 공주의 목숨을 바꾸었다고. 그리하여 공주는 푸른 눈과 하얀 은발을 갖게 되었다고.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총독과 왕비 뿐이었다. 총독은 어린 딸의 자리를 차지한 기이한 생물을 사랑할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와 같은 외관을 한 소녀가 커가는 것을 보며 그는 술에 취하듯 사랑하는 아이가 살아있다는 환상에 취했다. 공주를 자신의 배로 낳았던 왕비는 총독처럼 쉽사리 자신의 딸과 그 아이를 동일시 하지는 않았다. 여인의 총명한 머리는 자신이 낳은 핏덩이, 혈육의 그 생생한 감각을 환상으로 지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왕비는 여인의 동정심으로 공주의 모습을 한 아이를 사랑했다- 자신의 딸을 사랑하고, 그 분신처럼 살아왔던 동물을. 그녀에게는 하얀 암사자이든, 공주의 모습을 한 소녀이든 이 가여운 아이는 사랑할 대상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이 아이는 새로운 딸이었다. 그렇게 흰 사자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배우게 되었다. 

야생의 생활에 눈뜬 적이 없었다해도, 그 본질은 야수이자 맹수였다. 그러나 이 소녀는 공주만큼이나 아름답게 자랐다. 그녀에 비하면 말 수가 적었고 활발한 것과도 거리가 멀어서 어찌보면 차라리 조용해보였다. 그러나 이따금 이채로운 눈빛으로 달을 올려다보는 모습에는 마성이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깃들여있었고, 그녀는 숨을 죽이고 있는 순간에조차 사람을 섬찟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어떤 말도 그녀를 두려워하여 자신의 등에 태우지 않았으며, 여린 동물들은 감히 다가서지도 못했다. 오로지 예전부터 총독의 어린 공주가 키우던 노란 털가죽의 개만이 그녀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섰다. -그 동물은 공주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가 자신의 오랜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어린 숫사자가 정원에 나타났다. 공주는 그를 안아들었고 그 또한 공주의 친구가 되었다. 총독의 어린 딸은 마물조차 반하게 할 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평이 넓은 대륙에 퍼져나갔다. 

15세가 되던 해, 전 대륙에서는 아름다운 공주를 얻기 위한 구혼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들은 그녀의 처연한 몸짓, 요염한 눈매, 차가운 말투, 서늘한 입술에 한결같이 매료되었다. 왕비는 어린 딸의 정체를 익히 알고 있어 그녀의 구혼자들을 쫓아버릴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으나, 긴 세월 동안 어느새 죽은 어린 공주를 잊고 암사자와 딸을 동일시하게 된 총독은 그런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행이었던 것은 어떤 구혼자도 이 이국의 미인을 손에 넣을만큼 뛰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자 위에 올라타 사냥에 나서는 공주의 비호같은 몸짓 아래에서는 어떤 구혼자의 사냥도 빛을 잃었고, 그녀가 나지막히 낭송하는 저승과 이계, 그리고 마신에 대한 옛 시구들은 어떤 구혼자의 지식으로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소문은 돌고 돌아 황제에게까지 닿았다. 그는 총독에게 공주에 대해 물었고, 그녀에 대해 들었다. 그는 공주를 자신의 첩으로 삼고자 했다. 총독에게는 더 높은 지위를 약속하였으나, 자신의 지역에서 이미 왕이던 총독에게 있어 어린딸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깊이 고민했다. 망설이는 총독을 압박할 요량으로, 황제는 자신의 아들을 총독의 땅으로 보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새로운 첩을 맞이하러 왔던 젊은 황태자는 이 아름다운 공주의 자태에 한 눈에 반하고 말았다. 공주는 대지의 푸른 잎처럼 청초하였고 가장 깊은 우물만큼이나 서늘했다. 그 입술에 닿는 상상만으로도 황태자는 자신을 잃게 될 것같았다. 가장 뜨거운 사랑을 속삭이는 동안 그는 아버지의 밀명을 잊어버렸다. 

황태자가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달라는 간청을 본국으로 보내자, 황제는 크게 분노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쳐 현명한 아내와 충신들의 간청을 통해 마음을 바꾼 그는 그녀를 황태자의 신부로 주려했다. 그러나 젊은 황태자비는 그 땅에서 벗어나는 것을 거부했다- 황제는 다시 분노했다. 그는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처벌할 요량으로 왕궁을 나서서 총독의 땅으로 갔다. 길고 긴 행렬이 이어졌고, 거기서 그는 자신이 첩으로 맞으려했던 아름다운 젊은 신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오랜 분노도 잊은 채 사랑에 빠졌다. 얼음처럼 서늘하고 달처럼 빛나는 그녀는 더운 사막의 여름조차 잊게 만들었다. 황제는 두 사람을 처벌하겠다던 처음의 발언을 취소했다. 그러나 젊은 황태자가 원하는 결혼 허가는 언제까지나 내려지지 않은 채 시간만 지리하게 흘러갔다. 황태자는 자신의 아내가 될 여인을 지키기 위해 뜬 눈으로 밤을 세웠고, 황제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뜬 눈으로 기회를 노렸다. 그 사이에서 달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자신의 사자를 쓰다듬고 개를 어루만지며 이국적인 잠자리 위에서 편안하게 잠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리하게 흘러갔다- 3년째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황제와 황태자때문에 제국에서는 걱정의 서한들이 물처럼 밀려왔다. 두 사람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이 것이 곧 끝날 때가 오리라는 것도 알았다. 차라리 그녀를 둘 다 포기할 수 있다면- 그러나 둘 중 누구도 18세가 된, 이 마성의 여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어느 날 밤, 이성을 잃은 황제가 여인의 침소로 숨어들었고, 마찬가지로 이성을 잃은 황태자는 아버지를 죽였다. 피가 튀었고 여인의 푸른 눈이 선연하게 반짝였다. 공포와 후회에 질려 몸을 떠는 황태자를 부드럽게 채근해 밖으로 내보내고, 여인은 자신의 사자의 갈기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황태자는 문간에서 덜덜 떨며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았고, 언제까지나 메아리치는 사자의 포효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았다.

날이 밝았을 때 전 제국은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제국의 황제가 어린 여인을 취하기 위해 침소로 숨어들다가 그녀의 호위인 사자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는 추문은 궁 밖을 벗어나지 않았고, 황제는 이국의 땅의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급사한 것으로 되었다. 하룻밤 사이 파리하게 늙어버린 황태자는 그녀를 차지했다. 황제 시해범으로 몰린 사자는 죽여야했으나, 궁안이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그 사자는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황태자는 황태자비를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번에 황태자비는 자신의 고향과 이별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은 채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제국에는 젊은 황제가 탄생했고, 그 곁에는 신비로운 미모를 지닌 젊은 왕비가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에는 경사가 탄생했다- 아름다운 어린 왕비가 아이를 임신한 것이다. 황제는 크게 기뻐했다. 태어난 것은 사내아이였다.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났을 터인데도 그 사내아이는 튼튼하고 강했다- 황제는 후세의 탄생을 기뻐하면서도 막연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아이인가, 아니면 선황의 아이인가? 왕비는 침묵했고, 태어난 아이는 어미를 많이 닮았을 뿐 황제와 선황제, 둘 중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황제는 오랫동안 고민했고 그 것이 그의 정신을 좀먹어들어갔다. 어린 아들을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었던 그는 일찍 병사했다. 두 황제의 돌연한 죽음으로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왕비는 황태자를 데리고 총독의 땅으로 돌아갔고, 선황제의 둘째 아들이자 황제의 동생이었던 남자가 제국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정권을 위협할 수도 있는 왕비와 그의 어린 아들을 죽이기 위해 여러번 자객을 보냈으나, 매번 그들은 사라졌다. 단 한번 발견된 자객의 시체에는 큰 맹수가 물어뜯은 듯한 자국이 있었다.  

어린 황태자가 15세가 되고, 그의 할아버지인 총독이 병사했을 때 왕비와 황태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세간의 호사가들은 황제가 자신의 위협을 드디어 제거한 것이라고 떠들어댔으나 그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총독의 아내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제의 비는 죽지 않았으며, 황태자 또한 황제의 피를 이은 것은 아니었다.

총독의 정원에는 하얀 암사자와 그의 새끼인 어린 숫사자가 게으르게 늘어진 채 달콤한 봄꽃 향기를 맡고 있었다.  이따금 멀리서 찾아온 숫사자가 그들의 주변을 맴돌았고, 그 가족은 평화롭게 늘어져 시간을 보냈다. 총독의 저택에서 오랫동안 일한 이들은 그 암사자가 총독의 어린 딸을 따르던 사자와 닮았다고 말했으며, 이따금 멀리서 찾아오는 숫사자는 공주의 곁을 지키다 황제를 시해하고 사라졌던 사자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들은 무거운 입을 열 필요를 찾지는 못했다. 
 말년의 총독의 아내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Posted by 네츠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