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네임 록온 스트라토스- 본명 닐 디란디는 어느 쪽이냐고 하면 유령을 전혀 믿지 않는 타입이었다. 할로윈 행사를 즐기던 유년시절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침대 유령에 덜덜 떨며 잠들던 밤이 없던 것도 아니었지만 어른들이 흔히 그렇듯 나이를 먹으면서 유령은 별 느낌 없는 대상이 되었고, 테크놀로지의 정점에 서 있는 조직에 몸을 담으면서 그 성향은 더 심해졌다. 그렇던 그였기에 새벽무렵 톨레미에서 눈을 떴을 때, 자신 위에 올라타 있는 새카만 물체에 일순간 숨이 멈출 뻔했다.
무게감이 없었다면 정말 유령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형체가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하고서도 한순간 악몽을 꾸고 있나 했다. 하지만 그의 우수한 시력은 곧 어둠 속에서 자기 위에 올라타있는 실루엣이 뭔지를 구분해낼 수 있었다. 자신의 가슴 위에 얹힌 새하얀 손과, 좁은 어깨와, 그리고- ...까지 구분했을 때, 록온은 그만 막막해졌다. 잠깐 더 망설이다가, 그는 반신반의하는 기분으로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티에리아?"
"불렀습니까."
일순간에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 익숙한 목소리에 록온은 그만 죽고 싶어졌다. 차라리 유령이었으면. 상대가 자신을 알아차리든 말든 여전히 덤덤하게 자기 위에 올라타 있는 동료를 향해 록온은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일이야?"
"별 일 없습니다."
"늦은 시간에 왜-"
"신경쓰지 마십시오. 곧 끝납니다."
"..뭘?"
"별 일 아닙니다."
아니, 나는 엄청 별 일이 넘치거든! 속에서 비명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참으며 록온은 연장자다운 미소를 억지로 만들었다. 티에리아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잠자코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도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것같은데도 일언지하의 반문도 허용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록온은 자신이 밀리고 있음을 실감했다. 하로, 나 좀..! 무의식 중에 그는 현실도피 겸 곁에 있을 하로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아득해지려는 시선을 억지로 되돌렸다. 하필 또 이럴 때만 파트너는 옆에 없었다. 미치겠다. 티에리아, 너 무슨 생각이냐. 참자, 참자. 여기서 동요하면 진다. 록온은 태연한 어조를 가장하느라 죽을 힘을 다했다.
"에.. 일단, 왜 온 거야?"
"잠이 안와서요."
"..잠이 안와서 동료의 몸 위에 올라탄다는 건 듣도보도 못했는데요.."
"기존의 상식에만 얽히고 있으면 훌륭한 어른이 못됩니다."
"지,지당하긴 한데 그건 네가 말할 대사가.. 어, 야! 야!;"
딱 끊은 말을 마지막으로 급강하하는 티에리아의 얼굴을 록온은 간신히 빼낸 오른팔로 막았다. 이마를 짚은 손에 티에리아의 전 체중이 실렸다. 이게 무슨..! 딸의 첫 비행을 목격한 아버지같은 경악을 느끼며 록온은 그대로 팔이 꺾일 뻔한 것을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버텼다. 바둥바둥거리던 티에리아는 결국 포기했는지 팔에 실리던 무게가 약해졌다.
"뭐하는 짓이야 이게!;"
"불만 있습니까?"
록온의 뺨에 흘러내린 보라색 결 좋은 머리카락이 닿을락말락하는 상태에서 저지당한 티에리아는 한눈에 불쾌함이 MAX를 찍고 있는 표정이었다. 금방이라도 죽어 마땅을 외칠 것같은 얼굴에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려는 것을 억누르며 록온은 애써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일단은 밤이고.. 뭣보다 좀 무겁고."
"참으십시오. 다른 불만 있습니까."
"..좀 내려와주시면 안될까요?"
"싫습니다. 다른 건 없습니까."
"부,불만 많긴 한데.."
"...싫습니까."
뭔 소리를 해도 들어줄 기세가 아닌 티에리아의 딱딱 끊어지는 말에 반쯤 죽고 싶은 기분이 되었던 록온은 티에리아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나지막한 목소리에 그만 숨이 턱 막혔다. 잔뜩 찌푸리고 있었던 얼굴은 어느새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솔직했다. 가라앉아있는 얼굴에 씌여진 감정은 외면하기에는 너무 강했다. ..진지하게 거절하면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저 티에리아가 그럴리가 없다고 바로 반박하긴 했지만 별 신빙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약해진 아이를 쳐내고, ...울리고. 그 얼굴을 생각해보자, 록온은 그만 이도저도 못하게 되었다.
"..이런 건 반칙이야, 티에리아."
"죄송합니다."
기운이 빠져 중얼거리자 소년은 순순히 사과했다. 팔에 힘이 빠져 록온은 티에리아의 얼굴을 가로막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는 바로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하기야 식량을 생포한 육식동물처럼 흉흉한 기세로 올라타 있긴 하지만. 일견 얌전해보이는 붉은 눈동자를 올려다보다가, 록온은 하, 하고 짧은 한숨같은 웃음을 내뱉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난 네가 좀 더 좋은 사람을 만나서, 행복해졌을 때 이런 걸 시도하면 좋겠는데."
물론 강제성은 처음부터 배재하고. 애써 농담처럼 덧붙인 말에 티에리아는 짧게 웃었다. 상대가 록온이 아니었다면 명백한 비웃음이 되었을 것이다.
"당신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습니다."
"..아프다 그거."
"..죄송합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내뱉은 말에 티에리아는 또다시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약한 건지 강한 건지 알 수가 없는 태도였다. 살짝 고개를 숙여 누워있는 록온과 시선을 맞춘 티에리아는 나직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일단 당신 외의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영광이라고 해야하나 그거?"
"그렇게 여겨주시죠. 앞으로 두 개 더."
"하나는 뭐야?"
"당신을 좋아합니다."
"..또 하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올곧은 말에 또다시 숨이 턱 막혔다. 이대로 쪼그라들어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록온은 또다시 질문을 입에 올렸다. 장난스레 대할 생각이었던 목소리가 완전히 가라앉아 진지해져버렸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를 느리게 한 번 깜빡이고, 티에리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신도 충분히 좋은 사람입니다."
느리고 단호한 목소리에 록온은 한순간 눈을 돌리고 싶어졌다. 착각이야, 티에리아. 그건. 뭔가 해주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다가 하나도 떠오르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당신의 대답은 듣지 않겠다는 양 티에리아는 다시 상체를 숙였다. 이번에는 막을 힘도 없었다.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고, 아름다운 소년은 쓸쓸한 듯, 조금은 기쁜 듯이 웃었다.
"..고마워, 티에리아."
그 맑은 웃음 앞에서 달리 해줄 말이 없어서, 그렇게만 말하고 아이를 안아주었다. 뺨에 스치는 머리카락은 매끈매끈하고 부드러웠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록온 스트라토스. 귓가에 선연하게 울린 목소리가 조금은 아프고, 미안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록온은 그저 눈을 감고, 손에 닿은 아이의 온기에 집중했다.
fin.
16. 紅い花 (붉은 꽃) / 裸体
록온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티에리아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에게 록온은 좋은 사람. 반했거든요. 리본즈 말마따나.. 예전에 '닐은 남에게 제 쪽에서 찔러들어갈만큼 생산적인 인간이 아니지만 2기 티에리아는 훌륭하게 개무시하고 덮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그 결과물입니다.
이렇게 써놓은 주제에 기틀은 록티입니다. 티에리아는 록온이 아플 일은 못할 것같거든요.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