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네타바레/미리니름이 있습니다.)
1. 덕심에는 좋은 영화인데 일반인에게는 한없이 불친절한 영화.
2. 제가 중학교 때 어머니와 반지의 제왕을 보고 오신 아버지가 그러셨지요. "딸아, 영화가 중간에서 끝나더라." ......반지의 제왕은 시리즈 물이기라도 했지, 으음.
3. "캡틴 아메리카"라는 건 참 미묘한 것이, 아메리카를 상징하고 소련이랑 싸웠던 이 옛날 히어로는 미국 내에서는 국민 캐릭터인데 미국 밖에서는 마블 덕후들이나 알까말까하게 인지도가 바닥인 캐릭터입니다. 미국의 드래곤 퀘스트같은 거에요. 국가 내에서는 짱먹는데 외부로 내보내기에는 애매한. 그 스파이더 맨 뒤로 성조기가 휘날릴 때에도 뭥미, 하는 전세계 팬들이 많았을 텐데 하물며 존재 자체로 "미국이 짱임"을 온 몸으로 외치는 캐릭터로 세계시장에 내놓기에는 좀 망설여졌겠죠.
4.저는 미국부심을 아주,아주,아주,아주 싫어하는 편이고, 어느 정도냐면 그 좋아했던 트랜스포머 1편을 처음 영화관에서 봤을 때 초반 30분을 보고나서 속에서 토기가 밀려 올라와 옵티머스고 나발이고 영화관을 뛰쳐나갈까 심각하게 고민했을 정도입니다. 그 미국부심, 나아가 마이클 베이가 죽도록 사랑하는 미국 군대의 활약이 영화 전면으로 드러난 2편에서는 실망했고, 로봇들이 들러리로 전락한 3편까지 가서는 아예 보지 않았죠. 제가 그렇게 그 연출에 화가났던 건, 감히 그 아랍에서 희생자를 운운하던 미국의 모습이 꼴보기 싫어서였어요. 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침략한 건 니들이거든요. 적군 수만을 죽였을 미군중 하나로 등장했으면서 그냥 갓태어난 딸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아빠라니, 인간적이지? 하고 들이대는 것같은 그 설정하며.. 거기서 외부의 침공을 받았다는 순간 귀중한 인명이 죽었다고 보도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니들이 지금까지 죽인 사람들은? 사막에서 물로 샤워하고 농구하는 니들이 손에 쥔 총은? 그런 걸 떠올리는 순간 확 속이 안 좋아졌었습니다. 뭐 굳이 말하면 일본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쳐들어오는 적을 죽이며 분사하는 카미카제 영화를 본 한국인같은 기분이었어요.
5. 하지만 제목도 캡틴 아메리카가 아니라 퍼스트 어벤져로 국내 개봉했을만큼 조심스럽고 걱정하며 다룬 탓인지, 미국부심부분은 영화 내에서 전혀 두드러지지 않았어요. 1963년이라는 시대 설정 때문에 그랬을까요, 미국이 세계를 수호하겠다고 말해도 타당성이 있는 시절이었잖아요. 나치와 소련, 자유와 속박이라는 미명 하에서 싸우고 또 싸웠던 그 시대. 거기 나타난 미국 국기나 주인공 스티브의 애국심은 그렇게 되기 위해 연출된 게 아니라, 시대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그를, 그 국가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싶은 타당성이 있었어요. 미국 국기를 흔들며 입대를 원하는 거라든가, 가족들을 전쟁에 잃었던 스티브가 애국심에 넘치게 된다던가. 미국의 상징으로 내몰린 스티브의 캡틴 아메리카도 그랬고요. 단순히 미국이 잘났다고 말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그 때 당시에는 이런 상징조차 필요했다는 목소리로 들렸습니다. 독일군 기지에 잠입하면서도 성조기 방패를 들고 들어가는 용감무쌍한 부분은 너무 말도 안되보여서 역으로 아,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저 캐릭터의 손에서 떼어놓을 수도, 미국의 상징인 그에게 독일군 옷을 탈취해 입게 할 수도 없었겠구나 싶어서 좀 웃었고요. 마지막 전쟁 후에 휘날리는 국기가 미국국기가 아니라 영국 국기였다는 점에서는 최대한 부심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고 조심했구나 심은 정성까지 느껴졌습니다.
6. 그래서 이 영화가 국내의 공감을 얻지 못한 이유가 미국부심탓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이언맨이나 엑스맨이나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중박정도밖에 안나오긴 했으니 선호도 문제도 있겠지만, 여하튼 그 부분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일반 관객"으로서 눈에 걸리는 점은 지나치게 작위적인 적과 / 장난하냐 싶은 엔딩이 아니었나 싶네요.
7. 캡틴 아메리카를 보면서 신선했던게, 그가 절대 혼자싸울 수 있는 만능 히어로가 아니었다는 거에요. 방패를 던져서 싸우긴 하지만 하늘을 날거나 배트카를 몰거나 몸이 늘어나거나 불덩어리가 되거나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미군 실험에 응해서 초인 병사가 되도록 시술을 받았을 뿐이고 일반인 보다 4배 강한 힘을 갖고 있어요. 어떻게보면 참 수수할 정도죠. 그렇다보니 싸우는 방식도 묘하게 인간적이라 단독으로 깨부수는 대신에 부대를 몰고 다니며 여러가지 일을 합니다. 그 부하들이란 당연히 미국의 일반 병사들이구요. 미군을 이끄는 히어로.. 같은 위치를 주고 싶었던 걸까요, 원작에서는. 여튼 하늘도 못날고 배트카도 못 모는 아메리카는 그냥 슈퍼 솔져로 묵묵히 싸웁니다. 같이 있는 동료들과 함께요.
8. 히어로의 힘을 따지면 꽤 약한 편일지도 모릅니다. 꽤 현실적인 초능력에다 동료들 도움도 받고 있는데, 그에 비해 적은.. 적은 너무 강해요! 유그드라실의 뿌리에서 가져온 정체모를 강력한 힘을 가진 물질을 사용해 한망 맞기만 하면 인간을 분자화 시키는 무기를 대량으로 공급하질 않나 초음속 비행기를 만들지 않나, 애초에 딱 봐도 무장이 미군애들보다 센데요..
8. ...근데 그 무기 왜 공급했냐는 소리가 절로나올만큼 추풍낙엽으로 날아갑니다. 1. 교도소 탈출한 애들한테 (그 무기 들고도) 아무 짓 못하고 빼앗김. 탱크와 총기, 트럭등을 전부. 2. 최종 결전에서 연구소로 미군이 개떼처럼 몰려오자 열심히 쏘아댔음에도 불구하고 동료가 죽어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미군앞에서 한대씩 얻어맞고 픽픽 쓰러짐.
아니 교도소에서 탈출한 애들이 맨손으로 저 위험한 화기든 사람들을 때려잡고 전차를 갈취한다니까요?; 주인공한테도 한발도 못맞추더니 최후 결전에서는 밀려오는 사람들에게 총알을 난사했는데도 그다지 효과는 없었나봐요.. 이 기시감은 대략 아바타에서 화살 쏘는 주인공들이 폭탄 수만정 싣고 온 지구인들을 발라버렸을 때 느낀 어색함과 같았습니다.. 너무 솔직하게 표현하는 바람에 귀여울 정도였어요.
9. 그리고 적이었던 레드 스컬. 휴고 위빙님이 나와서 연기하신 터라 꺅갹 대면서 봤는데, 이 사람의 최후부터 이 영화의 불친절이 작렬합니다. 아니 보통 주인공이 목숨걸고 초음속기를 따라잡았으면 주인공이랑 싸워서 죽어야되는 거 맞지 않아요? 이챠이챠하더니 그 정체불명의 에너지 물질에 손 갖다대더니 천장에 밤하늘이 펼쳐지고 뽷!!!! 사라집니다. 어?? 그리고 여주인공과 댄스 야속을 했던 주인공의 초음속기는 그대로 얼음에 처박히고요..
10. 그러더니 다음 순간, 주인공은 2030년대에 가 있습니다. 영화는 그리고 끝. 말미에 이 주인공이 활약하는 어벤저스를 기대하라는 광고와 함께..
11. 아이언맨의 엔딩에서 토르의 지팡이가 등장했을 때 아 연계플레이 하려는 모양이다 생각은 했지만 이건 대체.. 캔팁 아메리카라는 한 영화의 엔딩 부분을 쏠랑 잡아먹힌 것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후속작도 없다던 이 시리즈,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어벤져스 등장은 시켜야겠고 영화는 없으니 얼른 찍자 그렇게 찍은건가 싶어질 정도였어요. 기껏 그렇게 재밌는 설정, 싸우는 군인, 순서 딱딱 맞는 재밌는 전개로 쭉쭉 끌고 나갔으면 적어도 엔딩은 마무리 짓고 어벤져스로 이어줬으면 안되나요? 악당과의 최후결전도 토르 안 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도록 뽷 하고 날아가, 여주인공과의 엔딩도 설명없이 사라져, 이건 대체.. 영화관에 들어온 관객중에서 어밴져스를 모르는 사람은 절반 이상일거고, 막판에 와서 시공간이 튀들어져버릴 거라는 예상은 누가했겠냐고요. 저는 그 부분부터 사정없이 벙쪄서 앉아있었습니다. 그저 벙쪄있었습니다..
12. 영화 자체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깡마른 약골 스티브가 계속 도전하는 것도, 수류탄앞에서 배짱과 용기를 보여주는 것도, 깃발 앞에서 슬기로움을 보여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무진장 예쁜 모던 스타일의 페기와 미묘한 밀당("여자를 모르는군!")이라든가, 버키가 캡틴 아메리카가 아니라 브룩클린의 꼬맹이 친구 따라가겠다고 해주는 거라든가 깨알같은 재미가 넘쳤다고요. 시대 설정은 사랑스러울 정도였고 비행기로 탈출하면서도 동료 박사한테는 내 차 타고 따라오라던 레드스컬한테까지도 미묘한 정이 느껴져서 좋았는데, 그 영화의 엔딩에서는 전부다 깨끗하게 소거해버리고 다음 편에 (완전 새롭게) 계속이라니, 캡틴 아메리카만 보는 관객은 봉이냐? 봉이냐고!!ㅠㅠㅠ
13. 어벤져스도 볼 거긴 하지만요.. 아니 어쨌든 그 이야기들을 다 연결하는 영화가 나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아이언 맨처럼 본편은 본편으로 완결지은 상태에서 뒤 엔딩에서 연결되는 상황을 언급해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캡틴 아메리카는 사고로 그렇게 되는 것이니 만큼 완전히 구별지을 수는 없겠지만 하다못해 레드 스컬의 최후에 더 관여를 많이 하게 해준다거나, 아님 영화 앞 부분에서 복선을 좀 깔아주던가요. 기껏 복선이라고 우길 수 있는 거래봤자 "영구적"인데 그건 영원히 나이를 안 먹는다기보다는 늉근 스티브가 지속된다는 대사로 보였다구요..
14. 이런 저런 아쉬움이 넘치는 와중 깨알같은 하워드 스타크(과연 "그" 토니의 아버지)를 보면서 즐거웠더랬습니다. 스티브가 잠들지 않고 30년만 더 깨어있었나면 아버지 무릎 근처에서 촐랑대면서 아빠 방패 구리네영 새로 만들까여? 같은 대사 치는 꼬마 토니를 볼 수도 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