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워지는 건 눈깜짝할 사이. 곱게 물이 든 나무가 4,5일만에 축 시든다 싶더니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듯이 눈이 내렸다. 가느다랗고 느리게 흩날리는 그 것들이, 처음에는 익숙해지지조차 않았다. 느리게, 느리게 쌓이는 그 것들은 결코 멈추지 않았고, 녹아 사라지지도 않았다. 나락의 겨울은 빠르게 찾아와 느리게 내려앉고, 영원처럼 길게 이어진다. 영원처럼.
플라티나가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중천에 뜬 오전이었다. 이마에 배인 땀을 훔쳐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구들은 나란히 놓여있었고, 바닥에 꼼꼼히 깔아놓은 양탄자에는 그을음하나 없었다. 난롯가의 화로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 방안의 공기는 후덥지근하니 더웠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익숙한 사람의 모습, 그 것하나만이 없었다.
"제이드."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어디 나가기라도 한 건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대 옆에 두었던 보온용 망토를 둘렀다. 몇 년인가 전에 가벼운 차림으로 밖에 나갔다가 호되게 감기에 걸려온 이후로 제이드가 마련해온 것이었다. 고열로 며칠을 앓는 동안 침상 곁을 지키는 그가 지독히도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 새삼 떠올라 플라티나는 굳어있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돌아왔다.
꼼꼼하게 장갑과 신발까지 챙기고 나서야 밖으로 나섰다. 세상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있었다. 눈이 반사하는 햇살에 일순 눈이 아파왔다. 얼마 전 마법으로 오두막 주변을 모조리 쓸어냈는데도 어느 새 발끝이 푹 빠질만큼은 쌓여있는 것을 보면 지난밤에도 눈이 내린 모양이었다. 자국이 남아있지 않은 흰 눈 위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외딴 오두막 주변에는 인적이라고는 한 톨도 없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을 피해온 장소여서 그런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집을 중심으로 마인은 물론 아프락사스가 살아돌아온다 해도 무단으로 통과할 수는 없을 엄청난 마력의 결계가 세워져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아무래도 지나치지 않냐며 지나가듯 말했을 때, 제이드는 만날 필요가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가 내건 결계를 통과하기 위한 조건은 지독히도 짧고 어려웠다.
<자신과 플라티나를 동시에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일 것. -혹은 돌의 힘을 얻은 사람일 것.>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당신을 신으로 떠받들기라도 하면 곤란합니다. 현자 노릇은 베릴에게나 맡겨두세요.'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렇게 쏘아댔다. 툴툴거리며 말했던 목소리에는 몰래 결계를 세운 것에 대해 후회고 반성이고 한톨도 묻어있지 않아 플라티나는 탓하는 것조차 잊었다. 결국 수긍해버린 것은 플라티나 쪽이었다. 사람을 만나기 싫어했던 것도 자신이었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것을 꺼리기 시작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가 새삼스럽게 결계를 만들지 않아도 외부와 접촉하는 일을 반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걷다가 피곤이 몰려와 플라티나는 나무 아래에 기댔다. 눈을 감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차가운 겨울의 냄새와 섞여 결계의 마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외곽쪽으로 가까이 왔다는 뜻이다. 마을과 가장 가까운 곳은 이 곳이다. 제이드가 돌아온다면 이 곳으로 올 것이다. 더 걸어가기도 지쳐 플라티나는 이 자리에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얄궂게도 돌의 힘'을 얻고 나서도 몸은 예전과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조금 걷는 정도로도 의식을 잃게 되는 일이 없어진 정도가 전부였다. 마력으로 채워진 몸은 분명히 영생을 얻었는데도. 제이드는 설마 돌을 마시고도 플라티나 님을 찾아다녀야하는 일과를 반복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혀를 찼다. 나를 찾으러 오는 네 얼굴을 보는 것이 즐겁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웃음과 함께 가슴 속에 묻어두었었다.
"- 플라티나 님?"
눈을 감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당황한 목소리가 귀에 와서 박혀 플라티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외알 안경 너머의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생각하기도 전에 씁쓸한 미소가 먼저 나왔다.
"..여전히 오는게 늦어."
"기다리라고 말한 적은 없었는데요."
"기다린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냐."
"그럴 리가요. 하지만- 대체 언제부터 나와있었던 겁니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귀찮다는 생각이 반,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 반이었다. 잠자코 빨갛게 곱아든 손끝을 내보이자 제이드의 차가운 얼굴이 거기서 무너졌다. 손에 들고 있던 큼직한 주머니를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손을 뻗어왔다. 플라티나는 순순히 그 손을 잡았다. 있는대로 얼굴을 찌푸린 제이드는 잠자코 손을 잡아 장갑을 벗겼다. 얼음처럼 차가운 감촉에 일순 얼굴을 굳힌 제이드는 험악한 표정으로 주문을 영창(詠唱)하기 시작했다. 플라티나는 주문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마력으로 몸을 둘러 감싸버렸다. 온도조절주문은 마력에 튕겨나가 흩어졌다. 제이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짓입니까?"
"..흙 속성의 주문을 받아들이면 몸이 안좋아져."
"...지금 농담하시는 겁니까, 플라티나님? '돌'을 마셨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이쪽이 좋아."
플라티나는 잠자코 손을 뻗어 제이드의 손을 붙잡았다. 제이드가 움찔 놀라며 손끝을 움츠렸다. 어린아이가 흔히 그러듯 그 손을 붙든 채 잠자코 기다리자, 한숨을 푹 내쉰 그는 플라티나의 두 손을 겹쳐 손바닥 위에 돌리고 다른 손으로 감싸듯 포갰다. 세월에 단련된 만큼 목덜미까지 빨개지는 일은 없었지만,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든 제이드의 얼굴에는 쑥스러움이 배어있었다.
"..그런 대사는 대체 누가 가르쳤는지 모르겠군요."
"..너를 제외하고 달리 누가 있나."
"과거의 저를 죽이러 가고 싶어지는 대사는 그만두시죠."
"내가 곤란해지니까 그런 건 하지 마."
"말하지 않으셔도 안할 겁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제이드는 옷자락을 펼쳤다. 플라티나는 순순히 그 품안으로 고개를 묻었다. 어디서 배워오신 건지. 낮게 울리는 제이드의 목소리가 한숨처럼 목께에 내려앉는 것이 듣기 좋아, 플라티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플라티나를 품은 채 제이드는 옷자락을 꼭꼭 여몄다.
"얼음덩어리를 하나 끌어안고 있는 느낌이네요. 언제부터 나와계셨습니까?"
"기억 안나."
"..어련하시겠습니까."
싸늘한 뺨을 가슴 언저리에 묻자, 제이드는 망설이지도 않고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 감촉이 몹시도 편안했다. 차갑게 식은 머리카락에 무언가 닿았다. 그 것이 제이드의 입술이 스치듯 닿았다 떨어진 감촉임을 알고 플라티나는 가늘게 웃었다. 흠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관자놀이 근처에 와닿았다. 당혹해하거나, 쑥쓰러워하고 있을 얼굴일 게 분명했다. 뭐라 한 마디 놀려주고 싶었으나 갑작스레 열이 몸에 닿은 탓인지 묘하게 잠이 밀려왔다. 그 기색을 눈치챘던 걸까, 아니면 어느 정도 몸이 녹았다고 생각한 걸까.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듯 가볍게 토닥이고나서 제이드는 플라티나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나머지는 집에가서 하고, 업히시죠, 플라티나 님."
"업혀?"
"보나마나 걸어돌아갈 생각은 없으실테니까요."
"..주머니는 내가 들겠다."
"..플라티나 님이 주머니를 들고 제가 플라티나 님을 업으면 결국 주머니도 플라티나 님도 제가 들고 가는 셈입니다만."
"경량화 주문이 걸려있잖아."
"알고 계습니까?
"모를 것같나."
목으로 쿡쿡 웃자, 길게 한숨을 내쉰 제이드는 등을 보이고 무릎을 꿇었다. 그 등에 업히면서 플라티나는 생소한 느낌에 조금 웃었다. 업히자마자 주변의 공기가 일변했다. 제이드가 마력으로 열을 품은 공기를 만들어내 주변에 두른 것이었다. 아까와 달리 플라티나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주문을 받아들였다. 제이드는 그대로 플라티나를 업은 채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기분좋게 흔들리는 감각에 플라티나는 눈을 감았다.
"..이런 건 형님과, 형님의 참모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업는 정도가 아니라 마력장으로 둘러쳐서 안고 다녔겠죠. 그 과보호 도련님이라면."
"그런가."
"..수긍하지 말아주시죠. 아무리 도련님같은 녀석이라도 정말로 그러고 다녔으면 어울려다닌 제가 낯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겁니다."
"그 것도 그렇겠군."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진다는 듯 제이드의 목소리 톤이 두 단계쯤 가라앉았다. 플라티나는 가볍게 웃고 제이드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플라티나 님. 다소 탓하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든든하게 받쳐준 팔에서는 힘이 빠지지 않았다. 플라티나는 그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기분좋은 온기가 몸을 채웠다.
눈 위의 발자국은 단 두 개.
겨울 동안 이 설원의 눈에는 다른 발자국이 새겨질 일이 없다.
그 속에서도 손을 뻗은 곳에 온기가 있다는 것이, 그저 좋았다.
fin.
예전에 올렸던 걸 수정한 본이 있길래 새로 업로드.
안 올렸다고 생각해서 올렸는데 이미 올렸었네요.. 아까워라.
<죵니 달달한 제이플라를 보고 말겠다>라는 기세등등한 기세로 써갈겨내려갔던 기억만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