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처럼, 밤이 안개가 되어 검은 날개를 펼치면, 나는 그 새까만 베일 너머로 다시 찾아올 너를 기다린다. 칠흑 사이로 스며나온, 떨어져나온, 방울져 맺힌 무엇처럼- 질척이는 무언가를 머리부터 뒤집어쓰고 느린 걸음으로 내 곁에 다가올 너를 기다린다. 네 이마 위에 드리운 것은 수줍은 신부의 흰 베일이 아니라 까맣게 좀먹은 죽음일 터이다. 영롱하게 반짝이던 눈에는 구슬픈 죽음이 녹아내리고, 붉은 입술에는 망자의 피가 검게 죽어 말라붙어있을 터이다. 그렇게 나의 신부는- 죽은 나의 연인은 산 자의 흔적을 더듬어 내 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악몽같은 밤이나, 그 악몽이 달콤한 죽음처럼 깊음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내 사랑이여, 그렇게 죽도록 사랑했던 나의 신부여. 죽음의 늪에서 기어나온 우울한 망령이라 해도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녹아내린 뺨 사이로 망자의 뼈가 비쳐도, 분홍빛으로 뺨을 물들이고 생으로 반짝이던 그대의 미소가 남아있지 않은가. 나의 연인,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여. 심장을 걸고 맹세했던 그 나날을, 그 사랑을 어느 날인들 잊을 수 있을까.
내 어깨에 와닿은 너의 머리카락이, 그 스치는 여린 감촉이, 느껴지는 그 순간부터 또 스러져 무너져내릴 무엇임을 나는 안다. 영원의 한자락에서 멀리 돌아 헤메다, 또 무슨 모퉁이같은 것에 걸려 넘어지듯이, 그렇게 멀리떠난 너의 흔적이 내 곁에서 다만 맴돌고 있음일 뿐임을 안다. 그러나 내가 어찌 너를 거부할까. 숨을 멈추고 함께 무한을 떨어져내려갔던 나의 연인, 나의 사랑, 나의 목숨, 그 지독한 애정을 내가 어찌 잊을까. 생과 사의 경계에 목숨을 내걸어, 기어이 너를 피안 너머의 먼 곳까지 빼앗기고 나서도, 이 사랑은 좀체 죽을 줄을 몰라, 나는 나를 찾아 돌아온 너의 그 차가운 숨결- 그 써늘한 감촉에 목께를 내어준 채 숨을 멈춘다.
아아, 나는 안다. 정녕코 알 수밖에 없다. 죽음의 늪에서 꺼내온 너의 육체는 차갑고도 서러워, 열을 품은 내 손끝이 스치는 순간 무너져내릴 터이다. 수천의 밤을 그렇게 보내오고 수천의 낮을 그렇게 뜬 눈으로 보내고서야 나는 내 품에 안을 수 없는 너의 그림자를, 그 윤곽을, 다만 애타는 가슴을 억누르며 손끝으로 덧그려본다. 그 허물어지는 경계는 따라 내 심장을 허물고 있음이요, 그렇기에 나는 또 조금 죽음에 가까워진다. 내 몸에 흐르는 피가 차게 얼어붙는 매 순간을, 그 고통을 내가 감히 감내하고 있음은, 그 모든 고통이 피어나는 순간마다 네가 함께하기 때문이요, 그렇게 더듬어가는 끝에서 네 손이 잡힐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 내 목숨, 내 숨결이었던 너를, 너를 붙잡고 그 체취를 들이마신다면, 설령 그것이 죽음이라한들 괴로울까.
어깨에 숙인 네 머리카락에서 차가운 사자의 감촉이 느껴져도, 향기로운 살결에 남은 것이 문드러진 악취뿐이라해도, 나는 기어코 언젠가는 너를 끌어안고 말겠다. 매번, 매 차례 숨이 멎는 순간마다- 너를 만나는 그 순간마다, 안개처럼 부서져 사라지는 너를 보는 순간마다, 네가 닿았던 자리에서부터 나의 육신도 함께 무너져 흩어지고 있음을 너는 알고 있느냐. 네가 닿았던 자리마다 죽음이 옮겨붙어 내 숨을 조이고 있음을 너는 아느냐. 제발 그리해주렴. 그리하여 언제고 다시 너를 안을 날까지, 그렇게 나를 마중와다오. 악마의 손짓이든, 천사의 자비든 좋다. 그 날이 올 때까지는, 네 손을 잡고 네 팔을 안고 네 머리카락에 입술을 맞출 그 날이 올 때까지는, 수천 수만번 죽음 속에 허우적대는 밤을 보내도 좋다.
마음의 끝에서 너의 잔영은, 생경한 무언가의 기억처럼 겹겹이 파문을 일으켜 살아돌아온다. 그 터럭 끝 한자락이라도 차마 손을 뻗어 쓰다듬을 수 없는 것은, 너의 그 모습이 고귀한 기억이요, 서러운 슬픔이요, 안타까운 눈물임을 알기 때문이다. 혹여 스치기라도 하면 그대로 이지러져 모습을 감추고마는, 그렇게 연약히 타오를 그 추억의 불을- 그 물빛 환영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너를 안겠다. 갈고랑처럼 세운 손톱으로 살 위를 허우적대며 긁어대어, 마디마디 맺히는 핏덩이를 쥐어짜 너를 안겠다. 문드러져 피맺힌 살덩이를 또 갈라 끌어내어, 죽은 네게 바치겠다. 그러니 연인이여, 다시 돌아와 이 품에 안겨다오. 나의 연인, 나의 신부, 나의 사랑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