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이야기를 해볼까. 썩 즐겁지만은 않을 이야기다. 듣는 자에게 있어 이 이야기는 아둔한 자의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테고, 나에게 이 이야기는 아픈 상처 위에 다시 달군 돌을 얹는 그런 이야기일테니. 하기사, 아마 나보다 더 상처받을 누군가도 있을테지만.
너도 여신 아프로디테를 알고 있겠지. 미와 사랑의 여신인 그녀는 그리 총명하지는 않았다. 내 아버지의 피거품에서 태어난 그녀는 사계절을 모두 모아 장식한 듯 아름답고 선명했지. 그러나 나의 조카가 제 아버지의 머리를 쪼개고 태어나며 지혜의 여신이 되었듯, 내 아버지의 성기에서 태어난 그녀는 원초적이고 아름다운 욕망으로 주변을 취하게 했다. 그녀가 주관하는 사랑이란 순수함과는 전혀 다른 영역에 있는 것이었어. 그리고 내가 품은 마음은 철저히 그녀가 권장하는 광휘 아래에 놓여있는 그런 것이었다. 정욕과 질투로 가득 차 종국에는 모든 것을 짓이겨버리고 마는, 그런 사랑이었지.
현명한 나의 조카 아테나가 군림하는 도시, 바로 그 올리브의 도시가 내 안의 사랑- 아니 차라리 분노를 깨운 첫번째 원인이었다. 처음 그 땅이 바다를 가르고 피어나 도시를 이루었을 때 나는 그녀만큼이나 그 도시를 원했다. 바다란 무릇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 장소였다만 신의 이름을 주창하는 자들은 두 발로 대지 위를 걷고 있었거든. 우리를 진정 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를 찬양하는 인간들의 목소리다. 그들의 마음이 경건할 수록 우리는 완전에 더 다가서지. 그러니 내가 그들을 원한 것은 당연했다. 그 아름다운 도시를 갖기 위해 나는 바다 거품을 모아 눈부신 말들을 만들어냈다. 허나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아마도 익히 알려져있겠지.
그들은 비옥한 땅에서 피어나는 풍요의 열매를 택했다. 내 말은 다시 거품이 되어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나의 사랑스럽고 오만한 조카는 우아하게 예를 다하고는 그 도시로 걸어들어가 자신의 신전을 세우더구나. 인간들의 찬양이 높이 울려퍼졌다. 여왕이 즉위식장에 서 있는 모습이 그 것과 비슷할까. 그래, 그 것만은 인정하마. 찬란한 영광의 가운데서 당당하게 미소짓는 그녀는 아름다웠다. 허나 나는 그 모습을 거품이 이는 바닷가에서 외로이 보아야했다.
나는 바다의 신이다. 인간의 시조보다도 훨씬 오래된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장소의 주인이야. 태초부터 이어져온 원시의 생명력, 그 정수가 몰아치는 곳에 나의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런 내가 어떤 존재였을지 너는 알겠지. 아비의 머리에서 태어난 아테나가 현명하고 호전적인 전쟁의 여신이 되었고, 아비의 성기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가 정욕과 사랑을 품었듯이 나는 나의 땅에서 피어오르는 거칠고 험악한 생명력 그 자체였다.
그렇게 거칠고 오만한 바다의 주인인 나에게, 나의 도시를 앗아간 여신이 어떻게 보였겠나. 내 것이 되어야할 도시에 내가 아닌 자가 자리 잡았고, 내가 마음을 다해 빚어냈던 말들은 하얀 갈기를 한번 휘날려보지도 못한 채 바다 거품으로 되돌아갔다. 인간들은 나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도시의 주인이 된 내 조카는 나를 무시했다. 그 치욕과 굴욕이란. 그 것들이 얼룩져서 내 푸른 바다에 검푸른 분노를 낳았다. 인간을 상대로 퍼붓는 분노라면 차가운 바닷물과 거친 파도로 쓸어내버릴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나의 분노는 나와 같은 여신에게 향했다. 따라서 나는 분노를 퍼붓는 대신 복수를 품었다. 검푸른 심해처럼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앉아, 언제고 그녀의 성전을 집어삼킬 것만을 기다리는 추악한 복수를.
지혜의 여신이 왜 그런 나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지금도 나는 모르겠다. 새로운 신을 낳을 수도 있었던 여신의 태를 타고났던 그녀였는데. 내 아름다운 조카는 아비의 머리 속에서 잉태되어있는 동안 어미의 지혜를 잊은 모양이지. 그녀는 나의 요청에 따라 너그럽게 자신에게 속한 도시를 나에게 열어주었다. 내가 아는 한 그 것은 그녀가 베풀어온 수많은 은혜중 하나이자 유일한 오판이었다. 내 총명한 메티스는 제우스에게 먹히는 그 순간에 자신의 딸이 저지를 실수를 예지했었을까. 나는 기쁨에 차 그녀의 도시로 뛰어들었다. 신의 성스러운 걸음걸이로 그 도시를 걸었으나, 추악한 분노가 향할 곳을 찾고 있는 그 모습은 그저 치졸하고 어리석었을테지.
그녀를 기리는 수많은 신전들 가운데서 내가 진정으로 빛나는 성전을 찾아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갈색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며 웃던 그 소녀를, 그녀의 무구한 빛을 모르고 지나치는 쪽이 어려웠을 게다. 그만큼 도시 전체를 메우는 소녀의 이름은 어떠한 더러움도 없었다. 다만 여신을 사랑하는 자에 대한 찬양과 애정이 깃들여 아름답게 울려퍼졌지. 메두사. 그녀는 진정으로 아름다웠어.
네 얼굴이 일그러지는구나. 그래, 너는 그 이름에서 지독한 괴물밖에 읽어내지 못할 거다. 마성의 눈과 얼어붙은 심장을 가진 뱀의 여인이 네가 아는 전부일테지. 그러나 한 때 그 이름은 누구보다도 눈부신 청춘과 아름다움, 그리고 순결의 상징이었다. 그 때는 그토록 애정과 순결이 깃든 채 빛나고 있던 신성한 이름이 오늘날에 와서는 죄악과 정념의 괴물을 부르는 이름이 되어버렸구나. 얼마든지 비난해도 좋다. 어리석은 자의 편협한 감정이 모든 것을 망쳤다고. 그 것이 우울하고 초라한 진실이니.
나는 복수에 불타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부디- 어리석은 변명을 덧붙이게 해준다면, 말하게 해다오. 그 치졸한 복수는 시작하기도 전에 그 힘을 잃고 말았다고. 나를 올려다보는 인간의 눈은 한없이 아름다웠기에 내 분노는 순간에 무너져내렸다.그 맑고 눈부신 시선이란. 고결한 눈동자와 경건한 목소리, 그리고 정녕코 한 점의 티도 없을 정갈한 마음. 신을 신으로 만드는 무수한 인간의 신심이, 그 완전한 신성(神性)이 나의 눈 앞에 있었다. 단언할 수 있어. 그 때 그녀가 품은 신앙은 나의 바다만큼이나 깊고 형제의 천공만큼이나 드높았다. 인간이 품은 생명, 그 전부를 다해 빛나고 있을 그 신앙을. 그 마음을. 그 빛을. 나조차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신을 찬양하는 그 시선으로 메두사는 나를 보았다. 바다의 신을 경배한다는 목소리는 달콤했다. 넋을 잃을 정도의 빛이 거기 있었지. 그러나 그녀는 나를 신으로서 찬양하되 사랑하지는 않았다. 이미 그녀는 아테나의 가장 순수한 성전이었으니. 몇 번, 나는 그녀에게 나의 신전으로 찾아올 것을 권했다. 그녀는 다만 제가 사랑하는 여신의 품 안에서 행복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있었다. 나는 그녀를 원하고 있었어. 달콤한 꿀을 맛본 꿀벌이 두번 다시는 다른 꽃으로 날아가지 못하듯, 그녀에게 취해있었다.
그 순수한 자가 나의 신성 이면에 숨어든 정욕과 질투를 읽어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번의 망설임, 걱정, 그리고 끝내 스며들던 불신. 결국 소녀는 과거와 같은 눈으로 나를 보지 않게 되었다. 벅찰 정도로 아득하고 아름답던 신앙은 사라지고 나를 보는 눈에는 불안이 스미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해. 그녀가 그렇게 신성한 자가 아닌, 그저 두려운 누군가로서 나를 보았을 때- 나는 나를 완전하게 채워주던 감각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차가운 눈빛이 나를 싸늘한 돌로 만들어버리더구나. 나는 양지에서 음지로, 발가벗겨진 채 끌려나가는 죄인처럼 그 눈빛 아래서 절망했지.
-그 냉혹한 감각은 나를 미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저 원시적이고 잔혹할 뿐, 나는 본디 선량한 자가 아니다. 제우스에게 반기를 들 때에도 나는 우리들의 막내이자 큰형인 그를 짓눌러버리는 것을 한번도 망설이지 않았단다. 그가 큰 손을 들어 헤라를 하늘 아래에 거꾸로 매달기 전까지만해도 나는 최고신을 쓰러트리는 즐거움을 찾아 웃고 있었다. 그의 번개가 눈부시듯 나의 창도 강력하리라 생각했지. 오만하고 어리석은 신에 대해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만, 그렇게도 나는 불완전한 자였다. 우습게도.
도시 아테네에 이어 두번째로 아테나에게 무언가를 빼앗겼을 때, 내 안의 절망은 처음 바다가 생명을 토하던 순간 그러했듯이 거칠고도 지독하게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죄의 감정은 남김없이 한 소녀를 짓밟아 부수었다. 생생한 비명이 신전을 메우고, 그 안을 채우고 있던 신성을 남김없이 부수어 내려 오물로 뒤덮게 만드는 동안 나는 미쳐버린 바다처럼 거센 태풍 속에 있었다. 지옥 이면까지도 닿아 모든 것을 내리부술 것같은 격정으로, 나는 나 자신과 인간 소녀를 한꺼번에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나의 잔인한 아내는 그 모든 것을 다만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암피트리테, 네레우스의 딸, 잔혹한 바다의 여신. 그녀는 내가 일개 인간 여자에게 눈이 팔려 아테네에 달라붙어 있는 동안 가슴 속에서 몰아치는 질투와 분노를 수면 아래로 내리 눌러 감추고 있었지. 그리고 기어코 내가 무너져내려 바다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소리높여 승리의 웃음을 웃었다.
'당신의 손으로 인간여자에게 잔혹한 죽음을 안기셨군요. 그 오만한 계집은 제가 사랑하는 여신이 그랬듯 스틱스 강에 자신의 정절을 맹세했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냉혹한 여신은 그렇게 웃었다. 나의 배반에 대해 그녀는 죄를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 한마디로 나는 어리석은 자신에 대해 뼈아프게 후회했으니. 나는 감히 암피트리테를 추궁할 수도 없었다. 나는 제 손으로 덫을 놓았고, 스스로 그 올가미에 뛰어들어 자신의 목을 졸랐다. 그렇게 나는 내 어리석은 감정으로, 그 지독하고 미숙한 감정으로 한 인간 여자를 괴물로 바꾸었다. 동시에 죄와 악의로 더러워진 내 사랑도 끝났지.
이제와 내게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나는 찰나의 영원을 보았고 그 것을 내 손으로 부수었다. 그 영원의 주인이었던 아테나는 목놓아 울 수라도 있었으나, 남의 것을 탐한 죄수에 지나지 않는 나는 처음 품었던 복수에 대한 충족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깊은 절망과 우울 속에서 그저 나는 자신을 탓했다. 어리석은 내 손으로 부수었던 그 신성을 나는 두 번 마주할 수조차 없겠지. 미욱한 자신이 찢어발겨버린 한 인간 여자에 대해 뭐라 사죄할 수 있을까. 이미 그녀는 본래의 자신을 잃었고, 남은 것은 신에게도 외면당하는 저주받은 몸뿐일진데.
제우스의 아들이 헤르메스의 샌들을 신고 바다 위를 걷는 동안 그의 주머니에서는 괴물의 피가 바다 위로 흘러내렸지. 그 피를 보고서야 나는 마침내 운명의 여신이 자아내는 선율 속에서 메두사의 역할이 끝났음을 알았다. 길고 긴 저주를 죽음으로 끝낸 후, 마성의 눈을 지닌 머리는 아테나의 방패에 장식되었다. 전쟁의 여신은 자신의 방패를 영원히 놓지 않을테지. 그로서 메두사는 사랑했던 여신의 곁으로 되돌아갔다.
그녀에게서 광명을 앗아간 어리석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단다. 사죄도 후회도 이제와 닿을 일은 없으며, 모든 것은 과거 속으로 묻혀버렸으니. 그저, 나는 이 바다 위로 스며든 그녀의 피를 하늘로 돌려보내겠다. 그녀의 피와 바다 거품과 섞어 새하얀 말을 만들어주마. 처음 아테네에 내가 선사하려했던 그 말과 같이 눈부신 백마를. 그리고 나는 그 말의 등에 빛나는 날개를 달아주겠다.
날개달린 신마는 창공을 누비며, 높고 높은 하늘에서 살 것이다. 어떤 거센 파도도 거친 풍랑도 그 하늘까지 닿지는 못한다. 하늘을 누비는 페가수스, 그 날개에 맺힌 그녀의 마지막 남은 피 한방울조차 영원토록 내게 와 닿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 눈 먼 사랑은, 두 번 다시 그녀를 상처입히지 못하게 되겠지.
fin.
이 글과 세트. 오랜만에 옛 글들을 읽다가 포세이돈 시점에서는 어떨까 싶어 쓱쓱.
신화 왜곡도 이쯤되면 범죄급이지만 상관없습니다.(...) 없나?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