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해결사네 사람이다."
"응?"
길거리에서 그를 먼저 발견한 것은 오키타였다. 다른 곳을 보고 있던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분명 해결사네 사람이 있었다. 빌어먹을 은발 곱슬이 아니라 좀더 낯설고 낯익은 소년이. 시야가 마주쳤다.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에 저쪽에서부터 기세좋은 목소리가 선수를 쳤다.
"히지카타상. 오키타상. 안녕하세요!"
"어, 너냐."
"안녕하세요."
정중한 인삿말을 몹시도 까칠하게 집어던진 오키타를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은- 시무라 신파치는 사람좋게 웃어보였다. 범생이처럼 동그란 안경이야 그렇다쳐도 식료품이 꽉꽉 차 있는 장바구니를 품에 안아들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가부키쵸에서 험한 일을 맡아하는 직업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허리춤에 찔러넣고 있는 목도래봤자 검도 도장에 다니나 싶은 소년처럼 보일 뿐이다.
"장이라도 봤냐?"
"네. 원래는 카구라랑 같이 가기로 했는데 영 안와서- 순찰 가시는 길인가봐요?"
"한바퀴 돌고 들어가는 길이야."
"고생이 많으시네요."
"너야말로."
"그렇지도 않아요, 당번제로 장보고 있고."
"..월급은?"
대답도 없이 식은땀을 흘리며 웃은 신파치를 보며 히지카타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겸연쩍게 웃은 신파치는 부스럭거리며 장바구니를 뒤졌다. 나온 것은 캔 음료수 두개였다.
"돌아가는 길이시면 이거라도 드세요."
"어, 고마워."
"별 것 아니에요. 원래는 긴상 주려고 샀는데, 최근 진짜 당뇨가 위험하다고 의사 선생님이 그래서 안되겠다 싶었거든요."
"그 거 지금 남 주려다 버릴 거 준다는 소리-"
"다물어, 소우고! ..잘 마실게."
"아하하.. 네."
차기 국장 라이벌을 보는 오키타의 목소리가 묘하게 매서워지려는 것을 머리를 쳐서 막았다. 불만 가득한 눈이 다음에는 무슨짓을 할지 걱정도 되었지만 지금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리를 벗어나려던 신파치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양 히지카타를 불러세웠다.
"아, 히지카타상!"
"응?"
"저기, 긴상이 히지카타상한테 <오늘 일이 있어서 약속은 취소한다>고 전해달라고 했었어요."
"아.. 알았어. 전해들었다고 전해줘."
"네. 조심히 가세요!"
약속이 뭔지 궁금할 법도 했는데 신파치는 묻지 않았다. 아마 저녁식사 준비로 머리가 꽉 차 있는 모양이었다. 예의바른 소년답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가는 뒷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히지카타와 오키타는 둔영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어깨를 나란히하고 걷던 오키타가 불쑥 물었다.
"형씨가 히지카타상한테? 무슨 일있었어요?"
"별 것 아냐. 맡길 일이 있었어."
"흐음- 형씨랑은 견원지간같더니 의외네요. 따로 일을 맡길 줄은 몰랐어요."
"불만이냐?"
"별로요."
오키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앞만 보고 걸었다. 별로 캘 생각이 없어 보여 히지카타는 속으로 적지않이 안심했다. 그 약속이라는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매주 금요일 저녁. 애매한 날짜를 잡은 것은 그 날이 주말을 앞두고 둔영이 가장 적막해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평소부터 밤을 새워 일하는 부장의 처소에는 사람이 얼씬하는 일도 없어서, 적당히 들어온 해결사를 불러세우기도 쉬웠다. 일이 겹쳐서 오지 않은 날이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곤 했었건만, 굳이 신파치를 통해서 말을 전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거리에서 만나는 것보다 만나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은 만큼 애매한 전언이기는 했지만. 이제와서 기다리는 자신에게 조금 배려라도 해줄 생각이 들었던 걸까. 아니면 짖궂은 심술이었을까. 재미도 없다싶어 혀를 차는데, 불쑥 오키타가 입을 열었다.
"히지카타 상."
"응?"
"난 말이죠, 당신같은 건 신발 바닥에 붙은 껌이라고도 생각 안하거든요?"
"..네 녀석 거꾸로 매달아주는 수가 있다."
"우와, 껌이 말을 하네."
"소-우-고!"
"치잇, 아무튼, 뭐 그렇다고요."
드물게 소년같은 얼굴로 이죽거리는 옆얼굴에 그만 해결사에 대한 생각은 깨끗히 날아가고 대신 머리가 아파졌다. 어릴 때부터 봐온 동생같은 녀석이지만 언제봐도 폭언도 그렇고 도S인 성격도 그렇고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나는 댁같은 건 얼른 거꾸러져서 죽어줬음 좋겠고 댁이 없어지면 바로 부장이 될 거거든요?"
"너 지금 길 한복판에서 나하고 싸우자 이거냐?"
"아니 그렇다고요. 내가 당신보다 훨씬 더 곤도상 잘 챙겨줄 수 있고 능력도 더 낫다고 생각 안해요? 난 생각하거든요."
"소우고!"
또 녀석 특유의 독설인가 싶어 눈을 부라리는데, 아직도 앳된 티가 남은 얼굴에 싫은 기색 하나 띄우지 않고 녀석은 단숨에 내뱉어버렸다.
"놓고 가고 싶으면 놓고 가요. 내가 다 가져가 줄테니까."
-일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거칠게 뛰는 심장을 내리 눌렀다. 애써 태연한 척 눈을 부라렸다.
"무슨 헛소리냐, 소우고."
"..그냥, 그렇다고요."
시선 한번 마주치지 않고 말한 그 옆 얼굴을 보고 처음은 마음이 흔들렸고, 다음은 목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그 감정은 다른 무엇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부풀어오른 감정은 후덥지근하고 뜨거운 열이 배어있었다.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이를 악물었다.
"오키타."
"에?"
드물게 성으로 부르자, 딴청을 피우던 시선이 처음으로 이쪽을 향했다. 놀란 기색이 얼핏 스민 붉은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손은 허리춤의 검에 향해있었다. 소우고의 얼굴이 굳는 것을 보고 검을 뽑아들려던 손에서 겨우 힘을 뺐다. 그래도 아직 손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말했다.
"한번만 더 그런 헛소리하면, 죽는다."
"히지카타 상."
"얼른 가자. 저녁시간에 늦는다."
오키타의 굳은 얼굴에 아직도 어린애같은 당황한 표정이 번졌다. 그 얼굴을 노려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 히지카타는 서둘러 걸음을 뗐다. 드물게 얼어붙어있던 오키타가 종종걸음으로 쫓아왔다. 어깨 옆에 오키타의 기척이 따라 붙었을 때즈음 목보다 한뼘 아래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요."
"알면 됐어."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대답해버렸다. 오키타는 고개를 끄덕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걸었다. 둔영의 모습이 멀리서 눈에 들어와, 얼어붙었던 심장이 천천히 녹는 것을 느꼈다.
- 왁자지껄한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 대원들은 저마다 자신의 일과를 하러 흩어졌다. 얼마전 첩보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 야마자키는 적당히 구석에 자리잡고 앉아 보고서를 쓰기 위해 서책을 펴들었다. 한 켠에서 오키타가 칼을 손질하고 있긴 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오키타도 자신을 방해로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뭐 자기가 있는 줄 모른다고 해도 놀라진 않을 것이다. 붓을 빼어들고 첫문장을 생각하고 있는 찰나, 곁에 앉아있던 오키타가 말을 걸었다.
"야마자키."
"네?"
기척을 느끼긴 했던 모양이다. 고개를 들었지만 말을 걸어놓고도 오키타는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자신의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흠 하나 없이 날을 빛내는 검을 거듭해서 천으로 닦으면서 오키타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
"뭐가요?"
야마자키는 붓을 손에 든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키타는 침묵했다. 주어가 없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리도 없어 야마자키가 곤란해할 즈음에 오키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예?"
더더욱 알 수가 없어진 야마자키가 불안한 눈으로 오키타를 쳐다보았다. 내가 뭐 잘못했나. 아직 보고서는 쓰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배드민턴도 안했는데. 반찬을 더 많이 받아서 그랬나? 그건 급식당번이던 테라다 상이 더 준 건데. 머리 속으로 온갖 잡념이 붕붕 떠다니다가 질문이 잊혀지려 할 즈음, 오키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겠다'라고 하면 베어버리려고 했거든."
"대,대,대장님?!;"
펄쩍 뛴 야마자키가 뒷걸음질로 오키타의 반경에서 물러났다. 상대는 검의 달인이고 도S다. 도S건 검의 달인이건 위험하지만 그 둘이 합쳐지면 더 위험하다. 생명의 위협 비스끄무리한 걸 느끼고 있는 야마자키는 안중에도 없다는 양, 오키타는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그런데, 알 수가 없어져서."
"저,저는 다른 데서 쓸게요!!"
오키타의 말은 거의 귀에 들리지도 않은 채 야마자키는 서책을 집어들고 겁먹은 토끼처럼 방을 뛰쳐나갔다. 붓에서 떨어진 먹물이 다다미 위에 까만 얼룩을 남겼다. 오키타는 생각에 잠겨 다다미 위의 얼룩을 바라보았다. 그 얼룩 위로 히지카타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이를 악물고 화를 참던 얼굴이. 거짓이라고는 한톨도 없던, 그 얼굴이.
"-진짜, 알 수가 없어져서."
손을 놓을 것도 아니면서. 떠날 것도 아니면서. 불쾌해보이는 형씨의 얼굴이 히지카타의 얼굴 위로 겹쳐서 어른거리다가 사라졌다. 복잡한 마음에 이렇다할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겹칠 일이 없을 길을 서로 스치고 있는 그가, 그리고 그 사람이, 조금은 가엾다고 생각했다.
fin.
[#M_그리고 그의 방에서|접기|
저녁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른 채 방에 돌아왔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처소에 주저앉다시피 앉았다.
'놓고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내가 다 가져가 줄테니까.'
머리 속에서 다시 그 목소리가 울렸다. 어린아이같은 앳된 그 얼굴 위로, 그 목소리 위로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보여 숨이 멎을 것같다고 생각했다. 떨리는 손으로 검을 놓았다.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분노 뒤로 치밀었던 감정이 그때서야 숨을 타고 터져나왔다.
"네가, 그런 말을 하지마.."
그녀를 닮은 얼굴로, 그런 말을 하지마.
-바람같은 거 피우면 안돼. 꼭, 끝끝내 당신의 길을 걸어가야해.
이 곳을 떠나 살아가는 자신은 없다.
돌아갈 곳은 이 곳뿐이다.
오래 전에 결심한 마음을, 그렇게 확신으로 바꾸었다.
14.할미꽃 (Pasque flower) : 슬픈 추억, 충성
야밤의 뽐뿌질과 그 결과물(..) 오키타가 알게 되면 용서하는 마음 반 용서 못하는 마음 반. 마음 가는대로 가면 긴상과 히지카타 둘중 하나는 베어버리거나 할 것같은 혈기넘치는 청소년. 그리고 청소년의 고뇌.. 뭐 그렇습니다. 의외로 오키타는 누님에 대해서 히지카타가 부채가 있다는 생각은 전혀 안할 듯. 그냥 얘한테는 신선조=히지카타같은 거라 없어진다는 걸 생각할 수 없을 뿐.
당연히 히지카타는 죽으면 죽었지 떠날 생각 없습니다. 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