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오는 싱숭생숭하고 후기를 쓰자니 내가 지금 이벤트를 보고왔는지 꿈을 꾸고 왔는지 정신은 오락가락하고 어쨌든 업데이트는 하고 싶고 하다가 진-짜 심란한 꿈을 꾸고 일어나서 쓰다가 자폭하고 고리짝 시대의 유물을 하나 추가합니다. 근데 진짜 오래된 거네요. 십이국기 안주종은 늘 참 좋아합니다.
창 밖에는 거대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잡아먹는 화마의 불길. 그 속에 담긴 절규는 운해를 넘어 현영궁까지 닿았다. 흔들리는 바람 속에 섞여드는 피냄새. 절규와 원한.
"하아...하아..."
[...타이..호.]
숨이 가빠졌다. 사령들은 이미 나올 수 없게 되었다. 간신히 대답하고 있는 것은 리카크와 요크히뿐. 그마저도 곧 끊어질 듯 약한 응답뿐이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아득한 때가 겹쳐져,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엔키는 엷게 눈매를 휘었다. 피를 뒤집어썼던 그 때보다도 지금이 훨씬 심하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원한과 피냄새만큼으로 이렇게나 독에 오염되다니.
도대체 지금, 안은 어느 정도의 파멸에 둘러싸여있는 것일까.
스스로의 생각에 몸을 떨며 엔키는 전신을 내달리는 죽음의 감촉에 오한을 느꼈다.
<終>
- 덜컹.
침상에 누워 있는 엔키의 귀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엔키는 문을 연 사람이 누군지 쉽게 깨달았다. 지금 이 현영궁 내에서 살아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비단 그 것이 아니어도, 자신은 지독하게 긴 시간 동안 그 사람을 쫓아 걷지 않았던가.
...왕기가 아니어도, 이 사람을 찾을 수 있다.
"...쇼류."
"금새 알아채는군?"
사내는 시원하게 웃으며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문가에서 주저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엔키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안국의 현왕. 연왕 쇼류. 아수라장이 된 현영궁안에 남아있던 죽음같은 침묵과 암흑은 그의 주변을 침범하지 못했다. 밝은 기운을 바라보며 엔키는 울지 웃을지 모를 기분이 되었다.
"너, 피냄새가 나.."
"아아.. 다소 반란의 기운이 있었으니까."
엔키는 그 주동자가 누군지는 묻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었다. 쇼류는 돕겠다는 듯 손을 뻗었다. 피냄새가 지독하게 배어있는 그 손을 잡지 않은 채 엔키는 물끄러미 쇼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쇼류는 여전히 쓴 웃음을 띈 채 손을 거두었다. 엔키는 손을 거절한 채 전신을 감싸는 무기력함과 싸우며 스스로 상체를 일으켰다.
"..얼마나 죽일 거야?"
일단 눈을 마주치자,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물음도 쉽게 나왔다. 쇼류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침상 앞의 의자에 앉았다.
"전부."
"..전부?"
"그래."
"너.. 그게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거야? 지금 너와 똑같이 살아있는 사람들이라구. 그 하나하나가-"
"알고 있어."
비난조가 된 말을 자르며 쇼류는 여전히 그다운 웃음을 지었다. 작위적으로 지은 것도 아니다. 광기가 어려있지도 않았다. 그저, '그러기로 마음먹은 것뿐'이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엔키 자신이었다.
"알고 있으니까 지금까지 견뎌왔던 거다, 로쿠타."
"..그리고 더이상 이어나갈 수 없게 된 거고?"
"응."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에게는 한톨의 의구심도 없었다. 피에 젖었을 그의 너무나도 태연한 말투가 슬펐다. 천을 부여잡은 손에 희게 마디가 드러났다. 쇼류가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뭘 슬퍼하는 거야?"
엔키는 물끄러미 손을 내려다보았다. 소매 안쪽에서 들어난 팔도, 손도, 얼굴도, 그 어디에도 실도의 흔적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파멸의 징조가 기린에게 나타난 이후 서서히 미쳤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언제나와 마찬가지의 어조로, 너무도 갑작스럽게 쇼류는 끝을 정했다. 그리고 그 답게 끝을 향한 진행은 무섭도록 빨랐다. 철저한 파괴. 칙명은 파멸의 불꽃처럼 나라 곳곳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끝은 곧 다가왔다.. 기린이 실도에 걸릴 틈도 없는 짧은 순간이었다.
엔키는 팔로 눈가를 문질렀다.
"..시끄러워, 너 같은 바보왕은 몰라도 돼."
"정말, 어디까지가건 귀여움이 없는 기린이구만."
"주인닮아서 그래."
생각했던대로 눈물은 배어나오지 않았다. 한탄조로 어깨를 으쓱하는 쇼류에게 언제나와 같은 말투로 투덜거렸다. 통상적인 비난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맞이하고 싶었다.
찾아온 끝을.
쇼류가 새삼스럽다는 듯 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왜 찾아온 건지, 알고 있었나?"
"당연하잖아. 몇 년이나 네 뒷수발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몇 년으로 끝날 시간인가-하며 쇼류는 가볍게 웃었다. 파멸이 시작된 이후 그는 철저하게 측근들의 방문을 거절했다. 자신의 반신과도 같은 기린은 특히 그러했다. 울부짖는 소리가 운해를 넘어들려와도 엔키는 칙명으로 묶인 채 현영궁 자신의 방에서 나설 수 없었다.
이제와 쇼류가 찾아온다면, 한가지뿐인 것이다.
스릉-하는 소리와 함께 국왕의 보검은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깨끗한 검날이 푸르게 반짝였지만 그 곳에 들러붙어있는 원령의 기운에 엔키는 한순간 숨이 막혔다. 저 검으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일까. ..이제와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일까.
엔키는 눈을 감았다.
"..너무 늦게 찾아오는 게 아닌가 했어. 넌 내 죽음부터 시작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측근들도 전부 죽이고 말이지."
"..아아."
"너에게는 금족령을 내렸으니 모르고 있었겠군.슈코우들은 한참 전에 현영궁을 빠져나갔어. 말릴 수 없다고 판단이 선 건지도 모르지. 아마 후대 왕의 아래서 일하게 될거야.. 안의 재건을 위해서. ...'아직 살아있다면'의 이야기지만."
"그랬구나."
"경국쪽에서도 재건을 도와주겠다고 했었으니까, 아마 멸망하지는 않을 거야. 일단 가능한한은 철저하게 파괴할 생각이지만.. 사후의 문제까지 신경쓰고 싶지는 않군."
가볍게 말하는 어조는 아무런 꾸밈도 없었다. 쇼류는 한손에 검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허리에 찬 검집을 장난처럼 두드렸다. 금속에 손가락이 부딪혀 틱틱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울렸다. 요동도 없는 엔키를 보며 검을 쥔 국왕은 가볍게 웃었다. 쓴 웃음이었다. 침묵 속에서 쇼류는 자신의 검을 기다리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자신의 기린을 내려다보았다.지난 길고 길었던 삶동안 줄곧 함께 해왔던 반신. 광기에 휩쓸리지 않고 길을 벗어나지 않을 수 었었던 건 이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불쑥, 혼잣말을 하듯 쇼류가 중얼거렸다.
"...너를, 남겨두고 갈까하는데."
"..?!"
그는 뭐라고 한 것일까. 엔키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쇼류를 올려다보는 시선에는 방금 전의 평온한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불안함이 퍼지고 있었다. 그런 상대의 동요같은 건 모른다는 듯 쇼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계속 말했다.
"아직 좀 걸리겠지만.. 정말로 거의 다 끝났어. 일단 실도에 걸리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조금만 더 하고나면, 천제에게 청을 드리러 갈까하는데."
"왕위에서 물러나서..하겠다는 거야?"
"전례도 있었잖아. 벌써 한참이나 과거이야기지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흐리며 띄엄띄엄 물은 기색에 쇼류는 한 점 흔들림도 없이 가볍게 대답했다. 느긋하기까지한 어조였다. 그렇게 언제나 한결같은 녀석이라는 건 죽을만큼 잘알고 있었다. 전 경의 여왕 죠카크를 말하는 것인가- 확실히 그녀는 케이키를 남기고 스스로 죽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미친소리 하지마!!!"
엔키는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로쿠타?"
"내가.. 내가 왜 너를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작은 몸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있었던 것일까- 금빛의 눈동자가 분노로 타오를 것처럼 빛났다.지금까지의 파멸과는 어울리지 않는 조용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전신에서 독기가 쏟아져나왔다.
"이제와서.. 나를 두고가겠다고? 미친 소리 작작해!!"
"어이, 진정-"
"닥쳐!!"
엔키의 기세에 눌려 쇼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엔키는 침상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며 쇼류는 침을 삼켰다. 원한의 기운과 피냄새에 오염돼서, 움직일 수 있을리가 없다- 단지 의지의 힘만으로, 엔키는 움직이고 있었다.
자박. 자박.
맨발의 어린 발걸음소리가 울렸다. 죽도록 괴로울 움직임은 흔들림하나 없었지만, 지독하게 깊었던 기는 한발자국 옮길 때마다 사그러들고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리고 쇼류의 앞에 섰을 때즈음에는, 타오를 것같은 기운은 다 사라져있었다.
쇼류를 향해 손을 뻗지도 못한 채, 닿지도 못한 채, 엔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나를. 두고간다고?"
고개를 떨군 채 하는 말에는 물기가 배어있었다. 방금 전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게, 꺼질 듯한 연약한 목소리였다. 놀란 표정으로 쇼류는 자신의 허리춤까지밖에 오지 않는 기린을 내려다보았다.
"..로쿠타..?"
"나보고.. 다음 왕을 선택하라고?"
새로운 호를 받고, 그 왕을 보조하라고?
네가 죽은 후에도, 살아남아서?
의문같은 저항은 무엇하나 외치지 못한 채, 엔키는 고개를 떨구었다. 띄엄띄엄 울려나온 어조를 빼놓지 않고 들은 쇼류는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엔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이 닿기 전에 엔키는 고개를 들었다. 쇼류를 똑바로 쏘아보며, 엔키는 천천히 말했다.
"...기린은 왕이 진심으로 명령하면 거절할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지?"
"..아아."
"네가 진심으로 그 말을 한 거라면..."
나는, 네가 진심으로 명하면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말의 이면에 섞여든 의미를 안 것일까. 쇼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 얼굴에는 진지함이 배어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엔키는 자신의 안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에 떠밀리듯 입을 열었다. 스스로 중얼거리는 말에 눈가에서 맑은 눈물이 한방울, 맺혀 흘렀다.
"..너를 죽여서라도, 네 말에 거역해주겠어."
예상 외의 말에 쇼류는 눈을 크게 떴다. 기린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엔키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쇼류를 올려다보았다. 안의 파멸 앞에서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기린은 왕을 거역할 수 없다-. 오로지 왕의 뒤를 따르는 존재다. '기린'으로서 왕을 죽이는 일따위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지만.
"..네가 나를 죽여주지 않겠다면, 할 수 없잖아."
..나는 마지막까지 너를 따라가겠다고 맹세했으니까.
거의 꺼져갈 듯한 목소리였지만 어조를 분명히 하며, 엔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만큼, 필사적이었다. '뒤에 남겨'지는 자로서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기린으로서의 자신이 어떤 비명을 지르고 자신이 어떤 피에 젖을 지라도. 어떤 괴로움을 느끼게 될지라도. ..미쳐버린다고해도.
쇼류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멍한 얼굴이 되어버린 쇼류와 입술을 깨문 채 고집많은 아이처럼 입을 다물어버린 엔키 사이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하...하하하하..."
"..쇼류?"
"하..아하하하핫!!"
쇼류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의아한 엔키의 앞에서, 그 웃음은 이윽고 폭소로 변했다. 검을 움켜쥔 채 쇼류는 상체를 구부리고 쉴새없이 웃었다. 한참이나 계속되는 웃음을 들으며 엔키는 뭐가 뭔지 알 수없게 되어버렸다.
"아..아하하하하하!!! 미,미안..! 하,하하하..!!"
그런 엔키 앞에서 간신히 웃음을 멈춘 쇼류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방금 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진 여유로운 모습으로, 쇼류가 장난스레 말했다.
"내 기린이 이렇게나 충실할 줄은 몰랐거든."
"..떫냐!!"
엔키는 소리를 빽 질렀다. 그 것으로 의미심장했던 날카로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얼굴에 편안한 웃음을 지은 쇼류가 손을 뻗어 엔키의 금빛 머리칼을 부스스 흐트렸다.
"...미안했다."
"..."
"두고가지 않을게."
어깨 위에 두 팔을 얹은 채, 작은 머리를 감싸안고 고개를 숙인 쇼류가 속삭이듯 말했다. 엔키의 눈가에 다시금 핑글, 눈물이 돌았다. 숨막힐 듯한 피냄새가, 밝은 왕기에 사그러들어 어찌되어도 좋은듯한 느낌마저 들어버렸다.
...분명, 이 것은 기린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으로서 느끼는 감정이겠지.
"..같이 가자."
작은 어깨를 토닥인 손이 한순간 떨어졌다 싶더니, 엔키를 놓아준 쇼류가 미소지으며 손을 뻗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손을 바라보며, 엔키는 얼굴에 옅은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어디에서인가 타이호--하고 부르는 요크히의 울부짖음같은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걸로 좋아. 나는 기린이 아니라 로쿠타로서 죽겠어.
그에 개의치 않고 미소지으며 엔키는 눈 앞에 뻗어진 쇼류의 손을 붙잡았다.
아득한 과거, 처음만났을 때 이후로 줄곧 놓지 않았던 그 손을.
fin.
이게 언제쓴 거냐면요..
...긴토키씨가 말하는 그 시절이고 소라치 선생님이 입에 달고 살며 바보취급하던 그 시절입니다. 넵 그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