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빨리 자란다.
"티에리아, 결혼해줄래?"
때로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첨언하자면, 확언이 아니라 의문형인 쪽이 데미지가 더 컸다. 아홉 살짜리가 벌써 상대의 의견을 물을 줄 안다는 대견함이 처음에 솟아오르다가, 그 내용을 이해하는 순간 죄다 에너지로 바뀌어 머리 속에서 폭발했다. 의문형으로 물을만큼은, 다시 말해 상대의 허락을 요구할 만큼은 진지한 마음이었다는 소리다.
"...........왜?"
3초도 지나지 않는 짧은 순간 동안 뇌 속에 링크되어있던 모든 데이터에 수십개의 검색어("결혼","사춘기","9세 유아(女)","유사근친","일렉트라 콤플렉스","유아교육","아동학"etc)를 돌려 흝어봤음에도 티에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고작해야 저게 전부였다. 당혹감을 미처 숨기지도 못해 땀방울이 우수수 맺혀있는 말에도, 조그마한 꼬마숙녀는 고개를 갸웃한 채 당차게 대답했다.
"티에리아가 좋으니까!"
[좋아! 좋아!]
그 옆에서 귀를 파닥댄 하로를, 티에리아는 처음으로 부수고 싶어졌다. 참자, 참자. 누구의 유품인데. 톨레미의 중요한 동료이기도 하고. 겨우겨우 자기를 수습한 티에리아는 무릎을 구부리고 허리춤까지 오는 작은 소녀의 시야에 시선을 맞추었다. 붉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며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 꾹꾹 참으며 티에리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나도 크리스는 참 좋아하는데."
"그러면 문제 없겠네?!"
"그래도 안돼."
"..왜?"
실망한 듯 눈을 내리깐 아이가 삽시간에 울먹이기 시작하자 티에리아는 그만 전부 다 내던지고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어졌다. 아아, 베다. 어린아이란 왜 이리 창의적인 겁니까. 자기를 자제하려 손끝을 모아쥐고 속으로 심호흡을 한 후에서야 티에리아는 다시 크리스를 달랠 수 있었다.
"음, 첫째로 크리스가 너무 어려."
"10년만 기다려주면 나도 열 아홉인데?"
"그 나이도 아직 어린 것같은데."
"세츠나가 처음 건담에 탄 건 열 네살때라고 그랬는데?"
"누가 그거 알려줬어?"
"알렐루야가."
"..."
"때리거나 하면 안돼? 내가 물어봤단 말이야."
"안 때릴 거야. 좀.. 혼낼지는 모르겠지만."
"혼내는 것도 안되는데.."
"그럼 타이르기만 할게."
"응!"
다섯살 때 이미 건담의 프로그래밍 수식을 짜기 시작한 아이였지만 타이르다와 혼내다가 별 차이가 없다는 것까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럭저럭 말을 돌렸다 싶어 티에리아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을 때, 여전히 천진한 크리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이제 티에리아랑 결혼해도 돼?"
....다시 침몰. 티에리아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안돼."
"왜?!"
"나하고 크리스는 나이차이가 너무 많아."
"밀레이나 언니는 사랑만 있으면 괜찮댔어!"
.....그건 밀레이나가 특수한 거야, 크리스. 80대 노배우, 코넬리 나나스에의 사진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20대 소녀(그야말로 소녀다)를 생각하며 티에리아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크리스는 더 말할 게 있으면 말해보라는 듯 득의양양한-그야말로 어린애다운 눈동자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순수한 눈이다. 티에리아는 그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아이 특유의 달콤한 냄새가 나는 그 작은 어깨를 끌어안고, 티에리아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걸로는 안되는 것도 있는 거야."
필사적인 심정으로 고른 말이었지만 말하는 순간 실수였다고 깨달았다. 아이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좀 더 부드럽게 돌려 말하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을텐데, 나는 대체! 포옹을 풀고 크리스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아이의 붉은 눈동자에 눈물이 한방울 커다랗게 맺혀있었다. 결국 울렸구나. 자기혐오에 빠질 것같은 기분이 되서 티에리아는 아이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부딪혔다. 심정은 여전히 울고 싶었다.
"미안해. 하지만 나는 정말 안돼."
".........치사해, 티에리아."
울음기 어린 목소리에는 잔뜩 불만이 배어있었다. 그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머리 속이 엉망진창으로 섞여있었지만 이 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어떻게든 다독였다.
"저기, 그냥 나는 아빠 대신이라고 생각해주면 안될까?"
"...그런 아빠 대신은 필요없는 걸."
"크리스가 만나본 남자래봤자 얼마 없잖아. 나이가 들면 더 좋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해줄 수 있는 말이래봤자 고작 그런 것밖에 없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서, 더 이상 있다가는 아이와 함께 울어버릴 것같은 기분이 들어서 티에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거의 도피다. 등 뒤에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두 어걸음 걸었을 때, 쨍하고 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뭔가가 다리에 와서 처박혔다.
"..두고 봐!!"
[하로! 하로!]
엄청난 속도로 밀려와 부딪힌 건 아이가 끌어안고 있던 하로였다. 휘청한 몸이 공중에 떴다. 무중력 공간에서 이토록 적절한 힘을 넣어 핀 포인트를 맞추기는 어른도 쉽지 않은데 과연 우리 크리스는- 상황에 맞지 않게 팔불출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눈앞을 연보랏빛이 춤추듯 지나갔다. 크리스의 머리카락이다. 자리를 박차고 와서 순식간에 티에리아의 눈앞까지 떠오른 연보라색 폭풍- 크리스의 붉은 눈이 한순간 시야를 가득 매운다 싶더니, 그 조그만한 얼굴은 있는 힘껏 자신을 향해 입술을 들이박았다.
- 푸왁!
매력이고 자시고 아무 것도 없는 소리는 가까스로 피한 덕분에 입술이 아니라 뺨에서 났다. 치잇, 잇 사이로 내뱉은 크리스는 눈물이 방울방울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감히 시선을 맞출 수 없던 티에리아는 황급히 눈을 돌렸다.
"..10년 후에는 그런 소리 못하게 해줄 거야!!"
앵돌아진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은 후, 조그마한 소녀는 한 숨도 쉬지 않고 쏜살같이 복도의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무중력 공간에서 그렇게 뛰면 안된다니까, 크리스. 얼어붙은 뇌 한구석으로 부모다운 주의를 쏟아내고는, 티에리아는 그대로 복도에 침몰했다.
fin.
[#M_그리고 그 후에|접기|
"-엄청난 걸 봐버렸네?"
어린 숙녀에게 기습을 당한 장소는 절망하고 있기에도 영 좋은 장소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등 뒤에서 울린 매끄러운 목소리에 티에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콱콱콱 세 개 정도 잡았다. 편안하게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무엇 하나 다를 게 없는데도. -이가 갈리는 건 분명 상대가 그라서다. 돌아본 티에리아의 눈은 방금 전의 당혹이 어디로 갔냐는 양 가라앉아있었다.
"라일 디란디."
코드 네임은 록온 스트라토스. -두번째의. 복도 구석에서 나타난 갈색머리 청년은 눈부시게 고운 녹색 눈동자로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얄밉기 짝이 없다.
"훈련은 어떻게 하고 여기에-"
"지금 가는 길에 마주친 겁니다, 교관님. 여기는 모두가 이용가능한 복도잖아요. 난 그냥 나올 수 없었을 뿐이라고."
"무슨 뜻입니까?"
"고백신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상식은 있는 거지 뭐."
빙긋 웃은 장난기 어린 얼굴은 어딜 어떻게 뜯어봐도 20대 후반이상으로는 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30대 중반도 끝나가는 주제에 여전히 나이를 먹지 않은 표정은 청년은 고사하고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순진함까지 반짝반짝 묻어났다. 크리스와 지독히 닮은 그 얼굴에 순간 복잡한 심경이 들었지만 어린 숙녀와 달리 실컥 재미있어하고 있는 얼굴에까지 약해질 마음은 죽어도 들지 않았다. 뭐라 쏘아붙여줄까 고민하는 동안 쿡쿡 웃은 라일이 덧붙여서 말했다.
"나중에 하로한테 녹음 떠달라고 해도 돼?"
"그러기만 해보시죠. 라그랑쥬 지역을 포함한 전 우주에다 네 얼굴을 붙이고 1급 살인범으로 경계경보를 발령해드리겠습니다."
"무서운 소리를. 난 그냥 보관하면 재밌겠다 싶었을 뿐이라구? 교관님 첫 고백신이라고 타이틀 붙여서."
평소에는 바늘하나 없이 구는 티에리아가 빈틈을 보인 것이 퍽이나 재미있었는지 라일의 목소리는 유들유들하다못해 생기가 넘쳤다. 게다가 저 말은 절반쯤은 진심이리라. 놀리려는 티가 풀풀 나는 녹색 눈동자가 10만배는 얄미워보여서 티에리아는 이를 악 ]물었다.
"그거라면 크리스의 첫 고백 신이겠죠."
"첫 고백이었어? 좀 더 전에 했을 줄 알았는데."
"진지한 걸로는 최초였습니다."
"진지한 거였나?"
"당신이야 모르겠지만, 저는 압니다."
당신보다 백배는 더 저 애와 함께 있었으니까. 실컷 비꼬와줄 요량으로 내뱉은 말이었으나, 절반 이상은 사실이었다. 크리스가 태어나고 9년, '라일 디란디'가 자신의 딸과 마주한 시간은 다 합쳐야 티에리아의 발끝에도 못 미쳤다. 대화하고 놀아주는 시간을 모조리 포함해도 1년이나 될까. 아이가 조금씩 커갈수록 라일의 외면- 혹은 도피도 심해졌다. 그만큼 도망쳐다닌 남자였다. 아이에게 남아있는 아내의 그림자에게서. 기어이 그 사실에 질려 크리스의 염색한 머리를 본래의 색깔로 돌려버린 것은 티에리아도 펠트도 아닌 밀레이나였다. 어린 아이에게 얼마나 더 참게 할 생각이냐며 무섭게 화를 내던 밀레이나는 기어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는 라일의 따귀를 때렸었다. 성대하게 울음을 터트린 그녀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도망쳤던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티에리아는 알지 못했다. 그 후 그의 뒤를 쫓아간 세츠나라면 뭔가 말을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또다시 복잡한 기분이 되어버린 티에리아 앞에서, 여전히 안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있던 라일이 툭 내뱉었다.
"..그럼 앞으로 교관님이 아니라 사위라고 부를까?"
... 이 바보가!!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시죠! 지금 상황을 재대로 보긴 한 겁니까?!"
"아니, 당신은 크리스가 원하면 결국 질 것같더라구."
웃음기 어린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라일 앞에서 티에리아는 또 한번 폭발했다. 그가 이렇게도 자주 화를 내는 대상은, 지금에와서는 라일이 유일하다시피했다.
"..나중에 왠 놈팽이를 데리고 오면 버럭 화내면서 쫓아내는 게 제 역할입니다!!"
"그래?"
"크리스가 좋아한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테스트는 할 겁니다."
"어떤 조건인데?"
"지력으로는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보다 위, 완력으로는 알렐루야와 동급, 끈기로는 세츠나 이상, 재력으로는 톨레미 본함 구입가능정도면 될까요."
"어이, 어떤 먼치킨을 사위로 맞을 셈이야.."
"크리스를 데려갈 거면 그래야죠."
단호하게 끊는 어조는 아직도 노호의 기색이 남아있었지만 말투는 가라앉아있었다. 참고로 사윗감의 조건은 위에 더해서 '당신만한 외모'도 붙어있었지만 거기까지 말하기에는 상대의 반응이 눈에 보일 듯 선명해서 입을 콱 다물 생각이었다. 흉흉한 기색이 남은 티에리아를 보다가, 라일이 살풋 웃었다.
"역시, 네가 나보다 낫네."
"..지금이라도 바꿔줄 수 있습니다."
무뚝뚝한 대꾸는 적지않게 진심이었다. 아이를 대하는 법을 몰라서, 결국은 타인에게 그 자리를 내맡겨버린 가여운 남자에게 전하는.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 사양할게. 나한테는 무리고."
"......못난 사람."
"와, 그 말 꽤 아프네."
"빌어먹을 자식이라고 할까요, 그러면."
내뱉듯이 중얼거린 말도 진심이었으나, 오래 전에 무뎌진 남자는 그저 가만히 웃었다.
- 날이 서고 있는 것은 자신이다. 지난 세월에 대해서, 그의 태도에 대해서 여전히 냉정해지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다.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입안의 말에는 가시가 돋았다. 치미는 감정은 분노일까, 아니면. 어느 쪽이든 따지듯 내던진 목소리에는 그 감정이 배어있었다.
"언제까지 놓아주지 못할 생각입니까."
"글쎄, 언제까지일까."
라일은 장난처럼 말하고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양.
-지난 3년, 크리스가 원래의 머리색으로 돌아온 이후, 라일은 대놓고 자신의 딸을 피하다시피했었다. 어떤 말도 안 들린다는 양 무심하게 구는 아버지에게 크리스는 별다른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너무 당연해져서 오히려 상관없게 되버린 그런 일상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라일의 행동을 참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항상 화가 치밀었다. 과거를 끌어안고 놓지 못하는, 그 모습에.
"-어디까지 바보입니까!"
고함소리와 함께 분노가 터져나왔다. 티에리아는 기어코 상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러나 채 한 마디를 더 내뱉지 못하고 폭발한 감정은 찰나에 사그라들었다. 멱살을 부여잡힌 남자는 변함없는 얼굴로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가면처럼 맺힌 웃음이 입술끝에 맺힌 채 곤란한 듯 미소지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에 항상 가슴에 먹먹하게 솟는 감정이 분노만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뭐라고 부르더라, 이 감정을. 손에서 힘을 풀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게 미련만 넘쳐서, 결국 눈 앞의 것은 보지 못할 생각입니까."
"...미안해."
"나한테 미안해야할 일이 아닙니다.."
더듬더듬 주어삼키듯 입에 담은 말들이 구슬져 떨어졌다. 남자의 손이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그대로 그는 티에리아를 스쳐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대답은 바로 나왔으나 채 주워담지 못한 감정때문에 말꼬리는 무너져내리다시피했다. 목소리에 붙잡힌 듯 라일이 몇 걸음 앞서나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티에리아에게 보이지 않게, 라일이 웃었다. 서글픈 듯이.
"알고는 있어."
"..크리스는 자꾸 커갈 겁니다. 뒤늦게 후회해도 늦어요."
"안다니까."
"알고 있을 뿐이겠죠."
"부정은 못하겠지만."
지친듯한 어조에 힐난은 실리지 않았다. 라일이 묵묵히 듣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오래도록 시간이 쌓여가는 동안 익숙해진 방식이었다. 파도처럼 흔들렸던 감정이 빠져나가고 나자, 그 아래에는 목메인 진실만이 남았다. 가슴 속 무언가가 찔리는 것처럼 아팠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라일은, 앞으로도 누가 얼마나 사실을 들이대든 변함없이 자신의 딸을 어려워할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목 안에 맺혔던 말이 자연스럽게 밀려올라왔다
"-과거 때문에, 현재를 버릴 생각입니까."
. 라일의 대답이 멈추었다. 티에리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라일도 뒤돌아있었다. 시야가 마주친 순간 라일이 웃었다. 조금 지친듯한 미소였다. 돌아온 대답에, 순간 할말을 잃었다.
"-그게, 집안 내력이잖아."
두번 망설이지도 않고 라일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만 훈련하러 갈게. 쓸데없는 소리 안하고. 라일은 얼어붙은 티에리아 앞에서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두어걸음 걸어나가던 그는 문득 생각난듯 돌아보았다. 그보다 앞으로는 재대로 코드네임으로 불러줘.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빠져나온 말에 티에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혹은 눈치채지 못한 척 라일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명중률도 그렇고, 여러모로 '록온'다워졌다구, 나."
그 말을 끝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다했다는 양 록온은 정말로 몸을 돌려 떠나갔다. 남겨진 티에리아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추어있었다. 그의, 웃으며 말하는 그 목소리 뒤로, 무언가가 환영처럼 겹쳐졌다. 웃고, 다정하게 손을 내밀어주었던 남자의 얼굴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인간'을 보여주었던 그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 변함없을 것처럼 미소지었던 얼굴과, 그 미소 뒤에 가려진 채 깊게 침잠해있었던 깊고 깊은 독기까지 전부.
- 그도, 그와.
같은 것이다. 무엇하나 놓지 못하고, 무엇하나 쌓아올리지 못했던 그 사람과. 티에리아는 휘청이며 벽에 등을 기댔다. 입가에서 쓴 웃음이 배어나왔다. 자조어린 웃음이었다. 손을 들어 눈을 덮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에야, 항상 속에서 치밀어오를 듯 맺혀있었던 감정의 이름을 알았다. 분노라든가 답답함, 그런 것이 아니라.
안타까움이다.
그가 떠난 자리에 남아 티에리아는 오래도록 눈가를 덮은 채 서 있었다. 어둠이 그림자처럼 내려앉은 그 곳에는 아무도 오지 않아, 우는 자신을 들킬 일도 없었다.
fin.
어째 이쪽이 더 길어져버렸습니다.
요컨대 다메남 라일 디란디와 디란디 가에 휘달리는 티에리아가 보고싶었을 뿐입니다.(...)
아뉴 크리스티나 디란디 9세
머리는 얼마전부터 연보라색으로 되돌아온 상태. 어린시절 펠트가 그랬듯 하로와 같이 노는 일이 많음. 지금은 반비공식으로 밀레이나의 일을 돕고 있음. 그래봤자 어린아이라 놀이 대용정도. 여자아이인만큼 크면서 주로 케어해주는 건 여성 크루들. 톨레미 내에서 충분히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라일에 대해서는 막연히 아빠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친밀함은 못느끼는 상태. 상대가 자기를 어려워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고, 그 것에 대해 우울해하는 일도 있지만 티는 내지 않거나 무자각. 한 두번 라일에게 친해지려고 시도했지만 어색하게 끝나고, 티에리아를 포함해 함 내 분위기가 불편해진 것을 보고 그 후로는 아예 접촉을 하지 않는 편.
라일 디란디
마이스터로서는 전대 록온 못지 않은 수준으로 향상. 일밖에 모르는 남자입니다 컨셉. 크루들과는 그럭저럭 어울리지만 여전히 전대의 거리감은 있어서 애매모호. 어쨌든 동료. 아뉴가 커갈 수록 엄마를 닮아가는 것이 괴로워서 도저히 가까이할 수 없는 상태.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음. 지금은 되도록 마주치려하지 않는 정도. 식사시간도 일부러 틀리게 잡고, 멀리서 보거나 하로의 메모리 영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중. 처음에는 바보같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일과 훈련에 치인 바쁜 일상때문에 사고회로가 어느 정도 마비되어서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최내면 한 구석이 망가져있다는 사실은 깨닫고 있지만 그걸 포함해서 지금 상황에 만족중. 근 형이 자신을 멀리서 보기만 했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같은 기분.
_M#]* 주의사항
록온과 아뉴의 2세에 대한 망상 2차창작 포함.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