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교술의 4단계는 자기를 보이는 것, 호감을 표현하는 것.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것, 노려고가 애정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합니다만(진짜로 심리학책에 나온 내용) 자기를 내보이는 것, 이라는 첫번째 전제부터 굉장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냐면 용왕 99 동굴에 레벨 1에 동료도 없이 쳐들어가는 드퀘9 주인공같은 기분이랄까. 그렇게 끄집어낸 자기가 좋은 것일지 나쁜 것일지, 알 수가 없잖아요.
2. 상대를 좋아하면 항상 두근거리고 서툴러졌던 것같습니다. 동경한다거나 하면 더 그렇고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맘이 강해서 혼자 조바심 내다가 땅파고 들어가 나올 수 없는 그런 지경이 됩니다(먼눈) 그래서 저는 좋아지는 사람일 수록 다가가기 어려운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곁에 있는 사람이 싫다는 건 당연히 아니고, 동경하는 사람과 친애하는 사람의 차이라고 할까. 그런 의미로 카미야 히로시와 얼굴을 보게 된다면 두번다시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동경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어떻게 비칠지, 처음 용기를 냈다해도 그 후에 계속 고민하고 걱정하고 무서워하고 마음 졸이는 게 싫고 아파요. 이래서 내가 연애를 못하나-.-
3. 학교에서 과제를 하고 집에 귀가하니 10시 반이었습니다. 한시간만에 왔으니까 제법 빨리 온거지만, 얼마나 머리가 먹먹하던지요. 계속 레포트를 쓰고 있는 건 머리 속에 빵을 계속 쑤셔넣는 것같은 느낌입니다. 포만감이 차오르고 차오르다가 마비되는 그런 느낌. 배가 아니라 머리인 건 머리가 마비되거든요. 감각도 좀 틀려지고. 으으 힘들어라. 아직 하나가 남았으니 생각하든 써가든 뭐든 해야겠습니다만.
4. 로미오와 줄리엣을 들었습니다. 주연은 이시다 아키라와 카미야 히로시. 오랜만에 성우 사랑심이 솟아오른 기분이에요. 한동안은 거진 휴덕기미였는데. 이것도 필립 모리스의 영향일까나, 아니면 책 덕후심이 그쪽으로 옮겨간 걸까나. 하여간 사랑에 불타는 로미오는 이시다 아키라. 카미야 히로시는 줄리엣이라는 듣다가 뿜을 것같은 엄청난 캐스팅입니다. 끽해야 머큐시오라고 생각했는데! ..라고 생각했더니 빨간머리 앤 후속의 후속작이더라구요. 참고로 빨간머리 앤의 성우는 요나가 츠바사. 정말 굉장한 캐스팅이야..
5. 카미야상의 톤은 티에리아 여장톤(by 드라마시디)보다 살짝 더 자연스러운 소녀톤이었습니다. 그래도 남자목소리였다면 그건 그것대로 재밌었겠지만, 리리큐어 라디오 버젼보다는 살짝 높고 티에리아 여장톤보다는 살짝 낮은 톤인데, 여자목소리도 남자목소리도 아닌 그게 확실하게 소녀스러워서 깜짝놀랐어요. 하지만 대사의 대부분은 로미오가 말하고 있어서 줄리엣이 등장할 장면이 없었던 데다가 엔딩 편집을 폭풍 몰아침으로 해놔서 기대했던 대사들이 나오지 않은 건 좀 많이 아쉬웠습니다.
6. 개인적인 시디의 감상포인트는 카미야상보다도 오히려 대사 그 자체. 일본어로 옮겨진 고풍스러운 셰익스피어의 대사체 어조가 굉장히 맛깔스러웠습니다. 그야, 저 하늘의 별들도 빛을 잃을 듯한 그 뺨의 생기 어쩌구하는 부분은 과연 손발이 오그라듭니다만orz 아상의 연기는 전반적으로 최고였고 카미야상도 굉장했고, 머큐시오가 죽는 장면에서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캐퓰릿도 몬태규도 멸망해버려라." 독이 찬 대사가 저는 어지간히 취향인가봐요.. 그런 의미에서 "아아, 이 얼마나 고마운 단검인지. 이 가슴이 네 칼집이란다. 그분의 곁에서 잠들도록 해주렴." 라는 캡 고풍스러운 줄리엣 대사가 생략된 건 진짜 진짜 아쉬웠어요. 손발이 오글오글했던 소공녀 세이라를 보면서도 좋아했던 대사였는데ㅠㅠㅠ
7. 그런가하면 겁나게 시니컬한 프리토크의 두분. ..아니 그야 저도 어린소년소녀의 풋사랑이 오래 갈 것같진 않았지만 그렇게 담담하게 경솔한 태도였다고 할것까진orz 나쁘다는 게 아니라 '나한테는 무리'라는 분위기가 풀풀 나오는 대화였는데 납득하면서도 어른의 슬픔을 느꼈습니다. ..하기사 제가 열 세살이라도 3일만에 사랑에 빠지진 않을 것같긴합니다만, 그래도 그만큼 어려서 순수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좋지 않나요ㅠ
8. 시디 최후의 미스는 마지막 엔딩. 기껏 고풍스러운 대사 잘 살려놓고 어린아이 둘로 마무리라니 무슨 지거리야! 아니, 그.. 연기가 뭐랄까.. 남자가 여자연기하는 건 괜찮은데 성인톤이 아이목소리 내는 건 아무래도 듣기가 어려워서.. 그냥 원작을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대본으로.
9. 일기인지 드라마시디 감상인지. 아직 과제가 하나 남아있으니 씻고나서 하든지 해야겠습니다. 아니면 프린트라도 해가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