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짝사랑이었다. 같은 업계의 선배였던 남자는 상냥하고 온화했지만 엄격하고 진중했다. 일에 있어서는 한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아 귀신같은 형상을 한 그에게 힐책을 받으며 눈물을 삼키는 때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되겠다 싶을만큼 우울해져있을 때 '식사라도 할까'라며 자연스럽게 이끌어주는 것도 그였다. 마음에는 동경이 피어올랐다. 타인과의 관계가 서툴었던 자신이 유일하게 좋아해본 첫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감정이 사랑으로 바뀌는 것조차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웃으며 치고 지나간 어깨가 불에 덴듯 뜨거웠을 때서야 그 감정이 사랑임을 자각했다.
"만년필이야. 잘만 쓰면 만년은 간다니까, 네 손자의 손자까지는 쓸 수 있을 걸?"
생일날, 그런 말과 함께 그가 건네준 것은 푸른 색의 잉크가 들어있는 만년필이었다. 결코 싼 것이 아니었을 것을 가볍게 건네는 것에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 그런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그가 눈매를 휘며 웃었다. 왜 그래, 우리 사이에. 농담조의 목소리는 가늘고 희었다. 그렇게 명랑한 사람이었다.
"고..고맙습니다."
낯을 가리던 자신은 우물거리며 간신히 고맙다는 한마디를 내뱉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망가지기 전까지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게 생일선물이다? 비쌌다니까."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년을, 또 그 후를 말해주는 것에 눈물이 날 것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생일선물로 받은 그 만년필은 한번도 쓰여지지 않은 채, 언제나 가슴 포켓에 자리잡고 있었다. 농처럼 웃은 그가 결재 사인이라고 그걸로 한번 해보라 재촉했을 때도 어색하게 웃은 채 넘어갔다.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펜촉을 따라 고이는 푸른 잉크가 얼룩을 만들면, 그것으로 영영 그 것이 더럽혀질 것같았다. 부적으로 삼겠다고 말하자 그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면서도 싫지 않은 듯 웃었다. 언제부턴가 선배의 얼굴을 보면 울음이 날 것같다고, 그런 말이 입 속에서 밀려올라올 것같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평생 전할리도 없었을 그 짝사랑에 종말이 찾아온 것은 그가 약혼녀를 회사 사람들에게 소개한 다음 날이었다. 눈이 크고 소녀처럼 웃는 예쁜 사람이었다. 선배와는 대학시절부터 사귀어온 사이라고 했다. 좋은 사람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자신을 아무 것도 모르는 채 걱정해주었다. 괜찮다고 사양한 후 약속장소에서 빠져나와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화장실로 달려가자마자 그날 먹은 것을 모두 토해냈다. 변기 앞에 쓰러지듯 앉아 꺽꺽 울음을 터트렸다. 볼썽사나웠다. 한번 말해보지도 못한 채 끝나는 자신의 감정이 가여웠다. 할 수만 있었다면 그녀를 어디론가 치워버리고 싶었다. 목을 졸라 묻어버리기라도 하면 자신은 계속 선배와 함께 있을 수 있게 될까. 말도 안되는 질투심이었다. 여전히 양복 가슴 포켓에 걸려있는 만년필을 저도 모르게 잡아 뽑았다. 펜촉으로 손등을 찍었다. 심장 위에 켜켜이 맺힌 불쾌한 감정을 그렇게라도 지워버리고 싶었다. 펜촉 끝에 빨간 피가 솟아나고 푸른 잉크가 섞여 엉망진창이 되었다. 타일 바닥에 만년필을 떨어트린채, 상처난 손등을 붙잡고 또 미친듯이 오열했다. 사랑의 끝이었다.
선배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도 손등에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그는 손등의 상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서 걱정해주었다.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에게 나를 소개시켜주었다. -회사 후배에요. 좋은 녀석이라 도움이 많이 돼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밝았다. 그의 곁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여성이 아니었다면 마음은 좀더 밝았으리라.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눈치챈 것은 신부 뿐이었다.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처럼 맑은 눈에 가득 걱정을 담는 그녀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상처가 아픈 것뿐이라고 애써 변명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빨리 나았으면 좋겠네요. 진심으로 호의어린 목소리에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가슴 속으로 밀어넣었다. 예. 그래야죠. 그렇게 말하며 웃는 동안 마음 속에서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나을 리가 없어요. 절대로. 나을 리가 없다고요.
그 후로는 미친 것처럼 회사 일에 정진했다. 아내가 생긴 선배는 점심시간에 이따금씩 도시락을 싸왔다. -계란말이는 진짜 잘만들거든. 그렇게 말하며 사원 정식을 먹고 있던 내 식판 위로 그는 샛노란 계란말이를 잘라 나누어주었다.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그 것을 먹고는 의례적으로 맛있다고 칭찬해주었다. 그의 얼굴이 기쁨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고, 더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괴로운 심정이 되었다. 이미 끝난 사랑에 목을 멜 것은 없지 않냐고 그렇게 들려주면서도 가슴은 여전히 아팠다. 그가 딸아이의 사진을 지갑 속에 넣고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더 그랬다.
다음 해에 부서 이동이 있었다. 자신의 영업에서 총무과로의 이동이 발표되자 선배는 놀란 얼굴을 했다. 부서이동 신청을 낸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 것을 구태여 밝히지는 않았다. 그날 저녁은 그와 간단하게 술자리를 했다. 계속 파트너였는데 아쉽네. 진심으로 쓸쓸해하는 얼굴에 그렇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 감정이 어떻게 그와 달랐는지는,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죽어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선배는 아쉬워했다. 그런 그를, 좋은 회사 동료와 떨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처럼 가벼운 제스처로 가볍게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그 것이 그를 사랑한 6년 7개월동안 그와 닿은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렇게도, 멍청한 풋사랑이었던 것이다.
회계업무는 영업보다 훨씬 더 적성에 맞았다. 새로운 업무를 익히고 배우는 동안 선배와의 연락은 없었다. 의식적으로 피했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그에게서는 몇번 연락이 왔지만 바쁘다는 말로 거절했다. 그도 아쉽게 생각하면서도 굳이 약속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와의 거리도 벌어지고 부서 내에서도 안정감을 찾아갈 때즈음에, 부고 소식을 들었다. 선배의 상처 소식이었다.
상냥한 여성은 여전히 밝은 얼굴로 띠가 둘러진 사진 틀 속에서 웃고 있었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향냄새가 가득한 그 공간과 그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족 사진에서 잘라내 확대한 것처럼 보이는 그 사진이 위화감만을 더했다. 장례식장에 앉아있는 그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끌어안고 울고 있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 옆에서 절규하고 있었다. 그 곳에는 상실만이 가득했다. 딸을 잃은 어머니가 있었고 어머니를 잃은 어린 아기가 있었고, 아내를 잃은 남자가 있었다.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던 자신은 위선적이게도 남자의 옆 자리를 지켰다. 3일장이 끝나고 그와 한줌의 재가 된 그녀와 어린 아기만이 남았다. 그는 파리해진 얼굴로 딸을 끌어안은 채 울었다. 그녀의 재가 든 상자를 납골당에 안치하는 동안 그는 내내 울고 있었다.
납골당에서 돌아오는 길, 그의 어머니는 자신에게 그와 함께 있어달라고 말했다. 감사와 미안함을 더한 목소리에 기꺼이 응했다. 그의 신혼집에는 아직도 그의 아내의 분위기가 남아있었다. 그를 대신해서 우는 아이를 달래고 젖병을 물려주고 재울 때까지도 그는 상복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앉아있었다. 그의 겉옷을 벗기고 욕실로 들여보냈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죽은 사람처럼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옷을 벗겨 뜨거운 물에 밀어넣었다. 욕정은 일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 해주듯 머리를 감기고 몸을 씻기는 동안, 그는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이름만을 부르고 있었다. 커다란 타월로 몸을 둘둘 말아 거진 짊어지다시피하고 그를 방으로 옮겼다. 시간은 이미 새벽이었다.
침대 옆에 기대어 깜빡 졸다가 눈을 떴는데 침대 위에는 그가 없었다. 놀라서 일어났다. 방과 연결된 욕실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욕실문을 연 순간 머리가 하애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가 있었다. 그러나 놀란 것은 그 것때문이 아니었다. 날이 잘 선 면도날을 손목에 가져다대고 있었다. -선배.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그를 불렀다. 돌아본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아이를 생각해요. 그러면 안되잖아. 그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다가 구슬처럼 굴러 떨어졌다. 그가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없으면 난, 안돼.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 속에서 새빨간 불꽃이 튀었다. 그에게 달려들었다. 좁은 욕실 안에서 두 몸이 엉켰다. 그가 발작하듯 몸부림쳤다. 그 팔목을 거칠게 눌러서 손에 든 면도칼을 떨어트리게 했다. 타일에 부딪힌 그 것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여전히 몸부림치는 그를 욕실에서 끌어내 침대로 쓰러트렸다. 발버둥치는 몸을 찍어누르는 동안 머리에서 열이 달아올랐다. 어슴푸레한 방안에서 하얀 그의 몸이 가련하게도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터져나왔다. 발버둥치는 그를 몸으로 누른 채 끌어안았다. -그만해요, 제발. 자신의 애걸하는 목소리가 눈물로 막혔다. 그는 울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입을 입술로 막았다. 그 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몸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입술을 겹치기만 한 키스에서 혀를 얽는 키스로 넘어갔을 때, 그는 나를 떨쳐내지 않았다. 그도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린아이처럼 팔을 둘러왔다. 눈물이 쏟아져 시야가 흐려졌다. 쏟아진 눈물은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것을 혀끝으로 핥아올렸다. 싸늘하게 식은 몸 위로 애무가 이어지고, 허벅지 사이로 손을 밀어넣었다. 그는 겁에 질린 듯 몸을 떨었지만 떨쳐내지는 않았다. 아마, 자신을 상처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으리라. 서툰 애무 끝에 그 안으로 나를 밀어넣었을 때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그를 끌어안은 채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속삭이고 있었다. 묻어두었던 마음이 한꺼번에 폭발해서 쏟아져내리는 것처럼. 그는 열어 들뜬 것처럼 신음과 비명을 내뱉으면서도 계속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이름이었다.
아침이 왔을 때 그는 목이 쉬도록 운 끝에 기절하듯 잠들었다. 나는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옷을 추스리고 옆방으로 갔다. 비어있는 그녀의 방, 아기 침대에 그와 그녀의 딸만이 누워있었다. 눈을 뜬 아이는 입술을 실룩이며 울었다. 안아올려 토닥여주고, 따뜻한 젖병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나직하게 노래를 불러주자 아이는 칭얼거리지도 않고 금방 잠들었다. 그의 딸을 침상에 누이고, 그 곁에 앉아서 입을 막은 채 오래도록 울었다. 그가 일어나기 전에 집을 나오면서, 처음으로 가슴의 만년필을 꺼내서 쪽지에 글을 남겼다. -죄송합니다. 두번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쓸말들은 엉키다가 사라졌다. 한동안 고민하다가, 저도 모르게 한 문장을 덧붙여썼다. 거친 필체에 만년필에서 잉크가 새어나와 푸른 얼룩을 만들었다. 만년필에 얼룩이 생겼다. 그러나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랑합니다. 살아주세요. 제발.
만년필을 쪽지 옆에 내려놓고, 몸을 돌려 그 집에서 빠져나왔다. 몇 년간의 긴 동경과 사랑을 뒤로했다. 대로변까지 걸어오는 동안 목이 쉬도록 울었다. 새벽거리에는 사람들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문장 밑에 남은 얼룩은, 손등에 남아있는 푸른 색의 흉터와 닮아있었다.
지워지지 않을 흔적처럼, 그렇게.
fin
키워드 연성스레에서 달리다가 머리 속으로 스토리 하나가 완성되버린 이야기.
나중에 심심하거나 잉여하면 재대로 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잘 모르겠어요..
뒷 이야기는, 선배로부터 "만년필 놓고갔어. 손자의 손자까지 쓰라고했잖아."라고 전화가 오는 데서 끝납니다.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