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이후의 땅에서, 우리들은 태어났다.
생명이 사라진 공간에서는 죽음도 떠나간다. 눈을 뜬 곳은 죽음조차 떠나간, 영원 이후에 오는 폐허였다. 빛도 색도 없고 숨도 섞이지 못하는 그 메마르고 공허한 곳. 눈 앞에 비치는 세상은 온통 회색빛으로 죽어있었다. 그 공허와 망가진 장소 속에서, 눈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무한한 고독만이 또아리 틀고 있는 외로운 장소였다.
그 곳에서, '그'만이 선명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비치는 회색빛 땅 속에서, 그의 짙푸른 검은 빛만이 선명한 빛이 되어 눈에 박혔다. 가슴을 스미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먼저 눈물을 흘렸고, 말을 배우기도 전에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망가지고 무너진 세상 속에서, 인과율에도 끼어들지 못하는 불완전한 자들에게 그는 유일하게 세상과 얽힐 수 있는 그릇이었고 근원이었다.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귀감이었다. 그를 메운 우울과, 황폐함과, 악이, 어떤 장애가 되었을까.
-그만이, 유일했는데.
눈 앞에 펼쳐진 대지는 차갑게 식은 채로 굳어있었다. 나면서부터 익숙했던 풍경은 수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변하는 일 없이 멈추어선 채 있으리라. 이 황량하고 넓은 별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다. 공허와, 또 그만큼 케케묵어 숨막혀있는 외로움. 그 것이 이 곳의 전부가 아니었던가. 그 영원한 폐허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기대어 잠든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바람이 좋네요."
'그렇게 생각하니?'
"언제나 그랬는 걸요."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구나.'
잠든 그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 애써 미소지었다. 상냥한 그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가락은 언어로 칭할 수 없을 정도로 시커먼 무언가로 얼룩져있었다. '그 사람'은 결코 완전하지 않았다. 적의와 광기에 쥐어뜯긴 채 무너져 미쳐있는 그 영혼에서는 위험하고 위태로운 향기가 흘러나왔다. 쓸쓸한 독처럼. 그러나 자신은 그 사실을 조금도 싫어하지 않았다. 나면서부터 보아온 그는, 처음부터 망가진 채로 '그'였던 것이다.
"당신은 오늘같은 날이면 항상 늦게까지 잠에 들었죠."
'그렇지도 않았는데.'
"거짓말하지 말아요."
목소리는 달콤하다. 메마른 공기 중에서 그 것만이 젖은 물기를 띄우고 촉촉하게 흘러나간다.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런 당신 곁에서 다시 잠드는 걸 좋아했어요."
'다들 그랬던거구나. 몰랐었는데.'
"정말 몰랐었어요?"
'아마도.'
"무정한 사람."
웃음기 어린 말을 토해냈다. 애정어린 몸짓은 그의 뺨에서 머리카락으로 넘어갔다. 검은 머리카락은 망가진 풀숲처럼 버석버석해져있었다. 손끝에 어리는 침묵이 슬퍼져 인세니티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가만히 입속으로 말을 다시 굴렸다. '오늘은 바람이 좋네요.' 그에게 곧잘 건네는 말이었다. 무너진 선량한 조각들을 끌어모아 악으로 이어붙인듯한 그 검은 남자는, 그 말에만큼은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곤 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구나.'
상냥한, 상냥한 사람.
당신은 알고 있었죠.
인세니티는 품안의 그를 끌어안았다. 까슬까슬한 머리카락이, 독약과 같은 악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었다면, 생명이 있는 존재였다면 닿는 것만으로도 무너져내릴 그런 지독한 감정이었다. 이토록 무너져내렸으면서도, 부서졌으면서도, 그는 상냥했다. 느끼지 못하는 바람에 미소짓고, 보이지 않는 빛에 웃게 만들만큼.
"..나는 이 땅에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어요."
우리 모두가 그러했죠. 창조주인 당신이 만들어낸- 불완전하고 아득한 우리들은, 이 살아있었던 공간에는 끼어들 수 없어요. 이 세상은, 종말 이후에도 우리들을 부정하고 있으니까.
"이 곳이 망가진 땅이 아니었다면. 생명을 잃은 별이 아니었다면 나는 태어나지도 못했겠죠."
아니면 당신이 우리를 만들지 않았을까요. 감긴 눈꺼풀 위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인세니티는 눈을 감았다.
죽은 세상에서 태어난 것은 결코 끔찍한 일은 아니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그 멸망한 땅조차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한 때 생명이 약동하던 땅은 죽어서도 불완전한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아,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불완전한 육신은 죽어 사라진 미물처럼 땅을 기었다. 그 것이 전부였다. 이 별에서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태어난 곳은 종말 이후의 땅이었으나, 자신은 그 죽은 세상의 일부에도 편입되지 못하는 먼지같은 편린이었다.
"..그러니까, 당신만큼은 놓지 않을 거에요."
내뱉는 말은 확고한 의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을, 모두를 낳은 그만큼은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었다. 인과율에 거부하는 이 몸을 지상에 매어주는 단 하나의 존재였다. 모래처럼 무너져 흘러가버리는 모든 것들 중에서, 탁하고 지저분하게 섞인 모든 것들 중에서, 그만큼은 선명하게 살아있었다.
"당신은 나의 전부에요."
그의 어깨를 힘주어 끌어안은 채 고개를 묻었다. 입 안으로 담은 말은 피처럼 붉었고 눈에 비치는 기억은 아플 듯이 선명했다. 심장이 타서 떨어져나가는 괴로움 속에서도 끌어안은 팔을 놓지 않았다. 놓을 수 없었다. 단 하나 그러모아 쥐고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인세니티는 눈물 고인 눈으로, 창조주에게 사랑의 말을 속삭였다.
"당신만이, 우리들의 전부에요."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구나.'
눈을 감은 채 검게 침잠하던 그의 입술 사이로 과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눈물이 터져나와 인세니티는 그를 안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시야 너머에서 긴 화면들이 어지럽게 스쳐서 사라졌다.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 미쳐있던 눈동자. 서글픈 권유. 부탁. 혹은 명령. <나를 죽여주지 않겠니.> 거부할 수 없었던 창조주의 부탁이-명령이 눈 앞에서 맴돌다가 머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자신의 아이의 손에 목숨을 내맡기면서, 한없이 부서져있었던 그가 겨우 웃었다. 그러니 선택지는 없었다. 그러니, 잊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당신을 놓을 수가 있을까요. 불완전한 우리들이 가진, 단 하나의 빛이 당신이었는데. 죽은 시체의 손을 붙들었다. 여전히 검은 독이 배어 무너져내리고 있는 그 몸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원 속을 묵묵히 헤메게 될 무언가였다. 그 것은 영원히 그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었다.
무너져내린 영혼은 떠나갔어도, 그의 일부는 자신의 손에 남았다.
적어도 그 것만은.
고개를 들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영구히 이어질 고독과 공허뿐이다. 인세니티는 그 것을 마음껏 외면하기로 했다. 고독은 길었고 영원도 그만큼 길었다. 그 어딘가에서 죽음과 함께 무너져내릴 끝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사실을 외면한 채 품안의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조각을. 바람을. 종말 이후에 남아있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눈을 뜬 이 거부와 배척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손 안에 쥐고 갈 수 있는 것이었다.
fin.
Insanity(정신착란, 광기)
시엘 15권 감상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