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기가 시작하고 여전히 바빴다. 22학점이지만 5일제라 조금 여유롭기는 했다만. 교직 수업 다섯과목이라 좀 편할 만도 했다만, 경영은 두 과목을 들었고 알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개학하고 한동안을 학교와 집만을 왕복하면서 다닐만큼 바빴다.

2. 일요일인 오늘도 안 바쁘지 않은 날이었다. 다음 주 경영과목 하나는 휴강하게 되었고 80명 정원 수업에 출석을 어떻게 할까 이리저리 궁리하시던 교수님은 시원하게 주말에 보강을 택했고 팔자에도 없는 주말 강의를 나가게됐다. 수업은 즐거웠지만. 수업끝나고 방학동안 진행하던 프로젝트 파트 보강을 작업했다. 토요일에 작업했어야했는데 어찌어찌하다보니 다 못하고 늘어졌다. 게으름병이다. 5시부터 9시 반까지 작업했다. 일곱시쯤 되어서 퍼뜩 아침 먹고 아무 것도 암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침을 몇시에 먹었더라. 11시였나. 아, 열두시 반이다. 뭐 그럼 아주 많이 굶은 건 아니구나. 요즘 위가 소심해졌는지 허기가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다리가 핑 돌았다. 우와, 에너지 고갈. 사이보그여도 괜찮을지 모르지만 나는 건전지를 먹을 수 없는 인간이니까 먹을 것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오늘은 휴일이고 도서관 지하의 매점은 열려있을 손 싶지가 않다. 경비아저씨에게 여쭤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렇단다. 아래 신관의 매점은 열려있겠냐고 물어봤더니 그렇지 않겠냐며 전화를 걸어 확인해주셨다. 감사해라.

3.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고 룰루랄라 매점까지 내려갔다. 내 걸음으로는 왕복 10분쯤 걸린다. ..편도 10분인가? 그건 오바인감? 가는 길에 교수님과 통화를 해서 지금 작업중인 목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어찌어찌 전화를 끊고도 길은 절반이 남아있었다. 심즈를 할 때는 대권같은 집을 짓지만 내가 심이었으면 절대 4x6을 벗어나는 집에서는 살기 싫을거라 생각하며 매점으로 갔다. 커피우유랑 삼각김밥 두개. 평소에는 하나만 먹는데 오늘은 배가 좀 고팠나보다. 사들고 도서관으로 올라가서는 자리에 앉아 와구와구 먹고 드링킹했다. 탄수화물이 들어가니 몸에 힘이 돌았다. 배고픈 상태에서 밥을 먹으면 기운 나는 게 리얼하게 느껴져서 그 감각이 참 좋다.

4. 우유를 마시고 마우스를 움직이는데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뭐지 싶어 마우스에서 손을 떼니 가운데 손가락에서 경련이 일었다. 네우로냐, 내 주변에 네우로가 있는 거냐. 범인은 너다를 시도하고 있는 거냐. 손가락에 경련이 이는 게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덜덜더러덜덜덜. 보고서를 쓰다말고 검색해본 인터넷에는 분해되지 못한 젖산이 쌓여 일어나는 경련일 거라고 했다. 니가 그리 피로했나. 젖산보다는 한순간에 원샷 드링킹한 커피우유때문이 아닐까 싶었지만. 그 손가락으로 작업을 계속하고 9시 반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의점이 열려있는지 안열려있는지 전화까지 해서 확인해주신 도서관 경비 아저씨는 잘가라고 손을 흔들어주셨다. 고마워서 웃으면서 인사하고 나왔다.
 

5.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이었다. 웨지힐이라지만 10센티가 다되는 굽을 신고 걷기는 좀 불안했더라만, 그래도 마냥 즐거웠다. 종교계열인 학교에는 도무지 귀신이 있을 것같지 않아 새벽이어도 마음이 행복했더랬다. 저녁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신나게 휘파람을 불어가며 어두운 길을 걸어내려와 버스를 탔다. 비가 내려도 여름이라서 공기는 습기를 품은 채 묘하게 부풀어있고 얼굴은 끈적이는 그런 여름 밤이었다.맨얼굴로 나온 게 무척 즐거웠다.

6. 전철을 탔을 때 자리는 비어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닌텐도를 하고 있었다. 남자분이 손에 종이를 들고 섰다. 구걸이구나 생각했다. 평소 눈길을 주어본 적 없던 내가 괜히 시선이 간 건 그 분이 소심하고 조용하다 싶을 만큼 조심조심 행동했기 때문이다. 20대 중반이나 되었을 것같은 얼굴에 옷은 츄리닝 상의, 아래는 회색 면바지. 거지라고 하기에는 말쑥한 차임이었다. 손에 든 종이가 없엇다면, 그걸 내려놓지 않았으면 그냥 모른 체 지나갈 만한 그런 인상이었다. 좌석마다 빈자리에 종이 두 장씩을 올려놓은 그 분은 구석에 서서 잠시 기다렸다. 곁눈질로 힐끗 읽은 내용은 사랑의 집이 어쩌고 하는 평범한 내용이었다. 이 것도 진실일지 아닐지 어떻게 안담. 앵벌이 조직일 수도 있고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바라봤다. 문 앞에서 두 손을 마주 쥐고 나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는 사람은 참 조용해보였다. 잠깐 있다가 그 분은 자리에서 종이를 하나하나 걷었다. 내 앞좌석 종이를 모두 걷을 동안 그 분은 조용조용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무릎을 굽히고 종이를 집어들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리저리 흩어지며 와서 박히다가 흩어졌다. 내 옆 좌석에서 그 분은 종이를 품에 안고 눈 앞의 사람에게 깊이 인사했다. 깊이, 깊이, 그 것도 두 번.

7. 앵벌이에게 돈을 줄 때보다 안 줄 때가 훨씬 많은 나도 그 때즈음은 천원짜리 한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오늘의 나는 기분이 좋았다. 비오는 날 저녁 늦게까지 전철을 타고 저렇게 돌고 있을 그치가 안쓰러운 마음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는 조용하게 도움을 청했다. 소리 한번 내지르지 않고 담담히 기다리는 그 태도가 마음을 움직였지 싶다. 까짓거 거짓이면 어때, 천원짜리 한 장, 커피 한잔 값의 얄팍한 친절정도는 건네줄 수 있다 싶어지는 그런 기분으로. 천원짜리를 종이와 함께 건네며 엉겹결에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열심히 사세요, 뭐 그런 기분이었지 싶다. 돈과 종이를 받아든 그 분은 내 앞에 똑바로 서서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또 깊이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처음 한번은 나도 고개를 숙였고, 두번째에서는 쑥스러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8.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뭔가를 꺼내서 그 청년에게 건넨 건 그 때였다. 돈이엇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그 아저씨는 좌석을 더듬어서 뭔가를 집어들더니 손끝을 까딱까딱해서 그 청년을 불렀다. 돌아서려던 그가 돌아보자 아저씨는 삐뚜름이 턱짓으로 내려다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청년은 또 그 것을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았다. 아저씨는 턱을 들어올리고 팔짱을 낀 채 청년을 보고 있었다. 그 입술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동물원 원숭이에게 먹이를 던져주고서 재롱을 피워보라 내려다보는 것같은 그런 시선이었다. 옆에 있던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청년은 묵묵히 그 앞에서 또 두번, 깊이깊이 고개를 숙였다.

9. 그리고 그는 돌아서서 또 다음 칸으로 갔다. 어릴적부터 수없이 보던 거지, 앵벌이들을 봐오면서 처음으로 우울한 기분을 느꼈다. 내 옆의 아저씨는 동정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청년에게서 인사를 받고자 하는 기분에 그에게 돈을 건넸다. 이 것을 줄 테니 어디 네 인사를 받아보자는 양 그렇게 건넸다. 나는 쑥스러워 어쩔 줄 몰랐던 그의 인사를 아저씨는 사뭇 즐기고 있었다. 나였다면 견디지 못했을 그런 시선이었다. 청년은 묵묵히 그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깊게 인사를 했다.

10. 수십 수백번 거지를 보고 앵벌이를 봐왔지만 돌연 슬퍼진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나는 여러번 돈을 쥐어둘 때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받는 그 사람들은 어땠을까. 사람들은 그들에게 돈을 건네고, 그들은 자신의 무언가를 팔고 있었다. 불쌍한 모습이나 동정을 파는 게 아니었다. 자존심이었다.

11. 깊이 숙인 고개와 두 번의 인사. 제 손에 건네지는 무언가를 그들은 다만 받아들였다. 그 것을 주는 이의 감정이 어떠한들 동등한 사람이 아니라 적선을 받는 입장으로서 자신을 낮추는 순간에 그이들은 무언가를 어딘가에 버리고 왔을 것이다. 같은 사람으로서는 얼굴이 화끈거릴 것같은 조롱어린 태도에도, 필경 낯뜨거울 과도한 동정에도, 그 몸에 와서 박힐 것같은 시선들에도 그들은 다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안으로 밀어넣고 가라앉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깊고 깊은 두 번의 인사. 어떤 마음으로 그가 그 인사를 하고 있었을까. 진심으로 고마워했을까. 아니면 그냥 주어지는 것들을 조용히 받아들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냥 속으로 웃고 있었을까. 어느 쪽이든, 그 전철 안에서 그가 깊은 인사 두번을 남기고 돌아선 후에, 남은 나는 몹시 슬퍼졌다.
Posted by 네츠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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