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여자였다. 일평생을 남에게 주면서 살았다. 달라는 것은 흔쾌히 주었고 적선하는 거지는 지나치지 못했다. 손에 쥐고 살 필요있니. 죽으면 다 부질없는데.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처럼 가벼웠다. 누이는 헌신적이기보다는 소유욕이 없는 사람이었다. 적선할 수 없다면 버리기라도 해야했다. 산책이라도 갈 것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나가 몇 달씩 돌아오지 않는 일도 잦았다. 금방이라도 훌훌 날아가버릴 것같은 누이를 볼 때마다 불안하기도 하고 배 언저리가 눌려오는 것처럼 답답하기도 했다.
부평초같던 누이는 가족이면서도 항상 멀었다.그런 누이가 내가 결혼하던 날에 자기 저축을 다 헐어서 혼수용품을 해주었다.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지 않냐고 아내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고 나도 동의했다. 누이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을 때, 누이는 그 언제와 같은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손에 쥐고 살 필요있니. 죽으면 다 부질없는데. 그 목소리는 예전과 변함없이 바람같았다.
누이에게 남자가 생겼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사건이었다. 누이가 소개한 남자는 누이보다 여덟살이 많았다. 그의 팔짱을 끼고 웃고 있는 누이의 얼굴은 예전과 다름없이 가벼웠다. 그리고 조금 더 밝았다. 나이가 너무 많지 않느냐 농처럼 물었을 때, 누이는 꽃같이 웃으며 말했다. 여덟살이 대수니. 30년만 지나면 차이도 안날 걸. 농담같은 누이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안정감을 읽어냈다. 가족하고도 쉬이 약속을 하는 법이 없던 누이가 30년 후에도 그 남자와 있을 거라 웃고 있었다. 누이의 부평초같은 삶이 그렇게 땅에 뿌리를 뻗는 줄 알았다.
남자가 누이를 버리고 떠난 것은 세 달 후였다. 남자가 떠나간 방에서 위스키 한 병을 끌어안고 거듭 잔을 기울이던 누이는 목석처럼 푹 꺾여 쓰러졌다. -아내가 있더라. 나쁜 새끼. 취한 누이의 목소리는 울음같았다.
그로부터 딱 이주일이 지나고서, 누이는 또 바람처럼 허공에 발을 딛었다. 이런 세상에는 영영 질려버렸다는 양 누이는 아주 떠났다. 그 남자가 살았다던 22층 아파트 꼭대기에서 누이는 제 걸음을 내딛었다. 자살이었다. 아내에게 그 일이 밝혀져 이혼소송을 밟고 있다는 남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장례식장에 찾아왔다. ..무얼 요구하는 적이 없는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 목례하고 관 앞에서 떠났다. ..개새끼. 중얼거리며 누이의 얼굴을 보았다. 22층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 누이에는 장의사가 덧발랐을 분이 하얗게 내려앉아있었다. 이런 호사도 해보구. 누이가 봤다면 그렇게 웃었을 것이다.
바보같은 누이. 뿌리를 내릴 거면 좋은 땅에나 내리제.
손을 뻗어서 잠든 누이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몹시도 차가웠다. 쓴 맛이 입에 돌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 속에는 담배대신 반짝거리는 새 동전 하나가 들어있었다. 올해 발행된 새 오백원이었다. 손 위에 얌전이 올라앉은 그 것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상주의 자리를 내버려두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손님들이 가득찬 대기실에는 아직 자리를 비우지 않은 그 남자도 있었다. 개새끼야. 욕설이 입밖으로 새는 순간에 손도 그림처럼 날았다. 동전을 거머쥔 주먹이 남자의 왼쪽 턱을 날려버렸다. 이빨 몇개와 함께 피가 튀었다. 개새끼, 개새끼야. 울분은 폭포처럼 솟구쳤다. 남자의 양복에도 피가 튀었다. 상복에도 피가 튀었다. 가족과 친척들이 억지로 뜯어말리는 동안에도 날뛰면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단정하던 얼굴이 엉망진창이 된 남자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붉으죽죽해진 상복을 내일 입으라 하며 병원에서 준 예비분으로 갈아입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도 내 손은 그 오백원을 꾹 쥐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새동전에 뻘건 피가 말라붙어있었다. 입술을 짓씹으며 그 동전을 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누나야, 이거 챙겨가라.
저승가는 노잣돈이데이. 목 안쪽에서 울음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평생을 받아본 일 없이 살았던 누이의 손도 과연 이번만은 손사례치지 못했다. 동전을 쥔 손을 누이의 가슴 위로 다시 돌려놓았다. 바람같던 누이는 그 동전을 손에 쥔 채 까만 관에 붙박혀 앉아 영영 멀리 가버렸다. 화장터의 까만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바람에 섞여 사라졌다. 그 것을 멍하니 올려다보다 그 노잣돈이 누이에게 준 최초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물이 흘러나와 손등으로 썩썩 닦아냈다. 소금기로 버석거리는 뺨에 스치는 바람이 서늘하니 아팠다.
누이가 그 가볍던 삶에서 움켜쥐고 간 것은 그 동전의, 그 노잣돈의 무게가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