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끝에서부터 몽롱한 느낌이 전해오는 것을 느꼈다. 드러누워 올려다보는 천장의 불빛이 어렴풋이 흐렸다. 무겁고도 흐릿한 가운데 그 빛만이 선명했다. 그 날도 그러했다. 그 결혼식 날에도, 온통 흐린 시야 속에서 한 사람의 얼굴만이 보였다.
생각하면 그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던 때였다. 어릴 적부터 자신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부유한 가문의 딸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으며 귀족에게 어울리는 기품과 학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나라 전체에서 칭송받았던 뛰어난 외모까지. 모자람이 없는 인생이었고 군림하는 것이 당연한 삶이였다. 그리고 나의 그 찬란한 시기는 나라 제일의 유력자인 요슈아 싱크와 결혼식을 올리던 그 날에 정점을 이루었다.
자신에게 요슈아 싱크라는 남자는 항상 특별한 존재였다. 그가 유력자가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관심을 갖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를 본 순간부터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처음 말을 건넸을 때 자신은 길카타르의 여인다운 정복욕같은 것마저 느끼고 있었다. 능수능란한 사교술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가웠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냉소적인 옆얼굴. 요슈아는 그런 남자였다. 자신만큼은 그에게서 다른 눈빛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그런 류의 남자.
가문의 혼담이 오가고 그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던 그 날의 자신은 그야말로 빛나고 있었다. 누구도 그의 배필이 되는 자신에게서 흠을 잡아내지 못했고 누구도 나의 배필이 될 그에게서 흠을 잡아내지 못했다. 길카타르의 태양은 찬란했다. 그 아래 선 자신은-그리고 그는 가장 완벽한 한 쌍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 날 밤까지 자신은 여전히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어떻게 형용할 수 있을까. 한없이 싸늘했던 그의 손을. 해야할 일을 하는 것처럼 무감각했던 태도들을. 침대 위의 여자를 내버려두고 자신의 침실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며 굴욕감에 입술을 짓씹었다. 그 어떤 추종자도 함부로 손 대지 못했던 자신이었다. 만나온 어떤 남자도 이토록 생소하고 무심한 태도로 자신을 다루지는 않았다. 가장 완벽해야할 상대와의 밤이 이토록 굴욕적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높은 프라이드는 울음을 터트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못해 자신은 그저 그 곳에 붙박힌 듯 앉아 그 깊은 밤을 보냈다.
그 후부터 나의 찬란하던 시기는 돌연 암흑기를 맞이했다. '카밀라 싱크'에게 주어지는 외부의 시선은 차가웠다. 자신은 궁 안의 사교장에는 거의 나가는 일이 없었다. 과거처럼 무조건적인 칭송도 사라졌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기반을 잡으려 애써도 그 방패막이가 되어주어야할 남자는 한없이 무심했다. 특별히 싫어하거나 거부감을 보이는 것조차 아니었다. 그저 한없이 무감정했을 뿐이다.
거부할 수도 있었다. 파혼을 선언할 수도 있었다. '카밀라'는 그런 여자였다. 절대로 무시받을 수 없는 여자였다. 오만하고 당당하고 아름다운 한송이 장미. 독의 가시를 갖고 있는 눈부신 여인. 그러한 칭호에 걸맞는 자신은 응당 그에게도 그렇게 대했어야했다. 자신을 돌이나 인형처럼 대하는 그 싸늘한 남자를 버리고 돌아서야했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를 처음본 그 때부터, 그 냉소적인 얼굴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 차가운 남자를. 돌처럼 싸늘한 남자를. 그 자신도 어쩌지 못할 정도의 열정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했다.
'엘더 베일'의 존재를 알았을 때는 모든 것이 늦은 후였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무도회장이었다. 토탐 베일의 옆자리에 서서 어린 소녀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그의 아내는 시선을 줄만한 대상도 못되었다. 그녀는 길카타르의 미학에는 어울리지 않는 연약한 사람이었다. 토탐 베일이 만들어주는 두터운 방호벽이 없다면 길카타르의 무도회장에는 얼굴도 내밀 수 없으리라. 그녀는 순전히 남편에게 의지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꽃 사이에 들풀이 섞여든 것같은 느낌을 주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저 그녀가 토탐에게 보내는 신뢰와 애정의 눈빛, 그리고 토탐이 짓는 미소- 그 것만이 시선이 갔다. 가슴에 고이는 감정을 지우려 요슈아를 돌아보았을 때야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다.
토탐 베일의 여자를 바라보는 요슈아 싱크의 얼굴은 한번이 부드러웠다. 그 차갑던 얼굴에 열기가 돌고, 무심하던 시선에 열정이 빛나고 있었다. 애잔한 시선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돌처럼 차갑고 싸늘한 나의 남자는 다른 여자에게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조차 댈 수 없는 물 속의 달에게 사랑을 바치는 밤의 신처럼. 그렇게 서글프도록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 심정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것이 되어야할 남자였다. 그 남자가 다른 여인을 보고 있었다. 결코 손을 대지 못할 여인을. 사랑할 수 없을 여인을. 그 무도회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사람을 풀어 요슈아의 과거를 조사했다. 그와 얽힌 그녀의 이름은 지금껏 몰랐던 것이 우스웠을만큼 선명했다. 모든 것이 너무도 명확했다. 그는 엘더를 사랑했고, 엘더는 그를 택하지 않았다.
망가지는 것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분노로 소리쳐도 그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감정조차 떠오르지 않은, 그 지극히도 차가운 얼굴을 보며 무너지는 자신을 느꼈다. 길카타르의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자신도, 그의 아들인 스튜어트도 그의 '가족'에 포함되지 않았다. 화를 내도, 울어도, 매달려도 그는 한결같이 그녀를 쫓아 자신을 두고 떠나갔다. 그는 일생동안 한 사람만을 쫓았고 한사람만을 사랑했다. 자신을 놓아버린 그 여자, 엘더 베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길고 서러운 세월을, 그 고난을. 그 남자는 필경 알지 못했으리라. 무너져가는 마음도, 좀먹어가는 심장도 그의 눈에는 비치지조차 않았을테니.
그 상처를 알아주려한 게 너라니, 얄궂은 일이지. 엘더.
요슈아의 시선을 뺏어간 여자는 첫 인상 그대로 들꽃같은 여자였다. 마력도 체력도 무엇도 없는 그 약해빠진 중소귀족의 딸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힐난을 바람이라도 되는 것마냥 넘겼다. 사람을 평온하게 만드는 그런 여자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향한 증오도 힘을 잃어갔다. 그 외로운 곳에서 이 여자만이 자신과 마주보는 유일한 상대였던 것이다.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이 그저 만남만을 거듭하던 그 시기는 묘하게도 평온했다.
그녀가 숨을 거둔 것은 1년 전이다. 그 날, 자신은 엘더 베일의 침상 옆에 서 있었다.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던 여인이 고한 최후의 말. 이별의 인사. 그녀는 수척하진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카밀라, 나는->
그 마지막 순간에, 그녀가 했던 말에 자신은 문득 깨달았던 것도 같았다. 그녀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무슨 마음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연약하고 가녀린 그 들꽃 또한 길카타르의 여자였던 것이다. 그 순간 자신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엘더 베일의 죽음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엘더. 너는 나만큼이나 잔인했어. 재멋대로였고, 이기로 가득 차 있었지.
..그래도 나는, 당신에게 대답을 돌려줬어야 했을까.
아니, 그럴 수는 없었어. 나에게는 당신에게 돌려줄 말같은 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나는 변하지 않았어. 당신이 그렇게 떠난 뒤에도 당신의 죽음보다 요슈아가 더 중요했어. 당신의 죽음으로 상처입은 그 남자가 나를 보는 시선이 어땠는지, 그 걸 말해준다면 당신은 또 슬픈 얼굴을 하겠지. 엘더. 믿겨져? 내 남편은 당신의 죽음을 전해듣고 망연해하는 동시에 나를 보았어. 그 눈빛이 내게 묻고 있었지. 내가 당신을 죽인 게 아니냐고. 당신의 그 무서운 질투가 그녀를 죽인 것은 아니냐고.
그 스스로도 입에 담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그는 나를 증오하지 못했어. 두려워하고 있었지. 자기가 생각한 그 것이 사실일까봐 겁을 내고 있었어. 그 유능하고 냉소적인 남자가. 웃기지도 않았어. 하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내버려둔 채 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떴어. ..그 남자가, 그렇게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본 건 처음이었거든.
고백할게, 엘더. 그가 나를 보던 그 눈빛이, 그 증오와 의구심과 슬픔이 뒤섞인 눈빛이, 손끝에서부터 전율이 일만큼 기뻤어.
어리석다고 하겠어? 뭐라고 불러도 좋아. 그건 그 남자가 나를 자신의 시야에 담은 최초의 순간이었어. 나를 절대로 잊지 않을, 잊지 못할 그런 눈으로 나를 봤지. 일생을 당신만을 쫓아 살았던 그 어리석은 남자가. 자신의 아내였던 나는 일평생 무시하며 살았던 그 남자가 '엘더 베일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여자'가 된 나는 똑바로 바라봤어. 얼마나 어리석고도 비참한 일인지.
엘더, 엘더, 엘더 베일.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친우라 부를 수도 있었지. 그렇게 하지 않았어. 당신과 친애의 정을 나누기에, 나의 이 심장은 한 남자의 이름으로만 가득 차 있었으니. 그랬던 나에게 당신은 자신의 최후를 보여줬어. 잔혹하게도 너 또한 길카타르의 여자였지.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줄 아는 길카타르의 여자였어. 덕분에 요슈아 싱크만을 보아왔던 지난 10여년에 너라는 이름 하나를 더하게 되더군. 네가 원한 게 이것이었다면- 더할 나위없는 결말이었어.
나는 내 아이도, 내 가족도, 나의 이름도, 무엇하나 신경쓰지 않겠어. 남겨진 자는 물론이고 이미 이 곳에 없는 당신까지 말려들게 할 더러운 오명들에도 굴하지 않겠어. 나는 그저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어.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그 남자를 깊게 상처입힐 수 있기를.
마지막 목소리도, 해명도, 무엇 하나 남기지 않겠어. 오물로 범벅이 된채 썩어가는 내 시체를 그 남자가 보기를 바래. 당신과 같은 날에 당신과 같은 방법으로 죽었다고 그 남자가 생각하길 바래.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을 마주하고 그 자신이 처한 잔혹한 현실에 피눈물을 쏟기를. 그의 가슴에 내가 상처가 되기를. 추하고 더러운 모든 것들을 빈틈없이 마주해 당신만을 보고 살아온 그 남자의 심장에 커다란 흉터가 남기를.
절대로 나를 잊을 수 없도록. 당신의 이름 옆에 마지막까지 나라는 얼룩이 달라붙도록. 빛나고 있지 않아도 좋아. 추한 흉터자국이어도 좋아. 내가 당신을 상처로 기억하듯 그가 나를 잊지 못했으면 해.
당신이 내게 주었던 해답을, 지금 나는 그에게 돌려주겠어.
- 그러니까 엘더. 이건 네 덕분이야.
입속으로 중얼거린 여자의 이름에서는, 여전히 서글픈 쓴 맛이 났다.
fin.
아라로즈 패러디. ..라고 해나되도 싶지만. 카밀라와 엘더의 미묘한 관계가 좋습니다.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