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백합니다.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싫어합니다. 엄청 싫어합니다. 무지막지 싫어합니다. 고로 이 아래는 싸그리 다 일방적인 비판입니다.


2. 제가 처음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를 읽은 건 한창 요시모토 바나나를 계기로 흔히 1차 일본 소설 붐이라 불리며 국내에 대량으로 소개된 일본 작가의 글들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때입니다. 당시 초등학교 5,6학년 정도였어요.

3. 당시 저에게 바나나는 정말 반짝반짝 거리는 달빛같은 책이었습니다. 어린애의 감성이 보는 그 책은 전체가 아닌 파편으로 눈에 들어왔어요. 냉장고에 기대어 잠드는 모습이라고 할지, 그 모든 분위기가 따뜻하고 몽환적인 달빛같았습니다. 나중에 좀 더 커서 원서를 읽고 나서는 아아, 이건 연애소설이었구나.. 하고 그 때 느낀 빛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어린 제가 본 바나나는 반짝이는 빛이었어요. 지금은 그만치 좋아할 수 없어 슬프지만, 아마 그 때 작가가 문체에 담고 싶었던 빛에는 굉장히 매혹됐었다고 생각합니다.

4. 그리고 어린 제가 본 하루키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가 그 개요였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평을 찾아보면서, 하루키는 적어도 대학생이 된 후에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는 평을 들었죠. 저는 섹스만하며 돌아다니는 부평초같은 남자의 우울한 삶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린애였던지라 그럼 그 때까지 묵혀두자, 하고 그 책을 소중히 책장에 꽂아두었습니다. 저는 그 때, 이 책도 언젠가 그 당시의 바나나처럼 빛날 줄 알았어요.

5.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에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을 샀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이 사람의 글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그 때는 이미 바나나의 빛이 바래버려 우울해지던 때였습니다. 원서에서 미즈키와 에리코 씨와 류이치는(이름도 헷갈립니다) 서로 미묘한 선을 그리며 겹쳐졌었고 마지막 긴 길을 달려간 여주인공은 그에게 사랑한다는 의미를 전하고, 남자는 그녀에게 돌아와요. 글을 보는 시선은 확실히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문장에 홀리는 만큼 전반의 내용을 읽을 수 있게 됐고- 어, 그리고 국내 번역이 문체를 옮기는 데에 열중하는 바람에 그 의미를 잃었구나 정도는 생각할 수 있게 됐어요.  토마토를 보는 벅찬 심정이 류이치를 좋아한다던 여자보다 더 눈에 들어오고 울며 칼을 휘두를지도 모르는데 괜찮아요?가 한국식으로 하면 "이제 제발 그만좀해! 나라고 그런 걸 못 느끼는 줄 알아?! 나도 지금 미칠 것같아!!"라는 의미이자 "더 할 말 있으면 찔러버릴지도 몰라. 나가"라는 뜻이라는 것도 알게 됐죠. 덕분에 빛나던 무언가를 잃은 느낌은 들었지만요. 그래서 저는 중학교 이후로 암리타를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영원이 보였다던 그 문장이 무너져내리면 슬플 것같아서. 
그건 그렇다치고 이 때에 다시 하루키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번역된 문장 위에 일문을 떠올리며 덧씌워보아도, 거기에는 도무지 형태가 없었습니다. 작중의 사람들은 고뇌하고, 슬퍼하거나 공허해하고, 무감각해하고, 거기서 끝입니다. 끝, 커튼 콜은 없습니다. 안녕히.

6. 그 때부터 저는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몇 번 더 책을 읽어볼 기회는 있었지만 매번 모든 내용은 같았어요. 남자는 방황하고, 여자들을 만나고, 섹스하고, 마음은 공허하고, 그는 또 혼자남아 고독을 곰씹으며 세상을 흘러가는 잡초처럼 살 거나 혹은 상처입은 짐승처럼 몸을 웅크립니다. 간혹 남자가 아닌 여자가 되었어도 등장인줄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갈구하고, 상황이 변하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고, 그저 끝까지 웅크리고앉아 마지막을 보는 거에요.

7. 대학생이 되었고, 당시 "대학생이어야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었던 책을 읽어도 되는 나이가 되었으니 말하겠습니다. 자아도취좀 작작하세요.

8. 제가 이 사람의 소설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담고자 하는 것에 어떤 지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인공등의 입을 빌려 끊임없이 고독을 말하고 공허를 말하고 상실을 이야기해요. 근 10년동안 넘게 제가 봐온 하루키는 줄곧 같은 소리를 해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 대답도 변화도 없습니다. 클리셰처럼 굳어진 말들만 서로 다른 어조로 반복될 뿐이죠. 니미, 할 거면 좀 그럴싸하게나 하든가. 비둘기와 향수와 콘트라베이스는 똑같이 외롭고 혼자이길 바라고 뒤틀린 한작가의 머리 속에서 나온 말이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배젼하고 있습니다. 좀머씨 이야기는 하루키와 똑같이 독자에게 미친듯이 불친절하게, 작가 자신이 하고 싶은 목소리만을 죽어라, 일관적으로 반복해서 냈지만 그걸 곱씹고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하루키의 외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습니다. 외롭다, 공허하다, 혼자다, 방황한다, 상실한다...

9. 작작 좀 해!!!!

10. 토니 타키타니는 그러한 작가의 취향과 클리셰를 남김없이 모은 단편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부평초처럼 떠도는 아버지는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자고, 한 여자를 만난 후 그 여자 이후 새로운 사람을 만들지 않았지만 그 여자만을 딱히 사랑한 것도 아니었죠.(이 시점에서 이미 뭐 임마가 나옵니다) 흘러간 재즈 레코트라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좋아하는-_- 대상까지 그대로 물려받은 이 작가의 페르소나 타키타니 쇼자부로는 그 자신의 페르소나를 아들에게 그대로 옮깁니다. 집안도 빵빵하고 금전적으로 손해보는 일 없이 부유하게 자랐음에도 토니에게는 공허가 있고 그는 그 것이 외롭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다가, 한눈에 빠져든 여자를 보는 순간 처음으로 타인과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녀와 함께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말과 자신의 욕망(옷)사이에서 방황하는 순간에 죽음을 맞고 토니는 다시 혼자가 됩니다. 그녀와 비슷한 얼굴, 비슷한 몸매를 하고 그녀의 방에서 울음을 토했던 여자를 보고 토니는 다시 손을 내밀어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마저 생각에 그칠 뿐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 채 그는 가지고 있는, 남겨진 모든 것을 버리고 혼자가 됩니다.

11. 돈도 있고 여자도 있고 집도 있고 인기도 있는데 공허하다네요. 게다가 15년 나이차가 어색하지 않은 멋진 청년이랍니다. 그런데 하여간 공허하다고 하네요. 아버지가 무심한 인간이었고 서툴었던 아들은 그 것을 그대로 이어받았답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처음으로 감정을 깨닫지만 그 여자를 잃고서는, 더 채워지려 하지 못하고 모든 유품을 처분하고 혼자 살아간다네요. 드림소설쓰냐?

12. 정말 웃긴게, 공허와 상실로 가득한 성격이라는 남자에게 주어진 것들이 완벽하다는 것입니다. 귀중한 수천장의 재즈 레코드(필경 작가의 취향일), 집과 자동차, 저축된 금액, 약속된 성공. 그렇게 이것저것 다 주어놓고서 "나는 외롭고 공허하며 슬프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태어나 자라온 인간이기 때문이다"라니 드림질도 작작 좀 해!!!

13. 정말 그런 사람이 없을 수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캐릭터만 10년도 넘게 줄기차게 써왔다면 이건 자가반복을 넘어서는 자아분열입니다. 볼때마다 이 작가는 자신이 가진 어떤 외로운 부분을 멋있게 포장해서 사람들 사이에 배설물을 쏟아놓는 것같아요. 공허와 상실을 부르짖지만 절대로 그걸 채우거나, 채울 수 있는 순간을 제공하지 않는 건 그게 하루키가 쏟은 감정의 배설물이기 때문입니다. 장담해도 좋은데 이 사람 상실을 채워야한다는 생각은 절대 안하고 있을 걸요. 해답도 필요없이 그 순간의 감정을 쏟아내서 글로 만듭니다. 답도 절도 없는 그 곳에서 나름대로의 희망찬 대답을 이끌어내거나 우울한 결말을 곱씹으며 좀 쓸만한 피드백을 떠올리려면 독자는 머리 쥐어짜고 자가발전을 시도해야되고요. 작가는 거기에 대한 어떤 말을 전하려는 게 아니라 그 곳에서 머물러있는 서글픈 모습을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겠죠. 중2병 환타지 드림소설도 아니고 수십권 썼으면 슬슬 좀 벗어나 길을 마련하란 말입니다. 뭐가 이렇게 미친듯이 발전이 없답니까?

14. 토니 타키타니는 사랑했던 여자와의 이별을 통해 상실을 경험했고, 영화에서는 전약혼자라는-_- 겁나 구태의연한 캐릭터를 만들어 그 캐릭터 이름을 불러 외쳤던대로 그 상실을 통해 "자신이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온 재미없는 남자"라는 걸 알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알고도 혼자가 된 채 끝나요. 문제점을 알고도 그걸 내버려두고 웅크리면 그 게 멋지답니까? 수백번 주창한 말을 한번 더 하면 있어보인답니까? 그렇게 자아에 틀어박힌 인간을, 자아의 방황을 줄창 묘사해왔으면 이제 그만 세상 속으로 나가 사람들을 좀 만나는 엔딩으로 돌려보라고요. 그걸 못하겠으면 여성과의 섹스, 재즈 레코트, 오래되고 값비싼 술, 문제없는 경제환경같은 판타지 대리만족을 그만 걷어내고 산속으로 들어가 그 암울한 감정에 담은 자신의 정신을, 그 정수를 토해내보든가요. 즐기고 사는 사람이 왜 이리 겉멋에 취해있는지. 제가 이 사람의 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그리고 싫어하게 되는 건 출구없는 미궁에 스스로를 밀어넣고 그 환경을 즐기고 있는 것같은 자아도취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류의 자아도취에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이고요. 아, 정말이지.

Posted by 네츠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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