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꽃을 닮았다는 말을 들었었다. 아름답지도 않고 소박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청량감이 느껴지는 새하얀 꽃을 닮았다고. 그 말을 해주었던 남자는 진심으로 눈부신 것을 본 듯한 눈을 하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 비치는 자신을 생각하며 문득 울고 싶어져,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이제와서 생각한다.
그 눈을 사랑할 수도 있었다고.
사막의 나라에는 항상 더운 바람이 분다. 여름의 길카타르는 숨이 막힐 듯한 더위로 가득하지만, 평소라면 그 더위에 거리가 조용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제 혈기에 넘어지는 사람들은 가끔 나올지라도 절대로 잠들지 않는 거리, 그 거리가 길카타르였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활기를 더 하는 거리는 항상 눈부시도록 밝았다. 이번에도 그래야했다.
사막의 나라에는 항상 더운 바람이 분다. 여름의 길카타르는 숨이 막힐 듯한 더위로 가득하지만, 평소라면 그 더위에 거리가 조용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제 혈기에 넘어지는 사람들은 가끔 나올지라도 절대로 잠들지 않는 거리, 그 거리가 길카타르였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활기를 더 하는 거리는 항상 눈부시도록 밝았다. 이번에도 그래야했다.
그러나 올해 여름, 길카타르의 거리에는 숙연한 고요만이 맴돌았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걸음은 조용했고 표정은 어두웠다. 거리에는 죽음의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도시를 메운 전염병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 우울한 기척을 전 왕국에 채워나갔다. 나라를 파국으로 몰아넣을 정도의 지독한 병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소매로 왕국을 한번 쓸어 연약한 자들- 노인이나 어린이, 병약한 사람들-을의 목숨을 고요하게 거두고, 그 자리에 비탄과 우울만을 남기고 갈 정도로는 잔혹한 병이었다.
죽음은 어디에나 평등하게 스며들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소시민의 무너져내리는 움막 안으로도, 나라의 절반을 통솔하는 권력자의 저택 안으로도.
"엘더. 괜찮아?"
"..토탐. 괜찮아요."
열에 들뜬 채로도 알아볼 수 있는 남편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애써 웃으려다가 얼굴 근육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놀랐다. 그만큼의 기력도 남지 않은 걸까. 내쉬는 숨이 가빴다. 고개를 들려는 것을, 남편은 팔을 뻗어 조용히 재제했다.
"누워있어. ..3일만에 정신을 차렸다구, 당신."
"3일이나.. 지났어요?"
"그래."
흐릿한 시야가 순간에 맑아졌다. 그제서야 남편의 얼굴을 채우고 있는 것이 막연한 걱정이 아님을 알았다. 일그러질 듯한 얼굴로 서 있는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같았다. 손을 뻗어달래주어야할 것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 안심시켜주지 않고서는 심장이 조여들어버릴 것같은, 그런 슬퍼지는 얼굴.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요."
"엘더.."
"당신, 그렇게 있으니까.. 타이론의 형같아."
"엘더..."
"...아버지 노릇..잘해줘야죠. ..걱정..하지 말아요. 네?"
다행이다. 이번에는 웃을 수 있었다. 아직 어린 아들의 형제취급을 당하고도, 한참을 올려다봐야하는 강건한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아이처럼 슬퍼보였다. 그는 크고 두꺼운 손을 뻗어, 아주 조심스럽게 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수척해보이는 얼굴로 그는 침울한 목소리를 이어나갔다.
"손님이 왔어."
"누구..?"
"..카밀라야."
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한없이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경계를 감추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들의 형제처럼 보일만큼 흔들리던 모습에서 삽시간에 경계를 품은 권력자의 얼굴로 표정이 바뀌는 남편. 뭐라 말해줄 법도 했으나. 그 이전에 그가 입에 담은 이름에 멈칫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들어오게 해주실래요?"
"그러려고했어. ..몸 조심해. 무슨 일 있으면 부르고."
"고마워요."
그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말하는 '몸조심'이, 이 병에 대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부르라'고 한 것역시 마찬가지다. 상냥한 남자였으나, 그는 동시에 길카타르의 남자이기도 했다. 피와 다툼과 계략에 모두 능한 길카타르인. 그는 거리를 온통 채운 추문은 입을 다문 채 넘겨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추문에 얽힌 이가 찾아왔을 때 경계를 늦추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한번 부드럽게 내 뺨을 스치고 돌아나갔다.
"아직도 골골대고 누워있어? 엘더 베일."
그와 교대하듯 들어온 여인은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토탐에게서 싫은 소리라도 들었겠지. 험삼궂은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 장소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꽃이 피어날 듯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행색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장신구를 다는 것정도는 어느 정도의 상류층이거나 부유한 자라면 누구라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행색에 걸맞는 품격을 갖출 수 있느냐 없느냐는 순전히 그 사람의 기량에 달려있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실로 여왕의 품격을 가지고 있었다. 당당한 태도는 물론이고, 젊은 시절 길카타르 최고의 미인이라 불리며 칭송과 흠모의 눈길을 넘치도록 받았던 화려한 미모는 그 자체만으로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서와, 카밀라."
"이제 슬슬 좀 일어나지? 아직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반도 못했어. 이 도둑고양이."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찡그려가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그 '하고 싶은 말'이 절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카밀라는 항상 폭언과 욕설을 동반하고 자신을 찾아왔었고, 쏘아붙이는 말에는 그녀의 원한이 가득했다.
"병자를 상대로는 역시 말하기가 좀 그래?"
"..말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마. 당신이 꼬리친다고 넘어가는 바보 역할은 남자들이나 하라고 해."
"평소에는 말대답하지 말라느나 그랬으면서."
"..시끄러워, 어서 일어나기나 해."
침대옆에 마련된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으면서 그녀는 투덜거렸다. 옆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의 옆모습이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듯 보였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죽음에 질식할 듯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녀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퉁명스러운 어조도, 눈물이 날만큼 서툰 성격도,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 모습도. 평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것에 안도했다. 그녀의 거울이 된 것처럼 웃었다.
"방에 들어오지 않는 편이 좋을걸. 이 병은 독해, 카밀라."
"바보같은 소리. 약해빠진 여자가 골골거릴 때마다 위생복같은 걸 껴입으려면 몸이 남아나질 않아."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르는데?"
웃으며 한 말에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병약한 자신은 항상 누워있는 일이 더 많았다. 집보다 병원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고, 항상 약과 의사를 곁에 상비해두고 살아야했다. 토탐은 그런 병약한 아내에게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모든 것을 도와주었다. 그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랑에 기대어서 지금껏 위기를 넘겨온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로.
길카타르의 여름을 침묵 속에 잠기게 만든 유행병 속에는 사신이 도사리고 있었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거리는 스산해졌다. 사람들의 얼굴 위로 그늘이 내려앉았다. 토탐은 그 병에게서 자신을 빼돌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써주었다. 방안에는 결계가 쳐졌고, 모든 음식과 물에는 철저한 검토가 따랐다. 그런데도 자신은 그 죽음의 바람과 마주했다. 쓰러진 것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파리한 얼굴로 웃자,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죽으면, 비웃어주겠어. 내 남자는 내 것이라고 선언해주지."
"장례식장에는 와주는 거야?"
"웃기지마. 난 서쪽지구 총책임자의 안주인이야. 그런 내가.."
"그 것도 그렇네."
"..!"
그녀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정말로 서투르다. 열도 잊은 채 웃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이내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간을 찌푸리며 험한 말을 토해냈다. 그렇게 나사가 하나 빠져있으니까 재대로 몸 관리를 못하는 거라는 둥, 자식 교육을 전혀 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둥, 북쪽지구의 안주인으로서 아무 일도 못하고 있다는 둥하는 불평들이었다. 웃으며 그 이야기를 듣다가, 적당한 순간에 그녀의 말을 끊었다.
"카밀라."
"...뭐야."
"묻고 싶은 말, 없어?"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말이 무엇인지는 그녀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그녀가 무서운 얼굴로 베일 가를 찾아왔을 때, 입에 담았던 말. 그 때 그녀는 숨기고 있었던 나이프를 던졌다. 토탐이 자신을 잡아채는 바람에 맞는 일 없이 벽에 꽂혔지만 나중에 나이프를 회수한 토탐은 그 것에 발려있던 독에 혀를 내둘렀다. 치명상을 입힐만한 독은 아니었지만 다 큰 어른도 울부짖게 만든다는 신경독이었다. 그 것이 그녀가 자신에게 던진 최초의 인사였고, 처음 듣는 선전포고였다.
싱크 가의 안주인이 베일 가의 안주인을 죽이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왕국을 뒤엎을 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목숨을 앗을 수 없다는 상황을 납득한 채로도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징벌을 내리고 싶었을 것이다. 혼란으로 물든 눈동자 한 가운데서 독기서린 증오가 타오르고 있었다. 이를 꽉 깨문 그녀의 눈가에서는 닦아내지도 않은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패배감도 아니었고 슬픔도 아닌, 오롯이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물.
하지만 그녀가 빈번하게 싱크 가를 찾아와 욕설을 퍼붓고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면서, 왕래가 길어질 수록 그녀는 변해갔다. 독설과 폭언은 변함없었지만 이글거리던 살기는 점차 잦아들었다. 그 것을 알았기에 토탐은 아무런 제지없이 그녀를 이 안에 들였으리라. 마지막까지 살기없이 쏟아붓는 욕설, 빈정거림, 그런 것을 웃으며 넘겨버리고 그녀와 작별하는 온화한 끝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녀에게는 들려주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요슈아 싱크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당신은 연약한 꽃 같아. 보고 있으면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해. ..나 요슈아 싱크는, 그런 그대와 함께하고 싶다.]
여름의 더운 날에, 요슈아 싱크는 평소와 변함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었다. 짧은 교제기간동안 그에 대해 많은 것을 보았다. 모든 것에 뛰어나고, 그만큼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서투르고, 팽팽하게 조인 끈을 푸는 법을 모르는 채 더 당기기만 할 것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곁에서 그의 지나친 긴장을 풀어주는 그런 샘물같은 여인으로서 살 수도 있었다. 거절한 것은 그의 날이 선 마음을 감싸주며 살아가기에 자신은 강한 여자가 못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거절은 부드럽게 이뤄졌고, 그는 입술을 깨물면서도 신사다운 태도로 돌아갔다. 꼭 1년이 지나고서, 토탐 베일에게 청혼을 받았고, 이번에는 그 것을 받아들였다. 타이론을 낳을 즈음에서야 자신을 보는 남자의 눈이- 요슈아 싱크의 시선이 그 여름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평생 조여오기만 하며 살아온 방식 그대로 사랑에 있어서도 놓아버리는 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카밀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뇌에 찬, 서글퍼보이는 얼굴을. 요슈아 싱크. 북쪽의 총괄자이자 남편과 쌍벽을 이루는 그 남자를, 카밀라는 정말로 사랑했다. 불꽃같이 열정적인 사랑이었다.
"..나, 왕궁에서..요슈아와 당신이 함께 있는 걸 봤었어."
".."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목소리를 참고 있었다. 왕궁의 어느 무도회에서 그와 나란히 서 있는 그녀를 보았었다. '카밀라 싱크'로서의 그녀를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회장안의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모을만큼 아름답고 눈부신 그녀는, 다른 곳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오로지 한 남자만을 보고 있었다. 요슈아 싱크, 그녀가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를. 뜨거운 애정이 스민 그 눈동자를 보는 동안 처음으로 서글퍼졌다. 그녀를 돌아보지 않는 요슈아 싱크가, 그녀와 꼭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무척 잘 어울린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랬으면.."
뭐라도,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녀의 냉혹한 가면이 무너졌다. 카밀라는 울 것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떨리는 입술이, 당장이라도 그를 돌려달라고 애걸하고 싶어하는 것을 참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지 못한 척 눈을 감았다. 남은 기력을 주워모아 카밀라에게 미소지었다. 아름답게. 혹은 잔혹하게.
"..그래도 그는 나만을 바라봤어."
"-입닥쳐!"
비단천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퍼였다. 카밀라가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같은 얼굴로 손을 치켜들었다. 당장이라도 때릴 것같았으나 결국 그녀는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입술을 떨면서 그녀는 소리쳤다.
"그런 말을.. 그런 말을 들으러 온 게 아니야!!"
"..변명이 아니야, 나는-"
"닥쳐, 엘더 베일! 베일 가의.. 베일 가의 이름을 달고서, 내 남편을 언급하지마!"
일그러진 그녀의 눈망울에 울음이 스며 있었다. 굴욕과 절망이 스민 그 눈동자가 처음 이 곳을 찾아왔었던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분노와 고통으로 술렁이는 눈이었다.
"알아? 나는 그 남자를 사랑했어.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리고 네가 그를 가져갔지. 얼어붙은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인의 깊은 한에서는 짙은 독기가 돌았다. 금방이라도 망가버릴 것같은 그녀의 자조는 잔혹하리만치 차가웠다.
"그런데 항상 네가 방해했지."
"카밀라-"
"..죽어버려, 나쁜 년."
품위있는 가면을 던져버리고 그녀는 끝내 독기서린 진심을 퍼부었다. 입술을 짓씹으며 내뱉은 그녀의 말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종말을 고하는 유언처럼 잔인했다. 엘더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카밀라의 얼어붙은 눈에 다시금 빛이 들어왔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스스로가 내뱉은 말의 무게에 내려앉을 것처럼 보였다. 엘더는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창문을.."
"..?!"
"창문을 말이야, 열어뒀어. 그 앞의 돌도 치우고."
카밀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베일 가의 저택은 북쪽지구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엘더의 방의 창문에는 푸른빛의 돌이 박혀있었다. 도적들이 쓰는 결계중에서도 정화의 결계를 맺는 수호석이다. 카밀라의 눈동자가 커졌다. 엘더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바람이 기분 좋아서.. 손을 내밀고 있었어."
엘더는 웃으며 말했으나 카밀라는 그 의미를 단번에 깨달았다. 그녀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수호석을 치운 채, 창문을 열어두었다는 그 의미를.
"엘더, 너..!"
"3일째에는 피해가지 못하더라구."
거리에 나부끼는 죽음의 바람을 향해 내민 손. 유행병은 금새 그 손을 붙잡았다. 연약한 몸을 점령한 병은 혈관을 타고 돌아 생명을 짓눌렀다. 쉽고도 간단한 종말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엘더는 숨을 고르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비밀로 해줘야돼? 안 그러면.. 토탐을 볼 면목이 없어져."
"엘더, 너..!"
"미안해, 카밀라."
마음을 담아 말한 사죄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카밀라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엘더는 꽃처럼 웃었다. 그 사람이, 그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하얀 꽃같은 무구한 미소를.
"카밀라. 나 당신을 정말로 좋아해."
소녀같은 맑고 청량한 목소리에, 카밀라의 얼굴은 기어코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결국 꽉 메인 목을 벗어나지 못했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던 카밀라는 위태로운 걸음으로 뒷걸음치듯 물러나 방안을 떠났다. 도망치듯 모습을 감추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엘더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대로 그녀는 의식을 놓았다.
여인의 실낱같은 숨은 이틀 후에 한계에 도달했다. 그 날,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엘더는 잦아드는 숨을 다독였다. 열에 들뜬 시야는 흐릿했으나, 엘더는 잘못 볼 수 없는 대상을 쉽게 알아보았다. 그녀는 가느다랗게 곁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토탐. ...거기..있..어요?"
"엘더. 나 여기있어. 여기에.."
토탐은 연약한 아내의 손을 잡았다. 방안에 있는 것은 오직 그 뿐이었다. 그녀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미..안. 나.. 이제.."
"엘더. 말하지마. ..말하지마."
"당신..만..있.."
"그래. 아무도 없어. 타이론도, 카밀라도. -요슈아도."
"응.."
요슈아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토탐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뭐라 말해주고 싶었으나 남아있는 기력이 없어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아들 타이론이 그녀의 곁에 오지 않은 것은 엘더의 선택이었다. 병이 악화되기 직전, 엘더는 최후는 남편 외의 사람과 공유하지 않고 싶다고 말했다. 토탐은 그를 받아들였다. 어린 아들이 그녀의 죽음에서 비껴가고 그녀를 한결같이 사랑했던 남자- 요슈아 싱크도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엘더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 자락에 단 한 사람 토탐 베일만의 이름을 남겼다. 토탐은 그것이 그녀가 자신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그 방안에서 그는 지배자가 아닌 아내를 보내는 남편으로서 울 수 있었다.
"엘더.엘더.엘더.. 어떡하지, 당신이 없으면... 나는.."
"토..탐.."
"카밀라..카밀라를 불러올까? 나,난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제발, 엘더."
"싫어..요. 당신과.. 있을 거야."
그로는 드물게도 토탐은 연약해보였다. 엘더는 힘주어 고개를 저었다. 무척이나 연약한 몸짓이었으나 그 것은 한순간무너져내렸던 토탐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엘더는 자신이 그 이외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외에는 누구도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좀처럼 사랑해줄 수 없었던 사랑스러운 아들도. 질식할 듯한 사랑을 멈추지 못했던 요슈아도. 자신을 증오했지만 미워하지 못한, 카밀라도.
요슈아 싱크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당신은 연약한 꽃 같아. 보고 있으면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해. ..나 요슈아 싱크는, 그런 그대와 함께하고 싶다.]
여름의 더운 날에, 요슈아 싱크는 평소와 변함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었다. 짧은 교제기간동안 그에 대해 많은 것을 보았다. 모든 것에 뛰어나고, 그만큼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서투르고, 팽팽하게 조인 끈을 푸는 법을 모르는 채 더 당기기만 할 것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곁에서 그의 지나친 긴장을 풀어주는 그런 샘물같은 여인으로서 살 수도 있었다. 거절한 것은 그의 날이 선 마음을 감싸주며 살아가기에 자신은 강한 여자가 못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거절은 부드럽게 이뤄졌고, 그는 입술을 깨물면서도 신사다운 태도로 돌아갔다. 꼭 1년이 지나고서, 토탐 베일에게 청혼을 받았고, 이번에는 그 것을 받아들였다. 타이론을 낳을 즈음에서야 자신을 보는 남자의 눈이- 요슈아 싱크의 시선이 그 여름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평생 조여오기만 하며 살아온 방식 그대로 사랑에 있어서도 놓아버리는 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카밀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뇌에 찬, 서글퍼보이는 얼굴을. 요슈아 싱크. 북쪽의 총괄자이자 남편과 쌍벽을 이루는 그 남자를, 카밀라는 정말로 사랑했다. 불꽃같이 열정적인 사랑이었다.
"..나, 왕궁에서..요슈아와 당신이 함께 있는 걸 봤었어."
".."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목소리를 참고 있었다. 왕궁의 어느 무도회에서 그와 나란히 서 있는 그녀를 보았었다. '카밀라 싱크'로서의 그녀를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회장안의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모을만큼 아름답고 눈부신 그녀는, 다른 곳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오로지 한 남자만을 보고 있었다. 요슈아 싱크, 그녀가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를. 뜨거운 애정이 스민 그 눈동자를 보는 동안 처음으로 서글퍼졌다. 그녀를 돌아보지 않는 요슈아 싱크가, 그녀와 꼭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무척 잘 어울린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랬으면.."
뭐라도,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녀의 냉혹한 가면이 무너졌다. 카밀라는 울 것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떨리는 입술이, 당장이라도 그를 돌려달라고 애걸하고 싶어하는 것을 참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지 못한 척 눈을 감았다. 남은 기력을 주워모아 카밀라에게 미소지었다. 아름답게. 혹은 잔혹하게.
"..그래도 그는 나만을 바라봤어."
"-입닥쳐!"
비단천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퍼였다. 카밀라가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같은 얼굴로 손을 치켜들었다. 당장이라도 때릴 것같았으나 결국 그녀는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입술을 떨면서 그녀는 소리쳤다.
"그런 말을.. 그런 말을 들으러 온 게 아니야!!"
"..변명이 아니야, 나는-"
"닥쳐, 엘더 베일! 베일 가의.. 베일 가의 이름을 달고서, 내 남편을 언급하지마!"
일그러진 그녀의 눈망울에 울음이 스며 있었다. 굴욕과 절망이 스민 그 눈동자가 처음 이 곳을 찾아왔었던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분노와 고통으로 술렁이는 눈이었다.
"알아? 나는 그 남자를 사랑했어.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리고 네가 그를 가져갔지. 얼어붙은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인의 깊은 한에서는 짙은 독기가 돌았다. 금방이라도 망가버릴 것같은 그녀의 자조는 잔혹하리만치 차가웠다.
"그런데 항상 네가 방해했지."
"카밀라-"
"..죽어버려, 나쁜 년."
품위있는 가면을 던져버리고 그녀는 끝내 독기서린 진심을 퍼부었다. 입술을 짓씹으며 내뱉은 그녀의 말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종말을 고하는 유언처럼 잔인했다. 엘더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카밀라의 얼어붙은 눈에 다시금 빛이 들어왔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스스로가 내뱉은 말의 무게에 내려앉을 것처럼 보였다. 엘더는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창문을.."
"..?!"
"창문을 말이야, 열어뒀어. 그 앞의 돌도 치우고."
카밀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베일 가의 저택은 북쪽지구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엘더의 방의 창문에는 푸른빛의 돌이 박혀있었다. 도적들이 쓰는 결계중에서도 정화의 결계를 맺는 수호석이다. 카밀라의 눈동자가 커졌다. 엘더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바람이 기분 좋아서.. 손을 내밀고 있었어."
엘더는 웃으며 말했으나 카밀라는 그 의미를 단번에 깨달았다. 그녀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수호석을 치운 채, 창문을 열어두었다는 그 의미를.
"엘더, 너..!"
"3일째에는 피해가지 못하더라구."
거리에 나부끼는 죽음의 바람을 향해 내민 손. 유행병은 금새 그 손을 붙잡았다. 연약한 몸을 점령한 병은 혈관을 타고 돌아 생명을 짓눌렀다. 쉽고도 간단한 종말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엘더는 숨을 고르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비밀로 해줘야돼? 안 그러면.. 토탐을 볼 면목이 없어져."
"엘더, 너..!"
"미안해, 카밀라."
마음을 담아 말한 사죄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카밀라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엘더는 꽃처럼 웃었다. 그 사람이, 그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하얀 꽃같은 무구한 미소를.
"카밀라. 나 당신을 정말로 좋아해."
소녀같은 맑고 청량한 목소리에, 카밀라의 얼굴은 기어코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결국 꽉 메인 목을 벗어나지 못했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던 카밀라는 위태로운 걸음으로 뒷걸음치듯 물러나 방안을 떠났다. 도망치듯 모습을 감추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엘더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대로 그녀는 의식을 놓았다.
여인의 실낱같은 숨은 이틀 후에 한계에 도달했다. 그 날,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엘더는 잦아드는 숨을 다독였다. 열에 들뜬 시야는 흐릿했으나, 엘더는 잘못 볼 수 없는 대상을 쉽게 알아보았다. 그녀는 가느다랗게 곁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토탐. ...거기..있..어요?"
"엘더. 나 여기있어. 여기에.."
토탐은 연약한 아내의 손을 잡았다. 방안에 있는 것은 오직 그 뿐이었다. 그녀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미..안. 나.. 이제.."
"엘더. 말하지마. ..말하지마."
"당신..만..있.."
"그래. 아무도 없어. 타이론도, 카밀라도. -요슈아도."
"응.."
요슈아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토탐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뭐라 말해주고 싶었으나 남아있는 기력이 없어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아들 타이론이 그녀의 곁에 오지 않은 것은 엘더의 선택이었다. 병이 악화되기 직전, 엘더는 최후는 남편 외의 사람과 공유하지 않고 싶다고 말했다. 토탐은 그를 받아들였다. 어린 아들이 그녀의 죽음에서 비껴가고 그녀를 한결같이 사랑했던 남자- 요슈아 싱크도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엘더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 자락에 단 한 사람 토탐 베일만의 이름을 남겼다. 토탐은 그것이 그녀가 자신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그 방안에서 그는 지배자가 아닌 아내를 보내는 남편으로서 울 수 있었다.
"엘더.엘더.엘더.. 어떡하지, 당신이 없으면... 나는.."
"토..탐.."
"카밀라..카밀라를 불러올까? 나,난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제발, 엘더."
"싫어..요. 당신과.. 있을 거야."
그로는 드물게도 토탐은 연약해보였다. 엘더는 힘주어 고개를 저었다. 무척이나 연약한 몸짓이었으나 그 것은 한순간무너져내렸던 토탐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엘더는 자신이 그 이외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외에는 누구도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좀처럼 사랑해줄 수 없었던 사랑스러운 아들도. 질식할 듯한 사랑을 멈추지 못했던 요슈아도. 자신을 증오했지만 미워하지 못한, 카밀라도.
카밀라만큼은 이 곳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엘더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를 미워하거나 원망해서가 아니었다. 카밀라 싱크. 아름다운 그녀에게- 죽음이라는 장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모습이 있었다. 죽음이 넘치는 거리를 아름다운 여인이 걸어간다. 일단 거리에 나서면 그녀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서쪽지구를 향해 돌아갈 것이다. 어떤 죽음도, 어떤 어둠도 그녀의 고혹적인 빛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하리라. 그렇게 한결같이 강하고, 아름다운 그녀다. 그렇게 돌아보는 일 없이 갈 것이다.
<나 당신을, 정말로 좋아해.>
내 말로 상처입은 자신의 연약한 부분은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내가 그녀에게 남기려 했던 상처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체 하면서.
괴로운 가슴을 차마 드러내지도 못한 채, 진심 따위는 영영 모른다는 듯.
- 미안해, 카밀라.
그녀는 내가 뿌린 그 독을 알까. 카밀라 싱크. 고개를 돌리는 법을 모르는 아름답고 오만한 여인. 그녀는 언제고 외면해온 진실을 마주할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허락하고 있었다. 외롭고 오만한 그녀의 삶에서 나는 그녀의 삶을 채워주는 한 조각이었다. 그러나 외로움이 사무쳤을 때 그녀는 나와의 끝을 떠올릴 것이다. 남자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자기 자신은- 친구에게 이별조차 고하지 못한 채 유일한 이해자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상기할 테지.
괴로운 가슴을 차마 드러내지도 못한 채, 진심 따위는 영영 모른다는 듯.
- 미안해, 카밀라.
그녀는 내가 뿌린 그 독을 알까. 카밀라 싱크. 고개를 돌리는 법을 모르는 아름답고 오만한 여인. 그녀는 언제고 외면해온 진실을 마주할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허락하고 있었다. 외롭고 오만한 그녀의 삶에서 나는 그녀의 삶을 채워주는 한 조각이었다. 그러나 외로움이 사무쳤을 때 그녀는 나와의 끝을 떠올릴 것이다. 남자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자기 자신은- 친구에게 이별조차 고하지 못한 채 유일한 이해자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상기할 테지.
그렇게 나는 그밖에 살지 않는 그녀의 가슴 속에 후회의 가시가 되어 영원히 박혀있게 되리라.
상실과 고독 사이에서 후회에 잠긴다면, 조금이라도 괴로워한다면- 그 남자로 가득찬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서, 나의 이름은 잊혀지는 일 없이 그녀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리 괴로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망각은 생각보다 간단하며 삶은 금새 추억이 된다. 그러나 내 아름답고 서툰 친구는 그조차 인정하지 못한 채 자신의 실수를, 혹은 잘못만을 언제까지나 곱씹은 채 서 있을 것이다. 카밀라 싱크는- 그만큼 고독한 꽃이었다. 누구도 그녀를 후회와 슬픔 속에서 건져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요슈아 이외의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요슈아는 결코 그녀를 구해줄 남자가 아니니까.
그것을 알았기에, 카밀라를 마지막까지 상처입히는 길을 택했다.
지독한 짓이었다.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채 영영 후회하며 나를 떠올리겠지. 사랑하는 친구 카밀라. 나는 진심으로 그녀가 괴롭기를 바랬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본심이었다. 남편에게도 요슈아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물며 카밀라는 영영 나의 진심을 모를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전한 적 없던 이, 이기심은.
"여기 있어줘요......토탐."
흐려지는 눈으로 남자를 응시하면서 마지막까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가슴을 채운 시커먼 독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여기에 있는 것은 순종적이고 연약했던 여인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그렇게 그를 부르면서도, 슬픔으로 가득찬 그의 모습 뒷편으로 이를 악물고 떨고 있는 카밀라의 환영을 보았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카밀라.당신의 친구였을 수도 있었던 나를, 당신도 용서할 수 있었던 나를,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버리고 간 나를, 당신이 잊지 못하기를 바래. 차마 말로 하지 못했던 이 깊은 어둠이, 잔인한 이기심이, 당신의 심장에 박혀 오랫동안 살아있었으면 해. 그리하여 그 남자로 뒤덮인 당신의 마음에 그 상처가 오래도록 흉터로 남기를. 당신이 버리고 간 나의 마지막 얼굴이, 당신에게 박혀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기를.
카밀라, 당신이 나를 잊지 못하기를.
토탐. 나의 사랑하는 남편. 나의 지아비였고 나의 기둥이었던 나의 남자.
당신은 모르시겠죠. 당신이 사랑한 작은 꽃이, 어떤 독을 품고 있었는지.
얼마나 잔인한 독이었는지.
당신은 모르는 채로 있어주세요.
그 독을 마시는 이는 하나로 족해요.
나의 이름을 잊지 못하고 곱씹을 사람은, 내가 사랑한 여자- 그녀 하나로 족해요.
여름의 꽃을 닮았다는 말을 들었었다. 아름답지도 않고 소박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청량감이 느껴지는 새하얀 꽃을 닮았다고. 그 말을 해주었던 남자는 진심으로 눈부신 것을 본 듯한 눈을 하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 비치는 자신을 생각하며 문득 울고 싶어져,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FIN.
엘더->카밀라->요슈아의 관계로.
그냥 무지무지 순하고 착해보였던 엘더도 실은 길카타르 인다운 냉혹한 일면을 감추고 있지 않았을까 해요.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해명해서 의혹을 거둬내느니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하는 길을 택하는, 카밀라와 똑같은 여자.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