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회색 하늘은 잔뜩 흐렸다. ..아니, 흐리다기보다.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잠시 고개를 기울인 채 생각했다. 저런 색조를 뭐라고 불렀더라. 알맞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해보면 너는 언어에는 능숙하면서 표현에는 약하다고 그 사람은 웃었었다. 단어를 많이 알지만 장소에 알맞은 단어를 끄집어내는 건 정말 못하는구나, 티에리아. 그 말을 듣고 얼마간 발끈한 채 그를 쏘아보자 나쁜 의도가 아니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너도 언젠가 원하는 순간에 알맞은 표현을 할 수 있게 될까. 그가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했을 때 반쯤 포기한 채 쏘아붙였다. 당신처럼 훠이훠이 말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못되어서 쉬울 것같지는 않습니다만. 날이 선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그는 웃었다.
글쎄, 그렇게 보였어?
그 표정이 평소와는 달라보여서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을 때, 그는 이미 그 얼굴을 지우고 있었다. ..록온 스트라토스? 망설이듯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그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네가 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깨달아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웃었다. 웃었다.
자주 웃는 사람이었다. 자주 주변을 돌보아주는 사람이었다. 쉽사리 자신이 떠맡을 부분들을 감추고 도움을 주었다는 걸 감추는 사람이었다. 손을 내밀어주기는 했어도 과보호를 하지는 않았다. 모두를 동생처럼 끌어안아주면서도 동료로서 인정해주었다. 그럴 능력도 인품도 있었다. 이상적인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상대를 믿어주는 사람이었다. 지켜야할 선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왜 그게 오해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씁쓸한 미소가 흘러 시선을 하늘에서 돌렸다. 뿌옇게 흐려진 거리는 내리쬐는 햇빛이 없어서 더 흐렸다. 한없이 밝은데도 강렬한 빛은 없다.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에서 거리를 메우고 있는 회색. 아마도 그의 내부는 이런 빛깔이었겠지.
어둠이라고는 한 점도 없을 것처럼 밝았지만 그 곳에 눈을 찌를 듯한 태양빛은 없었다. 흐린 날 오후의 거리처럼 밝고, 스산하고, 흐렸다. 깨닫지 못한 것은 분명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 곳은 너무 밝고 조용해서 격렬한 빛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고요한 빛만으로도 그는 구원이었다. 자신에게 있어서, 다른 동료들에게 있어서. 그가 맺어온 관계에 선을 긋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애시당초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면 자신을 내던지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는 언제나 스스로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딱히 자기애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철저하게 수단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바보같은 사람. 그렇게 자신을 수단으로 내려앉힐 수 있을 만큼 자기를 절제할 수 있었으면서도, 그는 자기가 받아들인 사람들의 손을 무엇하나 놓지 못했다.
나는 당신의 걸림돌이었을까. 한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괴롭지는 않았다. 그저 숨이 막혀왔다. 괴로운 것은 자신이 그를 망가트려버린 원인을 제공해서가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할만큼 다정했던 그 남자에게 자신은 아무 도움도 되어주지 못했다. ..아니, 그 것은.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아마 그 감정조차 그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다. 언제나 상냥하게 웃었다. 다정한 듯 받아들여주었다. 그어놓은 선의 너머까지 자신을 희생했다.
그래도 그는, 자신에 대한 것은 무엇하나 공유해주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공유할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상냥하고 다정한 그 남자가 유일하게 아끼지 않았던 것은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자기애를 억누를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마 처음부터 절제할 애착이 없었던 것이다. 인지와 자각 아래서 그는 자신을 수단으로 바꾸었다. 그의 내부에 무엇이 잠들어있었던 들, 그는 그 상황 속에 남은 과거의 자신을 받아들이지조차 않았으리라. 펠트 그레이스에게서 전해 들은 그의 본명은 닐 디란디라고 했다. KPSA의 테러에 가족을 잃은 아일랜드의 소년. 앗아간 것들에 대한 상처를 억누를 때에 그는 그 닐 디란디도 함께 버리고 왔던 것일까.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와 맹목으로 자신이 스스로를 수단으로 생각하던 자신과는 달랐다. 인지와 자각 아래서 그는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버려야할 만큼 그가 짊어지고 있던 것들이 많았던 걸까.
그를 잃은 이후 많은 것을 생각하다가 겨우 깨달았던 것은, 이제와 무엇을 생각하든 그의 입에서는 평생 대답을 들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였어?
그렇게 말하고 웃었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그 낯설어보이는 표정의 의미를 알았다. 그 것은 잘 웃고, 능숙하게 사람들을 대하던 록온의 표정이 아니었다. 아무 것도 말한 적이 없었던, 아무 것도 표현한 적이 없었던, 하다못해 자기자신조차 없는 것처럼 대해왔던 닐 디란디의 표정이었다.
당신이 그 내부에 잠재웠던 것들을, 나는 결국 마지막까지 듣지 못했어.
그 ‘닐 디란디’는, 마지막까지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채 떠나버렸다. 원망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자신을 숨긴 것 이외에 그는 무엇하나 자신을 우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그 것도 록온 스트라토스의 본질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단지 그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있는 내면만큼은 끝끝내 싸안지 않은 채 깊은 망각 속으로 빠트려버렸던 것뿐이다.
어느 틈엔가 흐린 하늘에서 밝은 빛이 부유하듯 떨어져내렸다. 무심코 손을 뻗어서 받자, 그 것은 손끝에서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서서히 흩날리듯 그 수가 늘어난 하얀 빛깔은 밝은 회색빛의 거리를 순식간에 흰빛으로 덮기 시작했다. 세상 위의 모든 형태를, 흔적을 지워버릴 것처럼. 하늘을 향해 뻗었던 손을 다시 주머니 속에 넣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하늘을 향해 마음 속에 떠오른 의문을 담았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닐 디란디.
스치듯 보여준 표정이 전부였단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마음 속에 떠올린 의문에 대답해줄 사람은 이미 없었다. 그를 세상에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남자는 대답해주지 않은 채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모든 것을 덮어버린 채로.
하얗게 물드는 거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눈송이들은 차갑기보다는 조용하고 몽환적이었다. 피안까지 이어질 것같은 조용한 장소를 말없이 걸었다.
새하얀 눈이 내린다.
당신이 없는 이 거리에.
모든 것을 덮어버릴 듯한 새하얀 눈이.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