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네."
"..아니요."
"아니, 자네는 정말 잘해줬어."
늙은 노인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눈빛은 맑았다. 그러나 그 어깨에는 힘이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존경하는 노교수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고개숙인 노교수의 늙은 손은 병상 위에 누워있는 환자의 손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깊게 잠든 남자의 얼굴은 더없이 평온해보였다. 영원의 꿈을 헤메이는 망자의 넋이 그렇게 평화로울까. 아리아드네는 떨리는 두 손을 다잡았다.
"..원망하진 않으세요?"
"내가 왜 그러겠나. 자네는 잘해줬어."
노교수의 목소리는 강단 위에서 그랬듯 부드럽고 다정하게 울려퍼졌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피했다. 눈물이 흘러나올 것같아,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의뢰하신 대로 할 작정이었어요. 실제로 도중까지는 잘 됐었고요. 이론을 구체화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생각만큼 어렵진 않았거든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네. 자네는 심리와 건축 분야에서 모두 뛰어난 학생이었으니까."
"건축가는 몽상가여야한다, 영감은 마음의 샘에서 솟아나온다.. 그렇게 말씀하신 건 교수님이셨잖아요."
"그렇다고해서 심리학까지 수강하러 온 건 자네가 유일했네. 내 애제자는 가장 훌륭한 건축학자이자 심리학자로서 이름을 떨치기 충분해."
"놀리지 마세요."
"진심이라네. ..이야기를 들려주겠나?"
노교수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지금의 현실과는 맞지 않을 말투와 눈빛은 노인 나름의 견뎌내기 위한 방식인지도 몰랐다. 아리아드네도 그의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강의실의 풍경을 떠올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감정을 일체 배제한, 다분히 학술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환자는- Mr.코브는 꿈을 탐험하는 동안 자신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갔으니까요. 거기서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와 마주쳤어요. 덮어두었던 상처와 마주했구요. 그리고 그 상황에서 자신의 현실을 찾아냈어요. 놀라운 진보였어요."
"이론적으로 꿈을 꾸는 동안 무의식은 명확해지네. 육체와 달리 정신에는 구별해서 메스를 댈 수 있는 구분이 없지만.. 꿈 속에서라면 다르지."
"네. 환부가 드러나 있는 상태와 같았어요. 정신과 치료를 통해 그를 낫게하려고 했다면 트라우마와 마주하고, 그 것을 인정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과정까지 수십배에서 수백배는 더 시간이 걸렸을 거에요."
"관련 논문이라도 학회에 발표해보겠나?"
"농담마세요, 교수님. 화상을 입었다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어요."
"위험요소가 너무 많다는 거군."
"..실제로 그랬으니까요."
아리아드네는 한번 숨을 몰아쉬었다. 목소리가 떨릴까봐 그녀의 어조는 점점 높고 빨라졌다. 팔을 움켜쥔 손가락이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꿈 속에서는 모든 것이 구체화돼요. 트라우마가 선명할 수록 더 강하구요. 정신적 상처를 화상에 비유하면 꿈 속은 화재로 타오르는 초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병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네가 필요했네. ..불을 물로 바꿔줄 사람 말이야. 다른 치료는 소용없는 상태였거든."
"맞아 교수님. 그는 일반적인 치료로는 나을 수 없을 환자였어요. 깊게 병들어있었죠. 말씀하셨던대로 꿈 속에서의 대화만이 그를 치료할 수 있었어요. 그는 지상에서의 몇 년에 해당하는 감정 프로세스를 순식간에 해치웠고 트라우마를 흘려보냈어요. 하지만.."
거기서 그녀는 머뭇거렸다. 노교수는 눈매를 가늘게 휘며 부드럽게 웃었다.
"-너무 늦었지."
"..네."
아리아드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꽉 쥐어 하얗게 질린 손을 펴서 내려다보던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강의실의 학생에서 벗어난 그녀는 병자와 함께 꿈 속을 헤맸던 그녀 자신으로 돌아와있었다.
"전..진심으로 그 분을 돕고 싶었어요."
노교수를 통해 소개받은 남자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아리아드네는 관심없었다. 그저 경애하는 교수가 소개해준 일에 이끌려 그를 보았다. 그녀는 현명한 학생이었고, 교수가 왜 자신을 지목했는지에 대해서도 금방 깨달았다. 도미닉 코브는 한눈에도 어딘가가 무너져내린 것처럼 불안해보였던 것이다. 그를 돕는다는 것이 기껏해야 설계도를 그리면 되는 그런 작업일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다분히 정신과 치료에 가까울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고, 사실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 '치료 방식'은 그녀가 생각했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말도 안되는 환상의 세계를 헤매는 남자와, 그의 뒤를 따라가야하는 자신. 그를 얼러주듯 따라가며, 함께 꿈 속을-미로 속을 헤맸다. 그 사이 남자에게 그 자신의 미로를 제시하고, 그 것을 탐색하고, 풀어나갈 수 있게 했다.
..결국 자신의 인도에 따라 그는 '맬'을 떨쳐냈다.
그러나 그녀가 도울 수 있는 구원은 거기까지였다. 치료는 성공했으나 꿈 속의 길은 지상으로 이어지기 전에 닫혀버렸다. 힘없는 목소리가 현실로 떨어져내렸다.
"그 사람한테.. 실을 내려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해줬다네. 미궁 속에서 탈출하게 해줬지."
"하지만 실타래는 부족했는 걸요."
남자가 나오기 전 꿈의 입구는 닫혔다. 병상 위의 남자는 어떤 소리도 닿지 않을 깊은 피안 속에 잠겨있었다. 다음에 그가 눈을 떴을 때 그는 피안 속에서 몇 년의 세월을 보낸 후일까.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노교수는 아무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환자의 미동없는 손가락을 애정어린 손길로 두드리던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자네도 맬을 만났나?"
"...네."
"그랬군."
망설이며 대답하자 노교수는 눈을 감았다. 회상에 잠긴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맬은.. 내 딸은 언제나 주저하는 법이 없었어. 항상 날듯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애였지.처음 도미닉를 데리고 인사하러 왔을 때도 어찌나 당당하던지. 그가 내 마음에 드는 청년이 아니기라도 했 난 그 날 저녁 식탁을 뒤집어 엎었을 걸세."
"..두 분이 서로를 굉장히 사랑했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필연적이었어. 내 딸은 항상 반짝이는 태양같은 애였고, 도미닉은 항상 빛을 쫓고 있었거든. 그리고 둘 다 완벽한 몽상가이기도 했고. ..정말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네."
"그래보였어요."
맬은 코브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떠올렸다. 최하층에 가둬놓은 불미스러운 그림자를 제외하면 그들은 영원히 이어지는 햇살 아래를 함께 걷고 있는 아름다운 연인이었다. 현실에서도 그렇게 그들은 완벽하게 이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으리라. 노교수는 미소지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꿈 속으로 들어가는 건 두 사람에게 특별한 모험같은 거였네. 둘 다 모험을 사랑하고 탐구에 목마른 여행자이자 연구원들이었거든. 맬은 아주 어릴 때부터 내 이론을 옆에서 접해왔던 수제자였고, 도미닉는 곧 그녀보다 더 나은 제자가 되었지. 이따금씩 전화를 걸어 그들의 탐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네. 나는 그 때만해도 사고가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어. 그 애들은 전문가였으니까."
노교수의 눈빛이 아련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기억 속에 남은 아들과 아들의 연인을 보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에 둘러싸여, 삶을 모험으로 가득 채운 채 언제까지나 빛나고 있을 것같던 불멸의 연인들이었다. 그러나 그 빛은 어이없게 바래버렸다. 젊은 연인이 사랑했던 모험의 종막은 평화가 아니라 붕괴와 닿아있었던 것이다.
"맬이 죽었다는 걸 알려준 건 도미닉이었네. 내가 그를 도피시켰지. 그가 내 딸의 남편이어서가 아니라, 무죄라는 걸 완벽하게 확신해서였어. 그에게 맬은 태양같은 거였어. 일상 속에서 항상 빛나고 있는 그런 것말이야. 꿈의 이야기를 제외하고서라도 도미닉이 맬을 해칠 리 없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어. 경찰들이 믿어주지 않는 게 불행이었지만."
노교수는 눈을 감았다. 목소리는 잔잔하게 가라앉아있었으나 평온했다.
"..그가 도망친 이후에도 나는 맬을 잃은 슬픔보다 도미닉에 대한 걱정과 연민이 더 컸네. 살아가는 공기를, 빛을 잃은 놈이 어떻게 살겠나. 필리퍼와 제임스- 두 아이가 그나마 그를 견디게 해줬지. 아이들을 의지해 그는 맬 없이도 자신을 쌓아올렸다네. 나는 내심 안도했어. ..그게 내 딸을 잊어간 게 아니라, 자신 안에 묻어버리고 있던 것이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조용한 목소리에 파문이 섞였다.
"깨달았을 때 그 안의 맬은 너무도 커져있었네. 내버려두면 그 아이를 몰락시킬 것이 뻔했지. 나는 어떻게든 그를 현실로 건져 올리려했어."
"..직접 도와주셨나요?"
"처음 몇번은. 그러나 나는.. 그 아이 내부에 자리잡은 맬을 견딜 수 없었어."
수면 아래로 물감이 번지듯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조는 결코 격정에 차는 법 없이, 한결같이 안온했다.
"내 딸이 그의 안에서 살아있었어. 물론 그의 내부에서 죄책감과 뒤섞여 완성된 맬은.. 내가 알던 아이가 아니었네. 그런데도 나는 감히 그 애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도미닉의 무의식이 만든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 딸과 너무 가까웠던 거야. 나는 결코 그 애에게 손을 대지 못하는 도미닉과 다를 게 없었다네. 이 이론을 학계에 내놓은 내가, 꿈을 설계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어."
"교수님.."
"아리아드네 양. 고백하면 나는 두려웠네. 도미닉의 내면을, 그 애가 품은 고통의 깊이를, 그의 안에서 일그러진 내 딸을 도저히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어. ..그래서 자네를 보낸 걸세."
노교수의 입술에 연약한 미소가 맺혔다. 그는 온화하게 웃으며 다만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용서하게. 그 음이 귀에 와 닿은 순간에 아리아드네는 코브의 꿈 속에서 만난 맬을 생각했다. 층층이 이뤄진 남자의 꿈 속에서 가련한 얼굴을 하고 있던 잔인한 여인. 눈물이 글썽거리는 긴 속눈썹을, 붉은 입술을, 연약한 목소리를 누구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매 순간마다 매혹적인 장미처럼 화려했다. 그러나 그 장미가 품은 독은 어떤 맹독보다도 진하고 잔인했다. 자신이 그녀에 대해서 무엇 하나라도 알고 있었다면 그 아름다운 마성의 여인을 보고도 그렇게 담담할 수는 없었으리라. 아리아드네는 노교수의 마음을 이해했다.
"내가 원망스럽지는 않나?"
아리아드네는 마음을 담아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교수님. 그녀가 몸짓에 흘려넣은 의미를 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노교수는 여전히 평온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도미닉은 내 딸을 보낸 후부터.. 항상 헤메고 있었다네. 자네가 그 아이를 미궁에서 꺼내주었어."
"그렇지 않아요, 교수님. ..저는."
그녀는 말을 찾지못하고 한순간 머뭇거렸다. 숨을 토해내듯 깊게 들이쉬었을 때, 마음에 맺혀있던 말은 박힌 가시가 뽑혀나오는 것처럼 단숨에 튀어나왔다.
"-마지막 순간에, 그를 내버려뒀어요."
이유는 천가지라도 댈 수 있었다. 데리고 돌아가야할 사람이 있었고, '림보'내부는 위태로웠으며, 킥의 순간은 길지 않았다. 머뭇거렸다면 세 사람은 모두 그 속에 갇혔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그 모든 것이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연의 깊은 감옥. 사랑하는 여자를 끌어안은 채 쓰러져있던 남자. 하늘에 내리치던 천둥. 갇혀있었던 또 한 명의 남자. 그가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자신은 그를 꺼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가 여인을 부정한 후에도. 몸을 겹치고 쓰러져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상같았다. 손을 댈 수 없는, 그런 한 폭의 그림같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잊었어요, 교수님."
"..아리아드네."
"저는 그 순간에 맬의 기분을 이해해버렸거든요. 그대로 잊어도 나쁘지 않을 것같다고, 그대로 잃어도 괜찮지 않겠냐고- 한순간 그렇게 생각했어요."
"..."
"그의 무의식을 여행하며 저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았던 건지도 몰라요. 저는 지쳐있었어요. 그의 안에서 맬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에."
"자네는 그에게 사이토를 찾아 돌아오라고 하지 않았나."
"말로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교수님, 저는 그와 그 곳에 남았어야 했어요. 하지만 저는 지쳐있었어요. 맬을 보는 것에, 긴 여행에, 생각을 유지하는 것에, 전부 다 지쳐있었어요."
아리아드네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와 함께 떨어져내린 심연 속에서는 코브의 생각이 거미줄처럼 공기중에 퍼져있었다. 무의식이 영향을 끼치는 건 시각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을, 마음을 들여다보는 동안 자신의 정신도 함께 풍화되어갔다. 아름다웠던 아내. 긴 도피생활. 현실과 꿈이 무너지는 피안의 경계.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마음. 날이 서 있는 모든 계획. 몸은 지쳐있었고 마음은 혼탁해있었다. 맬을 떠올리며 긴장하지 않았다면 그 속에서 자신은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의 빈틈이 마지막 순간에 그를 홀로 두게 만들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리아드네는 울면서 웃었다.
"저는 비겁했어요, 교수님."
웃음과 함께 내뱉은 말은 고해와 같았다. 길고 단단한 가시가 뽑힌 심장에서 묵힌 감정들이 고름처럼 튀어올랐다. 썩어들어간 죄악감이 터져나왔다. 모든 것을 토해내고 새빨간 피가 고일 때까지. 여행의 끝자락에서부터 심장을 누르고 있던 감정은 그 것이었다. 노교수는 말이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그를 보지 못하고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오열이 스몄다.
"..그게 자네가 느끼는 고통이었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손을 치웠다. 눈물로 젖은 눈동자로 응시했을 때, 노교수는 여전히 온화한 얼굴로 있었다. 질책하리라 생각했었는데. 아리아드네는 잠시 울음도 잊었다. 피해자임이 분명한 노인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조금은 지친 듯한, 그러나 다정한 얼굴로 그는 말했다.
"죄책감이 자네를 억누르고 있었던 게야. ..그래서 아까부터 그렇게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거고."
"..교수님?"
"자네도 알 걸세, 아리아드네 양. 자네는 썩 비겁하지도 나쁘지도 않았어. ..그저 자네 스스로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뿐이야."
"하지만 코브는-"
"누워있다고 생각하나?"
노교수는 손을 뻗어 환자의 손가락을 두드렸다. 방금 전과 똑같은 애정어린 손짓이었다. 검지 손가락 마디부근을 손끝으로 두드리는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툭툭,하고. 아버지가 아들의 어깨를 쓸어줄 듯한 그런 몸짓.
-다음 순간, 코브의 손가락이 모래처럼 무너져내렸다.
"..?!"
생각도 못했던 사태에 아리아드네는 눈을 크게 뜨고 한 걸음 물러섰다. 무너진 몸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손가락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팔로, 팔에서 다시 전신으로. 도미노가 퍼져나가듯 풍화현상은 그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리아드네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그는 깨끗하게 무너져 내렸다. 입었던 그대로 남아있는 환자복 위로 작은 소음을 내며 무언가가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코브의 팔목에 꽂혀있던 링겔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교수를 보았다.
"교수님, 무슨 짓을..!"
"자네도 이 정도면 알지 않겠나, 아리아드네 양."
노교수는 여전히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그 미소를 이해할 수 없었다. 교수는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은 채 아이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불안감에 젖어 다시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을 때, 불연듯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 저 미소를, 나는 본 적이 있었나?
명강의로 유명한 괴짜 마일스 교수. 연구실을 좀처럼 쓰지 않으려는 그 때문에 대학은 결국 전용 강의실 겸 연구실을 제공했다. 딱히 퉁명스러운 것도 아니었지만 감정표현에 능한 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하물며 그런 그의 저런 얼굴은.
퍼뜩,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진지해진 눈으로 교수를 쳐다보았다. 교수가 천천히 웃었다.
"이제 알았나?"
"..네. 저는.. 교수님, 저는 교수님께 림보 내에서의 이야기를 해드린 적이 없어요. 하물며- 교수님은 '사이토'가 누군지도 모르시잖아요."
더듬거리며 내뱉은 말들이 의구심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보이지 않았던 것이 명확해지는 것처럼. 숨을 들이쉬고,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꿈이군요."
"그래. 자네가 꾸는 꿈이라네."
마일스 교수는 순순하게 긍정했다. 교수의 온화한 표정이 처음으로 사라졌다. 장난기 어린 어린아이같은 얼굴을 하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아리아드네 앞에서 그는 팔을 뻗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친구에게 하듯 친밀한 동작으로 두드렸다. 아리아드네는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교수는 장난스레 웃음지었다.
"자네는 사라지지 않아. 심상의 것들과 다르게 진짜거든."
"네?"
"자네는 도미닉의 상태에 대해서 죄책감을 품고 있었어. 이 상황은 그 것의 반증이라네."
"..그래서 교수님이 온화한 얼굴을 하고 계셨군요. ..제가 그렇게 바랬으니까."
윤곽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는 것처럼 그녀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상황을 정리해나가고 있었다. 이어진 실의 끄트머리까지 생각의 손가락이 닿았을 때 그녀는 문득 다른 생각에 도달했다.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저도- 림보 속에 있는 건가요?"
교수는 여전히 미소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교수의 뒷편에는 안락의자가 나타나 있었다. 그는 그 곳에 깊이 앉아 등을 기댔다. 아리아드네는 느긋한 자세로 휴식을 만끽하는 교수를 긴장한 채 바라보았다. 탐색하듯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깨어난 기억이 없으니 이건 꿈이겠죠. 저는-"
"확인해보게. 이 곳이 어디인지."
"네?"
"자네도 갖고 있지 않나."
교수의 목소리가 상황을 끊었다. 그녀는 교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맑은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혀 한순간 시야가 이지러졌다. 아리아드네는 손을 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가 있는 옷이었는지, 아닌 옷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무의식에 떠밀리듯이 몸이 움직였다. 잠시 후 그녀는 손아귀에 쥐어진 물건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손을 빼들었다. 느리게 손바닥을 펴자, 그 곳에는 잠깐 사이에 더없이 익숙해진 물체가 무게감을 품고 있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퀸. 자신이 갖고 있었던 토템.
"네 꿈이라는 걸 알겠지?"
교수의 목소리가 변해있었다. 아니, 더이상 교수가 아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의 눈빛은 방금 전과 같았다. 묘하게 장난기 어리고, 차분하고, 그러면서도 뭔가 친숙한 그 눈빛. 시종일관 온화한 얼굴로 웃고 있었던 교수의 낯선 표정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아리아드네는 그 순간에 깨달았다. 그녀는 손안의 토템을 꽉 쥐었다.
"..코브."
남자는- 도미닉 코브는 처음 보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여자와 함께 있을 때 지었던 그런 표정을 지은 채, 어린 딸을 내려다보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다정한 얼굴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리아드네."
그는 다정하게 말하고 깍지 낀 두 손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더없이 온화해보였다. ..아니 그 모습은 '평온해 보였다.' 울음으로 시야가 흐려졌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 순간에 깨달았다. 뭐라 말하려는 순간에 그는 손짓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먼저 돌아가라고 했지? 나도 곧 갈 거야."
"아저씨, 저는-"
"괜찮아, 걱정 마. 이제 가도 돼."
남자는- 그는 홀가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눈물이 허공으로 떨어져내려 사라졌다. 아리아드네는 그를 향해 울듯이 웃었다. 그는 다시 손짓했다. 손안의 체스 말을 꽉 쥐고서 아리아드네는 뒤로 돌아섰다. 차마 크게 말할 용기가 없어 그녀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빨리 돌아와주세요. 현실에서라면 들릴 리 없는 소리었다. 꿈 속에서도 닿을지 알 수 없었다.
방문을 열자 그 밑에는 검은 허공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그녀는 그 허공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고마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어둠 속으로 뛰어내린 것과 거의 동시였다.
그녀는 다시 눈물 고이는 눈으로 웃었다.
..드네.
..아드네.
"아리아드네!"
그녀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손짓에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떴을 때 익숙한 남자가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임스."
"괜찮아?"
"..괜찮아요."
졸음이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비행기 좌석에서 담요를 덮고 누워있었다. 한손으로 담요를 들어 치운 후에, 그녀는 주머니 속에 넣었던 다른 손을 꺼냈다. 금빛의 체스말은 여전히 손 안에 있었다. 그녀는 그 것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끝으로 밀어 쓰러트렸다. ..현실이다. 다리 사이로 추락하는 그 감촉이 그녀의 정신을 현실에 묶어 놓았다. 임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패시브를 쓴 것도 아닌데 토템을 꺼내다니, 습관이 재대로 들었네."
"..네?"
아리아드네가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암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내가 틀린 말 했어?"
"..패시브를 안 썼다뇨? 저는 지금.."
"여행은 아까아까 전에 끝났어. 너는 선잠들었고. 그렇게나 꿈을 꿔댔으니 몸이 피곤했던 모양이지?"
"그럴 수가.."
"착륙 10분 전이야, 마지막 서비스나 즐기자구."
씩 웃으며 임스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스튜어디스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아드네는 홀린듯한 기분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들자 아서와 유제프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너머로 로버트 피셔가 앉아있었다. 생각에 잠긴얼굴이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도미닉 코브가 앉아있는 좌석은 그녀의 옆이었다.
두근, 두근.
고개를 돌려 본, 그 곳에는-
fin.
최근 영화감상용 SS를 따로 개설할까 고민중입니다..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