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남자가 처음 만난 것은 깊은 산중이었다. 달빛 아래 처연히 서 있는 여인을 보고 남자는 처음, 이 것은 괴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입을 굳게 다문 여인의 눈동자에 홀리지 않았다면 그는 들고 있는 낫을 휘둘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꽃과 같이 아름다웠고, 가는 눈매로 남자를 바라보며 가여이 고개를 기울였다. 남자는 손에서 낫을 떨어트렸고 여자는 그 손을 잡았다.

여인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남자에게 함께 살아주기를 청했다. 홀린 듯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시골 마을의 농부와 결혼할 만한, 그런 여인은 아니었다. 농삿일에도 타지 않는 하얀 피부와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은, 그 눈동자는 보기 드문 미색이었다. 몸가짐은 우아했으며 글을 읽고 쓸 줄 아는데다, 재색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사연이 있는 여자이리라 수근대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여인을 보고 있는 농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무지렁이 촌놈이던 농부에게 그녀는 하나의 신성한 무엇이었다. 그녀는 도무지 망가지는 일이 없었다. 흙을 손에 묻히고 낡은 옷자락을 허리까지 추켜올리고 있어도 그것은 어딘가의 그림인양 아름다웠다. 여인의 내리깐 속눈썹이 뺨에 그림자를 드리울 때, 농부는 이따금씩 자신이 만져서는 안될 것을 만지고 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함께 산 지 6년이 되는 해에서야 그들에게는 겨우 아이가 생겼다. 잘생기고 통통한 아들이었다. 어머니를 닮아 피부가 하얀 아들은 산모를 괴롭게 하는 일도 없이 쉽게 태어났다. 산파는 초산인데 이렇게 순산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고 혀를 내둘렀다. 피곤한 기색도 없이 아들을 끌어안은 여인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여인은 아들을 살뜰하게 돌보았다. 그녀는 시시때때로 아들에게 젖을 먹였다. 그 젖은 풍요롭고도 부드럽게 흘러넘쳤고 아들은 토실토실 살이 올랐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성장이 빨랐다. 신사에서 사온 부적을 아들 목에 걸어주며 농부는 근처의 다른 아기들보다 자신과 그녀의 아이가 훨씬 튼튼하고 건강하다는 것에 뿌듯해했다. 

지나가던 영주의 눈에 그녀가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그 작은 가족은 조용하고 행복했으리라. 지방의 영주는 결단력있는 호쾌한 성격이었으나 배려라는 기질은 어머니 뱃속에 놓고나왔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생각이 없는 남자였다. 그는 얼마 전 고대하던 장남을 얻어 기분이 매우 좋았다. 영지를 순찰하던 그는 들뜬 기분에 평소보다 멀리 갈 것을 명했고, 거기서 경국지색의 미인이 흙 위에서 손을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즉시 여인을 데려오라 명했다. 농영주는 그녀에게 성에서 일하라했다. 그녀는 영주를 향해 두려운 기색도 없이 아이와 남편이 있는 몸이니 그럴 수 없다 말했다. 심정이 불편해진 그는 화를 내려 했으나 여인의 당당한 태도 앞에서 어쩐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영주는 여인에게 그 대단한 남편과 아이를 데려오라했다.

아이를 안은 남편이 왔을 때 영주는 남편의 초라한 행색에 놀랐다. 아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촌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놀란 것은 튼튼하고 잘생긴 아기였다. 몸에는 살이 통통히 오르고 눈에는 총기가 있었다. 유모들 여럿이 달라붙어 돌보는 영주의 장남이 아직도 작은 목을 가누며 가늘게 우는 것을 생각하면 일개 농부의 아들이 이렇게 장건할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가 참으로 잘생겼다, 그렇게 영주가 말하자 농부는 아이를 쓰다듬으며 제 어미의 젖이 풍요로운 탓입니다, 하고 웃었다. 영주는 여인에게 자신의 아이의 유모가 되라 했다.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젖을 먹일 수 있는 아이는 세상에 하나뿐입니다. 또렷한 여인의 목소리에 영주는 속이 뒤틀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여인의 아기가 돌연 사라졌다 시체로 나타난 것은 그 이틀 후였다.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던 여인은 밭께에서 발견된 아이의 주검을 끌어안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 옆에서 농부는 목이 쉬도록 울었다. 아이를 묻고 다시 이틀 후에 영주는 여인을 불러들였다. 아이가 죽었다 들었다. 내 아이를 돌볼 생각은 없는가.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영주는 그렇게 물었고,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무사해서 다행일세. 아이는 하늘이 주는 것이니 또 낳을 수 있겠지. 거들먹거리며 말한 영주 앞에서 고개 숙인 여인은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인은 영주의 성에 찾아가 영주의 장남에게 젖을 먹이는 일을 반복했다. 흙이 묻은 손으로 아이를 받아안는 여인의 행태에 궁중여인들은 질겁했으나, 여인의 젖을 먹은 영주의 아들은 과연 튼튼하게 자라나기 시작해 그런 궁중여인들의 입을 다물게했다. 아기는 기운차지고 눈빛에는 총기가 돌았다. 영주는 흐뭇해하며 자신의 명에 따라 농부의 아기를 훔쳐내 배개로 눌러죽인 늙은 여인에게 상을 내렸다.

여인의 젖을 먹은지 한달남짓 되었을 때 영주의 장남은 불연듯 고열을 냈다. 몇번이고 발작을 일으키며 눈을 까뒤집는 어린 아기를 보고 영주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무엇을 먹여도 넘기지 못하고 죄다 토했고 가는 숨을 할딱거리며 이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영지 내의 모든 의사가 조치를 취했으나 아기에게는 변화가 없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할 때 영주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인을 불러들여 다시 젖을 먹일 것을 명했다. 여인은 묵묵히 가슴을 풀어헤치고 젖을 먹였다. 과연 아이가 기운차게 울어내기 시작했다. 영주는 기쁨에 차서 아이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아기의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유모들이 달려와 안아들었으나 아이는 불에 댄 듯이 울어댔다. 급기야 영주가 아이를 뺏어 안고 얼르기 시작했으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기를 반 시각, 돌연 아이의 숨이 멎었다. 격노한 영주가 여인을 노려보았다. 여인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살풋 웃음을 띄웠다.

그러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젖을 먹을 수 있는 아이는 세상에 하나뿐이라고.

소리지르려던 영주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고 당황해 여인을 바라보았다. 대충묶어올린 머리에 낡은 옷을 걸치고 있던 여인의 행색이 돌연 변했다. 열두겹의 옷자락 위로 연자주빛의 하늘거리는 천이 보였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는 매끄럽게 여인의 등 뒤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한번 본적없는 고귀한 차림새로 돌아간 여인은 어투마저도 바뀌어있었다.

이 몸은 천상의 번개를 다스리는 여신이다.
지상에 내려온 것은 이 몸의 자유였으나 본디 여신은 인간사이의 아이를 만들 수 없다.
천제의 눈을 피해가며 기를 바꾸어 단 한번, 아이를 품을 태를 만들어 내 아이를 낳았건만.
듣거라. 내가 내 아이에게 주는 젖은 번개신의 기를 머금어 인간이 입에 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작은 그릇에 호수의 모든 물을 부어넣으면 그 그릇이 넘치기밖에 더하겠느냐. 깨지기밖에 더하겠느냐.
나는 분명 그 젖을 먹을 수 있는 아이는 하나뿐이라 말했다. 그런데도 너, 이 미욱한 인간이 그를 시기해 내 아이를 죽였구나. 금수만도 못한 네 놈의 목숨으로는 갚을 수도 없는 죄다.


영주는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아이를 돌려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여인은 눈짓으로 영주의 손목을 비틀어버렸다. 영주의 가신이 여인에게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베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가신의 온 몸이 새까맣게 타올랐다. 여인은 둥실 하늘에 떠올라 구름 너머를 향해 손짓했다. 번개로 된 용이 나타나 성곽을 태우기 시작했다.

영주는 부러진 팔로 죽은 아들을 껴안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그의 울음이 높은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정신을 놓은 그는 성한 손으로 닥치는대로 사람을 베었다. 불꽃이 그의 옷자락에 옮겨붙었다. 성과 함께 성주가 타들어갔다.

뒤늦게 성이 화재로 전소했음을 안 농부는 달려와 그 안에서 죽었을 아내를 생각하며 울었다. 흙 위로 눈물을 떨구며 꺽꺽 울음을 토하는 그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올려다보니 그 곳에는 평소처럼 낡은 옷을 걸치고 머리에 두건을 쓴 아내가 있었다. 그는 울며 아내를 끌어안았다. 그 품에 고개를 기대고 서 있던 여인은 나직히 말했다. ..돌아가지요.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가 밭을 일구며 살았다. 여인은 전이나 후나 한번도 성에서의 일을 입에 담지 않았고, 농부도 묻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농가집의 사람들처럼 함께 살았다. 다만 그들의 밭은 한번도 재해를 입는 일없이, 홍수도 가뭄도 없이 항상 평화로웠다한다.
Posted by 네츠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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