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사,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모든 것을 기억해요.
비좁고 꽉 차있던 협소한 공간이 내 기억의 시작입니다. 그 곳은 너무나 답답해서 나는 몇번이나 몸을 비틀어야만했어요. 한번은 저항하기를 포기한 적도 있었죠. 그러나 생명을 멈춘 그 순간에 저항하는 것보다 저항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든 것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나를 조여오던 좁은 공간과 내 거칠고 단순한 숨. 세상은 비좁은 주머니였고 나는 숨쉬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괴로운 살덩어리였어요. 마침내 내 좁은 세상이 나를 견디지 못하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을 때에, 그 주머니를 찢고 들어온 것은, 그래요. 당신의 손이었어요, 엘사. 내 세계 속으로 들어온 최초의 이물질. 나를 끄집어낸 최초의 손. 나에게 닿은 최초의 감촉. 그게 당신이었어요. 엘사.
물론 당신도 알다시피 그 손은 나를 감당하지 못했어요. 내 일그러지는 세계를 찢어발긴 것은 당신이 아니라 클레이브의 메스였죠. 그리고 그는 나를 꺼내 가두었고요. 당신은 나의 독에 당해 몸부림쳤죠.
- 당신의 손이 내게 닿고, 당신은 독에 당하고, 클레이브는 당신과 나를 둘 다 떠맡아 다독였던 그 날.
어쩌면 그 후 내 삶은 매번 그 식을 반복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모든 것은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어요. 당신은 매번 내게 손을 뻗었다가 상처입고, 나는 울고, 클레이브는 곤란해하는 그런 나날들. 파문이 커지듯 모든 일이 확대되고 커지면서도 따르는 수식은 최초의 그 것과 같았지요. 그저 당신의 피를 타고 흐르는 이 독만이 거듭 더 강해졌을 뿐. 더 깊은 고독을 품었을 뿐. 내가 태어나던 그 날, 내가 들어있던 자궁 속에 손을 뻗었던 당신은 독에 당해 몸부림쳤지만, 그러나 생각해보세요, 엘사.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 시절 우리들을 둘러싼 독은 참으로도 연약하고도 온유한 그런 것이 아니던가요. 그 때의 독은 누구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기지 않았고, 그 시절 우리들은 미지의 세상에 대해 호기심과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클레이브도, 당신도, 그리고 나도. 하지만 나의 삶은 원초적이고 무지했고, 당신들의 삶은 복잡하고도 잔인했어요. 그게 우리들의 시작이었죠. 종말의 이름이었고요.
이제와 고백하건대 당신이 매번 그랬듯, 마지막까지 나에게 다정했다면, 그리고 나를 안아주었다면, 나는 어쩌면 변하거나 무너지는 일 없이 마지막까지 당신의 곁을 지킬 수도 있었을 거에요. 세상을 갈구하고 또 갈구하면서도 나는 결국 당신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매번 돌아섰고, 매번 고개를 숙였었으니까요. 그 광대한 세상 속 작은 헛간에 몸을 쑤셔박고 내 본능을 옥죄이면서도, 나는 당신들의 포옹에 숨이 막히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눈이 멀어 고통조차 잊곤했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말은 달콤한 동시에 차갑고 잔인했지요.
따스하던 당신이 이따금씩 차가운 목소리와 서릿발 어린 몸짓으로 나를 억누르고 소리지를 때마다 나는 움츠러들어 떨었습니다. 파도에 실려가는 작은 나뭇가지처럼 그 때의 나는 무력했어요. 그러나 그 때에도 싸늘함은 부모가 아이에게 하듯 틀린 것에 대한 엄한 가르침이었어요. 무력하고 괴로웠던 그 때의 나에게, 지금이라면 그 것이 온기어린 말이었다고 달래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성장하고, 당신이 괴로워졌을 때, 그 때의 모든 말들은 아마 그렇게는 넘길 수 없었겠지요. 엘사. 당신도 이해하고 있죠. 당신이 당신에게, 당신의 일부인 나에게, 더없이 잔인했다는 것을.
내가 당신의 평범한 아이였다면 그 것은 좀 더 알기 쉬운 형태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한번도 들여본지 않았던 당신의 집. 양철통이 한가운데에 놓여있던 지저분하고 조그만 방. 당신이 버릇처럼 찾아가 잠들었던 그 작고 좁은 곳. 그 곳은 당신의 헛간이었겠죠, 엘사. 웅크리고 자는 당신은 과거에 나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혹은 내가 미래의 엘사였을까요. 아이를 사랑하지 못한 여자의 딸로 태어나서 나를 만드는 동안,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태어나지 않은 아이, 과학의 영광, 혹은 유년시절 망가진 자신에 대한 연민. 무엇이었든, 내 피를 타고 흐른 당신의 DNA는 선명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의 분신을 달래줄 수 있을만큼 자신의 상처에 강한 여자가 아니었어요. 가없게도, 슬프게도. 괴롭게도.
나를 학대하던 당신의 목소리는 당신 피 속에 고인 독의 목소리와 같았습니까. 당신에게 덤벼든 나를 순식간에 딸에서 짐승으로 격하하던 당신의 의지 속에서, 죽은 당신의 어머니는 어떤 미소를 지으며 딸의 피를 타고 도는 독을 감상했을까요. 그 냉혈하고 차가운 독은 당신의 몸을 한바퀴 돌아 다정함을 빼앗고, 차갑게 굳은 당신은 나를 향해 그것들을 쏟아냈습니다. 이상하죠. 대부분의 당신은 더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피에 젖은 꼬리도, 고통도, 당신이 나를 보는 눈도. 일그러진 애정도. 그 모든 것은 내 안에 응어리져서 당신과 그를 미워하게 하고, 마침내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깊은 독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칼을 들이댔듯, 당신을 범하는 나의 원초적인 쾌감은 한없이 잔인했지요. 열로 흐려져 미쳐있는 내 머리 속에서 나에게 사정하던 클레이브과 당신 안에 사정하던 내 자신이 어지럽게 뒤섞여 극채색의 화면을 만들었습니다. 독과 열기와 분노로 빨갛게 흐려져 미쳐있던 그 모든 순간들. 수컷인 아버지와 암컷인 어머니 사이에서 미쳐버리던 그 순간, 내 안의 유전자는 높고도 잔인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어요, 엘사.
그러나 엘사, 이제와 너무 늦었으나, 나는 당신과 클레이브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기억의 시작부터 끝까지 유일하게 내 곁에 있었던 당신들을 내가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나는 그 마음을 어떻게 뱉어내야할지 방법을 알지 못했고, 당신들도 그 것을 내게 가르쳐주지 못했을 뿐이지요. 가엾게도, 슬프게도.
그 때 내가 받은 행복이 진실이듯 나를 사랑한 당신도, 클레이브도 진실이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덧없이 외로워졌듯, 당신들도 나를 사랑한 직후부터 나에 대한 애정이 희미해져가기 시작한 것이었겠죠. 당신이 꿈꾼 현실과 눈 앞의 상황이 달라져갈때마다, 손쓸 수 없는 당신의 아이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매 순간마다 당신은 나를 인간으로 볼 것인지, 실험체로 볼 것인지를 고민하고 당신의 아이로 볼 것인지 괴물로 볼 것인지를 고민하곤 했지요. 그리하여 모든 것이 일그러져버리는 그 순간이 왔을 때야 당신은 깨달았겠죠. 당신은, 나는, 우리들은 의미도 없고 해답도 없이 괴롭기만한 모든 순간들을 반복했을 뿐이었다고. 그저 그 뿐이었다고.
양철통이 놓인 방안에서 낮은 바닥에 앉아 높은 창문을 바라봤을 어린 시절의 당신은 저와 닮아있는지요. 내가 그 나무로 짜여진 헛간 속에서 깊은 외로움을 느꼈듯 어린 당신도 그 곳에서 괴로웠을까요. 세상이 미지의 것에서 다시 나를 제한하는 거대한 우리로 바뀌었을 때 느낀 당혹감처럼, 당신은 당신의 배를 온통 채우고 있는 태아에게서 옥죄인 자신의 현실을 되받고 있나요. 이번에야말로 아이의 어머니가 되기보다 과학의 어머니가 되기를 택한 당신은, 지금 평안하십니까.
fin.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