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어린아이치고 그는 체육 선생님의 어깨밑까지 오는 큰 키였다. 허우대만 멀쩡한 놈이라며 애정어린 손으로 어깨를 한번 치면 우씨,하고 어린애다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저만큼 달려나가버리는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생생했다. 얼마나 날래고 아름다웠는지. 앞에 나서는 일 없이 책에 고개를 묻고 앉아있던 어리고 작은 그 시절의 나에게 그는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아마 그는 자신을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같다. 신은 결코 그처럼 쉽게 자신의 광명을 나눠주지 않았으리라. 방과 후 청소 시간, 그를 대신해서 책걸상 끄는 것을 도와주었던 작은 일 하나로 그는 소년신에서 나의 친구가 되었다. 책을 읽던 나를 아이들 앞으로 이끌어낸 것도 그였다. 남들 앞에 한번도 나서본 적이 없었지만 그 때의 나는 그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감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나에게 내밀어주었던 경의로운 손은 결코 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끄는 것에 따라 앞으로 나아갔고, 중심으로 걸어들어갔다. 꿈같은 시절이었다.
그의 손을 참 좋아했다. 또래보다 큰 그 손이 내 손을 붙잡으면 나는 거의 형이나 아버지에게 손을 붙잡힌 어린 동생같은 기분이 되었다. 아마 그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결코 참을성많은 성품이 못되었다. 변덕스럽고 기분파였던 그의 행동은 어느 날은 누군가를 친구로 삼고 다음 날은 다시 적으로 만들곤 했었다. 그러나 그 폭풍같은 변덕은 결코 나를 향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항상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어디든지 함께 가자며 그렇게 태양처럼 웃었다. 나는 항상 그에게 이끌려서 걸었다.
가정방문의 날이 되면 그는 나이든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학교를 찾아왔다. 나는 이름도 모를 번쩍거리는 장신구를 걸친 어머니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는 내게 손을 흔들고 자신의 할머니를 소개했다. 할머니는 주름을 짙게 잡으며 나를 보고 웃어주었다. 어머니는 내 곁에 없었다. 나중에 그를 만났을 때도 결코 할머니가 내게 해준 것처럼 그에게 웃어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두툼하고 하얀 봉투를 고개숙인 선생님 앞에 내밀고 나서 바쁜 듯 가버렸다. 혼자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는 나를 그가 불렀다. 나는 그와 그의 할머니와 함께 손을 잡고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된장국에 밥을 말아주었고 나는 그와 뒷산에서 놀았다. 그가 눈물이 나도록 부럽고도 아름다웠다.
가정형편에서 성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속성은 거의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와 내가 친구가 되었을 때 주변은 다들 이상하게 여겼다. 아마 내가 그에게 휘둘리고 있는 심약한 애정도로 비쳤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가 내게 부당한 요구를 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돈을 지불하거나 먹을 것을 사주거나 하는 그런 흔한 일도 없었다. 그는 그저 동생과 노는 형처럼 나를 대했다. 싸고 달콤한 하드를 먹으며 낣은 기왓집 마루에 누워있는 여름은 천국이었다. 학습지도 학원도 가정교사도 없었다. 가끔 그 마루에 누워 팔씨름을 했다. 또래보다 큰 그의 손은 항상 나를 이겼다. 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고이듯이 맺힌 마루 위에서 붙잡은 그의 손은 땀으로 젖어 끈적거렸고 젖은 열을 내었다. 그 것이 부끄럽도록 좋았다.
고교에 진학했을 때도 나는 그와 같은 학교로 갔다. 어머니는 화를 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많이 자란 나는 일찍 성장이 멈춘 그보다도 조금 더 커져있었다. 그는 내 어깨를 치며 꼬마주제에 너무 빨리 자란다고 웃었다. 나도 멋쩍어서 웃었다. 우리는 함께 자율학습시간동안 공부를 했다. 그는 예전처럼 선생님의 사랑을 받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반의 주역이었고 활기찼고 눈부셨다. 나는 여전히 그를 동경했다. 2학년이 되었을 때 그는 한 살 어린 여후배와 교제를 시작했다. 작고 여리고 방울처럼 웃는 여자애였다. 두 사람은 행복해보였다. 더블 데이트를 하자며, 여친을 만들라고 그가 놀리듯 웃었을 때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저 키가 그를 앞질러버렸을 때처럼, 멋쩍게 웃었다.
3학년 때 그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웃으며 반겨주던 그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목이 쉬도록 울었다. 나도 함께 울었다. 둘다 소금기어린 눈물로 지칠만큼 울었을 때, 방울소리처럼 웃는 아이가 찾아왔다. 그녀를 맞이하는 그는 울지 않았다. 빨갛게 부은 눈으로 그는 엉엉 울고있는 여자친구를 끌어안아주었다. 상냥한 할머니는 그의 여자친구에게도 무척 다정한 분이셨던 모양이다. 할머니가 내게 그렇게 해주셨던 것처럼.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목이 쉬도록 우는 그녀를 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그 장소를 빠져나왔다.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녀를 달래주던 그가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고마워. 입모양이 그렇게 말했다. 그는 내 앞에서 울었던 것처럼 그녀 앞에서 울지는 않으리라. 그 것을 알았다. 나는 집에 와서 또 조금 울었다.
그는 학교를 자퇴했다. 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대에 진학했다. 스포츠 동아리에 들었다. 그는 취직해서 가정을 꾸렸다. 결혼식장에는 대학교에 갓들어간 고교동창들이 전부 몰려와 축하해주었다. 신부화장을 한 채 발그레하게 뺨을 붉히고 웃는 그녀는 여전히 방울처럼 고왔다. 수백명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굵직한 목소리로 축하해주는 동안, 나는 그의 곁에 서 있었다. 동생이나 형제라도 되는 듯한 자리에 서서 축의금을 받았다. 내 봉투에는 아무 것도 쓰지 않고 대학에서 받은 첫 학기 장학금을 전부 넣었다. 이름도 적지 않은 채 신부쪽 봉투들 사이에 섞어두었다. 나중에 그는 전화로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그는 웃었다. 짜식, 내가 니 형님이다. 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는 밝고 행복해보였다. 나는 웃으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화를 끊고서 나는 울었다. 눈물은 그 밤처럼 많이 쏟아져내리지는 않았다.
다음 10년은 바쁘게 지나갔다. 의대 생활은 허투루 눈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 것이 나의 변명이 되었다. 가정을 꾸린 그의 걸음은 예전처럼 밝고 변덕스럽지 않았다. 진중하고 성실한 나무처럼 그는 자신의 일을 해나갔다. 그는 나와 만날 기회가 적어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나는 그와 마주칠 기회가 적어지는 것이 살을 에이듯 슬프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지는 못했다. 미친듯이 공부에 매달려 앞으로 뛰쳐나갔다. 나를 잡아줄 손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잊기에 바쁜 나날들은 딱 좋은 방파제였다. 그와의 거리가 멀어질 수록 나는 더 도망칠 수 있었다. 내 유년시절에 가장 빛나는 것들에 대해서, 내 가장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에 대해서 전부, 전부 도망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도망친 장소에서 내 남은 삶을 보낼 수도 있었다. 이따금씩 기억들이 파도처럼 되살아나도 입을 다물고 조개처럼 가라앉은 채 수면 아래에 잠겨 있을 수도 있었다. 시간은 빠르고 무심하게 흘렀다. 왜 사귀는 아가씨가 없냐며 물어오던 어머니의 다분히 계산적인 타산에 점점 짜증이 섞여들어가기 시작하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일 핑계를 댔고 외과의사에게는 어머니가 원하는 정기적인 휴일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어머니가 잡아오는 높은 분 따님들과의 선자리를 쉽게 거절할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아름답다고 생각한 동기 여성은 단 한명뿐이었다는 것을 나는 어머니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식장에서 방울소리처럼 웃는 그녀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핏대를 올려 소리를 지를 것이 뻔했다. 그러니 그녀가 아름다워보인 이유를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그의 곁에 서 있는 그녀가 아름다웠노라고, 그런 말은 어머니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저 조용히 침묵한 채 내 남은 삶을 조용하고 고요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그와의 재회가 아니었다면, 정말 그렇게 했었을 것이다.
-어떻게 여길 다 와줬냐. 아, 의사였지 참. 내 담당의가 너야?
14년만의 재회였다. 그는 병상 위에서 누워있었다. 나는 흰 가운을 입고 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반갑게 웃는 얼굴이 파리하게 말라있었다. 나는 차마 입을 열지도 못하고 그를 응시했다. 시트 위에 누워있는 그는 내가 기억하는 그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웃음도 내가 아는 웃음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눈도, 얼굴도, 손도. 태양아래의 신록같았던 목소리는 겨울철의 나뭇가지처럼 빼빼 말라 쉬어있었다. 그러나 그는 눈동자에서 손끝에 이르기까지 전부 변함없는 그였다. 한걸음 걸어 침대에 다가갔다. 오랜 병원근무 기간중에서 처음으로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병상에 누운 그의 메마른 손위에 손을 겹쳤다. 그는 놀란듯 눈을 크게 떴지만 그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 손은 기억 속의 손보다 한참 작고 약했다. 나는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네가, 왜. 그는 씨익 웃었다. 그렇게 됐어. 여전히 밝은 그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태양같았다. 손이 닿은 자리에서부터 감정이 되살아났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모래처럼 무너져내렸다.
- 위암이래요. 발견됐을 때는 이미 늦어서..
방울처럼 아름답던 그의 그녀는 내 손을 붙잡고 울었다. 내가 보지 못했던 14년보다 그가 쓰러진 8개월이 그녀의 젊음을 좀먹은 것같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핏기없는 그녀의 얼굴은 구슬펐다. 나는 그 어깨를 안고 울었다. 그녀는 내 품에 안겨서 울었다. 고개 숙여 우는 그녀를 보고 고등학교 시절의 장례식을 생각했다. 거기서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달래주었고, 나는 그를 끌어안고 달래주었다. 14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두 사람의 눈물을 모두 위로해주고 싶었다. 할수만 있다면 나는 내가 숭배했던 남자와 그의 가족을 위해서 생명이나도 내바쳤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병상에 누워서 그는 자주 내 손을 붙잡고 이야기를 했다. 내가 없었던 그의 14년 동안에서도 그는 한결같이 성실하고 눈부신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주 내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나는 병원비밖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가슴아팠다. 그 말을 입에 올리는 대신 나는 완쾌하면 이자를 붙여서 돈을 내놓으라 했다. 그는 친구를 상대로 돈놀음이냐고 웃었다. 낫기만 하면 두배로 만들어 던져주겠다고 그는 주먹을 흔들었다.
그러나 다음 3개월에 걸친 네 번의 수술과 정기적인 방사선도 그의 장기에 전이된 암덩어리들을 떼어내지는 못했다. 시한부 선고 이후에 그보다 내가 더 많이 울었다. 그는 파리한 입술로도 어린 시절 그랬듯이 나를 토닥이며 웃어주었다. 마른 그 손가락은 여전히 과거처럼 강했다.
그의 퇴원 이후 나는 그의 가정에 자주 놀러갔다. 아홉살짜리 그의 아들은 죽음을 어렴풋이 아는 나이였고 다섯살짜리 그의 딸은 아무 것도 모르는 꼬마숙녀였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그 두 사람에게 아버지의 죽음이 그리우는 그늘들을 걷어냈다. 그 두 아이만이 아니라 그녀와 그에게서도 걷어내고 싶었다. 실제로 그와 그녀는 그렇게 했다. 병세가 악화되고서도 그 집안은 평화롭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이따금 먹은 것을 게워내는 때에도 그의 아이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어머니와 함께 웃고 있었다. 나는 그를 끌어안고 그가 토해내는 음식과 선혈들을 받아냈다. 힘없는 손가락이 갈고랑이처럼 내 팔을 붙들때마다, 고통으로 그의 허리가 휘청일때마다 나는 서러워서 울었다. 그는 울지 말라며 나를 끌어안아주었다. 다독여주는 그 팔이 과거를 살려냈다. 그를 안고서, 그의 팔에 안겨서 나는 입술을 깨물며 오열했다. 살을 에이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마른 입술로 내 이름을 부르며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는 내게 항상 기대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실상 그에게 기대고 있던 것은 나였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그는 1년 6개월을 더 살았다. 젊은 사람의 암진행이 빠르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그의 젊은 몸은 오래 버텨준 셈이었다. 그녀와 함께 그를 화장해 뿌렸다. 하얀 뼈가 된 그를 날리며 나는 내 안의 무언가도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어 부는 바람을 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녀에게 내가 그와 알아온 지난 긴 시간동안, 그가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그녀는 어느 부분들은 모르고, 어느 부분들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지 않은 쪽이 그녀와 나에게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먼저 일어났다. 빨갛게 부은 눈으로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겠다고 했다. 바래다주겠다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이를 보낼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처음만났던 시절처럼 방울같았다. 나는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이 강둑으로 사라지는 것을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나는 다시 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흙먼지 섞인 바람이 휘익 길게 불어 강위를 지나갔다. 나의 기억들도 그 강 위를 흘러갔다. 그와의 추억들을 늘어놓았다. 앞서서 뛰어가던 걸음, 태양처럼 환하던 웃음, 싸구려 하드가 녹아서 떨어져내리던 흙길, 서늘한 바람이 스쳐지나가던 여름날의 마루.. 그 모든 기억들을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놓지 않을 것처럼 붙잡고 있었던, 그의 손을 생각했다.
fin.
숙제가 있으면 손이 부지런해지네요..
임대 연성스레. 키워드, 친구, 병, 기억.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