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옅게 웃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와주게.]
전자기기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현대의 가재도구조차 가까이하지 않으려하는 그가 단 한마디만을 남겼던 그 때. 그 목소리가 지독히도 쉬어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전화기에 찍힌 번호가 그가 아니라 그 녀석의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니 어쩌면 훨씬 이전부터.
다른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끊어진 전화의 자취를 따라 뛰어간 곳은 도심 한복판의 호텔이었다. 그 호텔의 최상층은 녀석이 곧잘 좋아라 묵는 곳이었다. 두번 망설이지도 않고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맨 윗층에는 한 개의 방 밖에 없었다. 어디에서도 두려워한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은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있었다. 카드 키로 잠겨있는 방문에 총을 난사해 걸레짝을 만들어버리고 방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안쪽의 침실을 열어제끼는 순간, 이유도 없이 지독하게 나쁜 예감이 들었다.
「..왔나.」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멈추어섰다. 이시카와 고에몬. 오랜 친우이자 동료인 그는 평소 습관대로 침대 위에 눕는 대신 그의 검을 껴안고 양반다리로 침실 바닥에 앉아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렸던 목소리 그대로 그는 몹시 지쳐있는 얼굴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 총이 까닭없이 무거워 떨어트릴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무슨 짓을 한 거냐, 고에몬.」
「보면 알지 않나.」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피에 젖은 검을 품에 안고 있는 그의 옷은 빨갛게 젖어있었다. 절대로 그답지 않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앞섶과 끈이 풀린 하카마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생각나게했다. 지겐은 고에몬에게 손을 뻗었다. 사람 손 타는 것을 싫어하는 고에몬이었지만 이 순간 그는 자신의 뺨을 쓸어내리는 손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쓰다듬는 것과는 거리가 먼 거친 손길로 그의 뺨을 흝어낸 지겐은 예상대로의 결과에 혀를 찼다. 고에몬의 전신을 적신 피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끝났다면. 자신이 그밖에 보지 못했었다면 웃으면서 그를 들쳐업고 이 방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리의 힘이 풀려 지겐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독한 피냄새 속에서 지겐은 망연히 형체조차 남지 않은 잔혹한 시신을 바라보았다.
「..왜..」
「설명이 필요한가.」
새빨간 피가 낭자한 바닥은 이미 말라붙어서 양복에 달라붙지도 않았다. 그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지겐은 주저앉아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깨닫고 지겐은 주먹을 쥐었다. 잇 사이로 새어나간 말은 감정을 다 담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했다. 기력을 모두 상실한 듯한 친우는 옅게 웃었을 뿐 대답도 주지 않았다. 지겐은 손으로 입을 덮었다.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곁에 앉은 그를 평온하기까지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고에몬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탁할 게 있어서 널 불렀다, 지겐.」
「...」
비참한 현실 앞에서 지겐은 그의 말에 대꾸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그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그러나 더 짐을 얹어주게 되어 미안하다는 듯이, 고에몬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죽여줘.」
「너..!」
시야가 새빨갛게 되는 것같은 분노가 치밀어올라 지겐은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이. 눈 앞의 이 자식이. 미쳐버릴 것같은 기분으로 서 있는 지겐을 올려다보다 말고 고에몬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피에 젖은 검을 품에 끌어안은 채 그는 평소의 그다운 말투로 담담히 말했다.
「너에게는 나에게 분노할 이유가 있어. 자격도 있다.」
「웃기지마」
「나는 이제 살아갈 이유가 없어.」
「..네 검은! 네 정신은!!」
견디지 못하고 지겐은 그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분노와 절망으로 미쳐버릴 것같은 그 앞에서 고에몬은 이미 다 타버린 자처럼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상대의 모습을 비치지도 않는다는 양 품에 안고 있던 검을 쓰다듬었다. 이시카와 고에몬과 오래도록 함께해온 그의 분신은 피에 젖어 붉은 날을 드러내고 있었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고에몬이 웃었다.
「...그를 베었을 때 이미 부러졌어.」
「..고에몬!!!」
권총의 격철이 쇳소리를 냈다. 그가 그 말을 입밖에 내는 순간에 상황은 현실이 되었다. 저기 쓰러져있는 무참한 시신이 누구의 것인지 지겐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상황이 그에게는 너무 잔혹했다. 그러나 고에몬은 지금 그 말을 입에 담았다. 모든 것이 꺾여나간 망자의 눈을 하고.
「..왜 쏘지 않나.」
「닥쳐!!」
지겐은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지겐의 주먹은 고에몬을 맞히지 못하고 뒤에 꽂혔다. 고에몬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너진 것은 지겐 쪽이었다. 피에젖은 그를 덮듯이 해서 지겐은 괴로운 듯 무릎을 꿇었다.
「너만 아니었다면.. 너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였어. 목 안쪽에서부터 새어나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처절했다. 그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고에몬은 자신을 덮을 듯이 쓰러진 친우의 어깨에 살짝 고개를 숙였다. 뺨을 스치는 그의 긴 머리카락이 까슬까슬했다.
「미안하네, 지겐」
피투성이가 된 입꼬리를 힘들게 끌어올려 한번 웃고는, 그는 체념하기라도 한 것마냥 눈을 감았다.
fin.
지겐과 고에몬은 루팡이 뭔짓을 하든 다 용서해줄 것같고 동인적 시각으로 봐도 후지코한테 질투할 타입은 아니죠. 그래도 때때로 루팡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후지코 누님이 널 벗겨먹지 않았다면 넌 진짜 희대의 나쁜놈으로 보였을 거다 루팡..
친구와 이야기한 '루팡 진짜 싫은 남자지 죽여버릴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어☆'의 결정판.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