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토키~ 니, 여자 안아본 적 없제?"
"긴토키다. 이자식아. 남이사 안든 말든."
"안아봐라. 난중에 후회한다."
"너나 잘하셔."
"정말이다. 뭐든 간에 남은 게 있어야하는기라. 없어지고 나면 후회한다 니."
웃기지도 않은 술자리에서, 웃기지도 않은 친우 녀석의 목소리는 드물게 진지했다. 피를 피로 씻어내는 매일에 여자는 무슨 빌어먹을 여자냐고 쏘아붙여주고 싶었지만 그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입도 재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농으로 이어질 줄 알았던 바보같은 말투 끝에서 진심이 뚝뚝 묻어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웃을 수도 없어졌다.
"지킬 게 뭐 한치라도 있어야 안 무너진다 아이가. 품어갈 거 하나쯤은 찾아봐라."
"넌 있어서 그런 소릴 하냐."
"나야 넘치제. 닌 없고."
"..."
"..하기사 신스케, 고마는 뮌 헛소리냐고 비웃긴 하드라만."
우울하게 떨어져 내리던 말끝에 농같은 이름이 다시 붙었다. 남의 이름은 죽어라 틀리는 주제에 다카스기는 신스케냐, 그렇게 말했더니 까만 눈을 댕그랗게 반짝이던 사카모토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니 이름 틀렸나? 은연중에 쏟아져나온 사투리에 입을 한번 후려쳐주려다가 손을 뻗어 잔을 집었다. 술병 목을 집어드는데, 부드러운 손이 그 병을 뺏어갔다.
"자작하시면 이 손이 부끄럽습니다."
맑게 울려퍼진 목소리에 놀라서 옆을 보았다. 곱게 차려입은 여성은 입꼬리만 살짝 들어 미소지었다. 나라를 지키는 양이지사 나으리 어쩌고 하며 자리를 내준 주인이 객잔에 딸린 기생을 들여보냈었다는 건 어느 틈에 까맣게 잊고 있었더랬다. 스물 두어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짙은 검은 머리카락에 하얀 피부를 한 미인이었다. 주춤거리는 사이에 고운 손이 술잔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여인의 소매자락에서 옅은 향이 코를 스쳤다. 말문이 트인 소년기부터 전장터만 누비고 다녔던 긴토키다. 가츠라처럼 타 번까지 달려가 포섭을 시도하고 정부와의 연계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기라도 했다면 술자리라도 익숙해졌을지 모르지만, 그는 그런 곳에는 도무지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은 낯선 여인에게 묘하게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잔을 집었다. 소맷자락으로 입을 가린 여인이 가만히 미소지은 기분이 들었다. 맞은편에서 사카모토가 킥킥 웃는 소리가 나서 짐짓 눈을 부라렸다.
"사카타님이라 하셨지요."
"그..그렇소만."
"칼을 쥐고, 무섭지 않으십니까?"
"..무서우면 여기 있지도 않아."
어설프게 입에 달았던 무사 말투는 다음 말에 바로 찢어져 사라졌다. 여인이 눈을 내리 깔았다. 가늘고 짙은 눈꼬리에 젖은 듯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고개를 숙인 옆 얼굴은 단아하고, 기생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우아한 분위기였다. 먼 곳을 보던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정면을 본 눈동자는 생각보다 훨씬 짙었다.
"여인을 안아본 적이 없다 하셨지요."
"...."
"저는 어떻습니까."
"..무슨 농담을."
"싫지않으시다면."
겨우 그렇게 말했을 때 여인은 가만히 말하고,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까지는 조금 더 걸렸고, 어느 틈엔가 맞은 편에 앉아있던 사카모토가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훨씬 더 시간이 걸렸다. 누가 장난질을 친 거냐.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서려했을 때 여자는 가볍게 어깨를 잡았다. 손을 놓고 떠나면 된다는 머리의 소리를, 일순간 마음이 무시했다.
동정이었던 것도 같다. 애정이었던 것도 같다. 끌어안은 여자의 살결은 차가웠고 또한 따뜻했다.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미지근한 열을 품은 살갗은 전쟁터에서 겹쳐지던 지저분한 기억들을 한순간에 잊게 만들었다. 차가운 그 곳은 깨끗하고 고요했다. 매일같이 달려온 흙탕물 위의 전장이 거짓이라도 되는 양. 여자는 한숨처럼 숨을 내쉬고 꺼질듯이 이름을 불렀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흘러내리는 천을 집어올리듯이 어깨 위를 스쳐 빰에 닿았다. 어린 동생의 뺨을 쓰다듬듯 부드러운 손길로 그렇게 한번 끌어안고, 여인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저를, 데려가주시지 않겠습니까."
입속으로 중얼거리듯이 말한 여인의 목소리가, 촛불 위로 너울너울 떨어져 부서졌다.
가츠라가 각 대원들 앞으로 빼어둔 돈중 자신의 몫을 찾아 여인의 값을 치렀다. 주인의 입에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녀는 천인들이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몰락한 무사집안의 딸이라 했다. 집안이 풍비박산나고 가족들을 잃었을 때 홀몸을 이끌고 피난처를 전전하다 접대부가 되었다고도. 조용하고 교태가 없어 인기가 없는 아이였다며 주인은 기쁜 듯 돈을 세었다. 둔영에 여인을 데려왔을 때 아무리 그래도 사내들과 같은 방에 재울 수 없다며 가츠라는 안채의 방 하나를 비워주었다. 호기심이라도 생기는 양 여인을 보러왔던 다카스기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 돌아가버렸고, 사카모토는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길게 말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여인은 호롱불 아래서 바느질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여인은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긴토키는 그녀가 천인들이 들여온 신식 문물을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사카모토가 신식 물품이라며 화기에서부터 온갖 것들을 들이미는 동안 그녀는 결코 마당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껏 가져온 전등을 달아주었을 때도 그녀는 고개를 내젓고는 도로 내려달라 청했다. 부디 다른 분에게. 말이 길지 않은 그녀는 그 때도 또 그렇게만 말했다.
등잔불을 다시 달아주느라 한동안 긴토키는 안채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여인은 담담하고도 익숙하게 그를 맞았다. 가츠라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의 처소를 그녀의 옆방으로 옮겨버렸다. 장짓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호롱불 너머로 여인의 그림자가 비쳤다.
"오셨습니까."
"..다시 나갑니다."
"여벌 옷을 빨아두었습니다."
자신의 기척을 눈치챌 때마다 그녀는 조용히 그를 맞이했다. 나누는 대화도 길지 않았다. 처음의 그 날 이후로 둔영에 들어온 그녀와의 접촉은 좀처럼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바라고 그녀를 데려온 것은 아니었으나, 열 여덟살의 혈기어린 심정이 문득문득 치밀어오를 때마다 긴토키는 조금 우울해지곤 했다. 그녀는 둔영에서 보호하면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길게접은 목면 띠로 소매를 고정하고 부지런히 일만 하는 뒷모습을 보면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목 뒤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기라도 하면 또 목 아래에서부터 열이 솟아올랐다. 그게 고작이었다.
화장을 지우고 기생 옷을 벗고 햇살 아래에 선 그녀의 얼굴은 긴토키가 보았던 첫인상보다도 훨씬 애교가 없는 얼굴이었다. 꽃에 비유되기 보다는 오히려 곧게 뻗어올린 난초같았다. 그런데도 이따금씩 눈을 내리깔 때 긴 속눈썹이 뺨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볼 때면 그 것이 금방 스러져버릴 것같은 것이다. 어떻게 다가서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거기까지 생각했는데 기품이 있는 분이라 다가서기 힘든 거라고, 가츠라는 점잖게 평했다. 설마 속생각을 입으로 말하고 있었을 줄이야. 더욱이 잠입작전을 실시하던 도중에. 어버버하던 긴토키는 앞서가던 다카스기에게 걸려 넘어질뻔했고, 칼을 빼어들려는 다카스기를 한손으로 억누르며 사카모토는 입을 틀어막고 웃어댔다. 그 날, 잡입 작전은 성공해 무사히 감금되어있던 동료 몇명을 데리고 나오며 덤으로 천인들의 저택에 불까지 놓았다. 초췌한 낯의 동료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격전이 있었냐고 물었다. 칼질에 너덜너덜해진 하카마며 하오리에도 불구하고 가츠라는 보기 드물게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등 뒤에서 칼을 쥔 백야차가 씩씩거렸다.
"사카타님. ..아니 주무십니까?"
"안 졸, 아니 안 잡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을 붙여온 것은 근 3개월이 지난 후였다. 초여름의 달이 떠오른 깊은 밤이었다. 선잠에서 깨어 물이라도 마실까하고 나간 마당에 그녀가 앉아있었다. 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던 여인이 고개를 들고 그렇게 물어왔다. 여전히 호칭에 애를 먹으며 적당히 멋을 부려 대답했다. 여인은 아스라히 웃었다.
"아는 동생도 사카타님처럼 새벽에 일어나곤 했습니다."
"동생..입니까."
"친동생은 아니었고.. 동생같은 아이였습니다."
말꼬리를 흐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또 옅게 내려앉았다. 긴토키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 기둥에 머리를 기댄채,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저와 약혼한 사람이었습니다..목소리가 달빛에 스미듯 가볍게 떨렸다. 긴토키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천인들의 폭격에 휘말려 돌아가셨습니다. 제 가족들과 함께.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긴토키는 망설이다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인은 먼 곳을 응시한 채로 결혼식을 얼마 앞 둔 때였다고도 덧붙였다. 어린시절부터 함께 자라와 서로 허물없는 사이였다고도. 말이없던 여인의 목소리가 달빛에 스밀듯이 계속 밀려나왔다. 그 목소리가 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동안 긴토키는 말없이 들어주었다. 예단을 들고 남편될 사람이 집을 방문한 이야기, 함께 잠들었는데 자리가 없어 자신은 안뜰 구석의 행랑채로 나왔다는 이야기, 그리고 폭격에 거리 전체가 날아가고, 자신만이 살았다는 이야기.. 한이 배인 목소리는 처량하고도 구슬펐다. 길게 이어지는 목소리의 실들을 차근차근 귀에 담아넣던 긴토키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어깨에 고개를 떨구고도 여인은 울지 않았다. 그저 조금 피곤한 듯이 미간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 미간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여인이 어깨에서 힘을 빼고 품안으로 쓰러졌졌다. ---- 님. 여인이 마지막으로 입에 담은 이름은 흐느끼듯 흐려졌다. 누구의 이름이었는지 귀담아듣지는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다는 것만을 알았을 뿐이다.
"입적을 하고 싶어."
"제정신이냐?"
눈살을 찌푸린 것은 다카스기였다. 아직도 어린티가 남아있는 얼굴이 살쾡이같이 표독스러운 눈초리가 되었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방종을 용서하지 못하는 동료의 성격은 싫을 만큼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반응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을 든 친우가 한발 나섰다. 제지한 것은 가츠라였다.
"진정해, 다카스기."
"이게 진정할 일이야? 대의에 임한다는 놈이 계집에 홀렸는데? -귀병대원이었다면 지금 목을 쳤어!"
"그게 아이다, 다카스기."
"-넌 빠져!"
신경질적인 외침에도 상관없이 한걸음 앞으로 나선 사카모토는 예의 그 태도로 머리를 한번 긁적였다. 좀 곤란한 눈으로 긴토키를 위 아래로 흝어본 그는 푹, 한숨을 쉬었다.
"얌전한 괭이가 부뚜막 오른다캐도 속담일뿐이라꼬 했는데.. 니짝난기 보면 맞는갑다. 그리 좋나?"
"..."
"..마, 좋다 아이가."
고개를 돌리고 대답이 없는 긴토키를 위아래로 보다가, 사카모토는 별안듯 그 옆자리에 앉았다. 반쯤 어이가 없어 독이 빠진 다카스기를 위로 올려다보며 한번 씨익 웃고, 사카모토는 긴토키의 어깨에 확 자신의 팔을 걸쳤다.
"이제 내는 킨토키 편이다. 니 알아서 해라, 다카스기."
"사-카-모-토-!!!"
"좋은 게 좋은 기다. ..니 모르나. 아무 것도 없이 싸우러 가는 거, 그게 어데가 좋나."
열이 확 뻗친 다카스기가 다시 달려들려하다가, 갑자기 낮아진 사카모토의 목소리에 놀라 멈춰섰다. 긴토키는 그가 하려는 말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날에도들었던 말이었다.
- 텅 비어서, 뭐 하나, 손에 쥘 것도 없이 칼 휘두르면 좋나.
- 지킬 게 없어지면, 그건 무사가 아니다. 그냥 악귀인기라.
- ..니는 그래도 혼자 가겠나. 안 무너질 자신 있나.
술잔을 기울이며, 연상의 동료는 그렇게 말했다. 그와의 대화에서 처음으로 할 말을 잃었던 것같다. 평소처럼 정곡을 찌르는 목소리였고, 평소처럼 일이 끝나고 나면 나와 함께 가지 않겠냐고 농담처럼 끝내버릴 대화였다. 서로 교착점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그런 대화였다. 술을 따르겠다고 끼어든, 그 새하얀 손이 아니었다면.
다카스기가 머뭇머뭇 멈추어섰다. 두 팔 벌리고 막아서고 있던 가츠라도 멈추었다.
"-됐제? 임마한테는 짐 축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한 기다."
상큼하게 그렇게 말을 정리하고, 사카모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츠라가 그 뒤를 따라나갔다. 다카스기는 말없이 긴토키를 쏘아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하나 생각하는 사이에 몸을 돌린 친구는 그대로 걸어가버렸다. 자기 귀병대 소속 대원들을 보러가거, 뭐 그런 거겠지. 한숨을 쉬며 긴토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어떻게나 긴장했는지 그대로 쓰러질 것같았다. 바보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여인을 찾아가 입적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긴토키는 십 년분의 고민을 새삼스럽게 다시 했다. 그 여인을 곁에 들여도 좋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라면 벌서 끝났다. 허락을 얻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린 건 그 다음 일이었다. 함께 살아주겠습니까. 간단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를 눈앞에 두면 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칙적으로는 네가 산 몸이니 아내로 맞이하던 그렇지 않던 네 마음대로라고 가츠라는 담담한 얼굴로 충고해주었지만 그녀를 사왔다는 감각이 없는 긴토키에게는 처음부터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였다. 근 일주일을 고민하다가 정면으로 독대하고나서 어물어물 함께 살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얼굴이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도 기억에는 없다. 놀란 눈을 했던 그녀가 가느다랗게 웃었던 것만은 기억에 남아있었다.
"꼭 그렇게 하셔야겠습니까?"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저는.."
"나를.. 좋아해주실 수 없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그렇게만 물었었다. 여인의 미소끝에 슬픔같은 게 고였다. 가볍게 고개를 젓던 모습이 뇌리에 박힐 듯 새겨졌다. 뒷말을 쉬이 내뱉지 못하고 망설이듯 하다 그녀는 여전히 손에 들고 있었던 바느질 감을 내려놓았다. 옷감의 천을 가볍게 쓸어내리면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자신감이 없는 듯한 연약한 목소리가 애처롭고, 그리고.
"..당신을 잃게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서글퍼서.
손안에 쥔 것을 잃어버리는 게 두려운 그 기분을, 자신 또한 아플만큼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걱정스러운 여인의 시선을 앞에 한 채 어린아이처럼 웃어버렸다. 여인이 걱정스레 손을 뻗었다. 그 팔목을 잡았다. 품 안에 안은 여인은 여전히 작았다.
"죽지 않을 겁니다."
"..긴.."
"같이 살아주세요."
웃으면서 말하는 것은 쉬웠다. 그제서야 겨우 알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이리도 이 여자에게 시선이 갔는지. 혹은 함께 하고 싶었는지.
서로 닮아있었다.
상처받은 기억을 가진 것도, 허허로이 살아온 것도, 상실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무언가를 손에 쥐는 것이 서툰, 그런 점까지도 전부. 그래서 돕고 싶었고,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내가 보았던 빛처럼 내가 누군가에게 다시 줄 수 있다면. ..바라건대 그 것이 당신이기를. 겁많은 입은 마음에 새겨진 말을 전부 담지도 못했다. 그러나 품안의 여인은 침묵 후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끌어안았다. 위로하듯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삶의 방식은 과거와 같았고 그중에 조각처럼, 한 여인이 끼어들었을 뿐이다. 여전히 얼굴을 마주치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많았다. 자신의 의를 내건 싸움은 전면전이 아닌 만큼 외부로 나도는 시간들은 더 길었다. 그래도 피에 젖어 돌아오는 날에는 여자가 있는 처소를 찾았다. 변함없는 얼굴로 앉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잤다. 살갗은 따스했고 그 것으로 좋았다. 검을 휘두르는 동안은 여인을 잊었다. 피로에 지치면 그녀를 찾았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나날에 작은 흐름이 끼어들었다. 손에 쥐고 있는 검과 엉겨붙는 피에 날을 세우고, 사선을 넘으며 목숨을 겨루어도 그 곁으로 가면 편히 쉴 수 있었다. 그 탓일까. 숨을 멈추고 표효하던 과거에서부터 처음, 한번 숨을 들이쉰 기분이 들었다. 변한 것 하나 없는 전장에서 여전히 목숨을 흩뿌리면서도 돌아오는 길에는 불빛 아래 앉아있는 여자의 옷깃을 떠올렸다. 그것은 평화로운 어떤 풍경이었다. 더욱 더 기꺼이 죽음에 몸을 내맡기었으나 삶은 더욱 더 가까웠다.
"백야차의 검이 둔해졌다는 소리가 들려오던데."
"내가?"
"..천둥벌거숭이같은 놈."
웃으며 검을 들어보이자 다카스기는 못마땅한 듯 외면했다. 성실한 것에 반해 신경질적인 데가 있는 어린시절부터의 동기는 여전히 말을 꺼내는 것이 서툴렀다. 인간관계는 지극히 서투르되 마음만은 신의를 다하려드니 그래서 사서 고생을 하는 것 아니겠냐고, 즈라도 근엄하게 말했던 적이 있는 성격이다. 보기만해도 웃음이 나오는 남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카스기 신스케는 여전히 퉁명스러운 얼굴이었다.
"..잃지는 마라."
친우는 길게 말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눈을 허투루 돌렸다며 펄펄 뛰던 시절의 기세가 거짓말처럼 짧게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 것이 그 나름의 걱정이라는 것을 알고 웃었다.
- 그 걱정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그 후의 과거는 달라졌을까.
타 지방에서 활동하는 지사들과의 연결고리를 위한 출정이었다. 조율역인 가츠라를 위시해 다카스기와 긴토키가 떠났고 둔영을 지키기 위해 사카모토가 남았다. 자기가 대신 가도 괜찮다며 사카모토는 여인이 앉아있을 안채에 눈길을 주었지만 긴토키는 고개를 흔들어 거절했다. 얽매이지 않을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하자 사카모토는 갸웃거리다가 어렵사리 수긍했다.
떠나기 전 안채를 들러 짧게 말했을 때 여인은 평소처럼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목소리는 다를 것 없었으며 무언가 다른 기색이었다. 그녀를 응시하자 여인은 평소와 다르게 머뭇거렸다. 다녀오시면 할 말이 있다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지금 말해도 괜찮다고 할 생각이었으나 그녀는 말을 바꾸는 성격이 아니었다. 다녀와서 이야기하자고, 그렇게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오면서 돌아본 여인은 깊게 고개를 숙인 채 배웅하고 있었다.
꼬박 3개월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둔영은 폐허가 되어있었다.
도착하기 사흘 전에 벌어진 공격이었다. 싸움에서 수급을 잃은 한 천인들의 보복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충격을 남김없이 원망으로 돌렸다. 길고 끈질긴 추격 끝에 그들은 기어이 자신들을 공격한 자들의 본거지를 알아냈다. 타협도 정의도 없이 복수만이 쏟아져내렸다. 습격은 순식간이었다. 긴토키 일행이 돌아왔을 때 반쯤 타다 부서진 둔영 안에는 무참하게 죽은 시신들만이 남아있었다. 제일 처음, 다카스기가 죽어넘어진 자신의 부하들을 보고 길고 높은 비명을 질렀다. 가츠라가 넋을 잃은 것처럼 휘청이며 걷다가 주저앉았다. 그 때만큼은 그도 다카스기를 달래지 못했다.
생존자는 단 두명이었다. 무너진 헛간 뒤쪽에서 피범벅이 된 사카모토 다츠마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었다. 다리에 남은 상처는 천인들이 남기고 간 것이 아니었다. 적이 강하면 도망치라는 것을 장난스레- 그러나 진지하게 신념으로 삼고 있었던 그였으나 겹겹이 쌓인 포위망 속에서는 그럴 수도 없었다. 열에 들뜬 그의 헛소리 속에서 자신의 다리를 벤 부하에 대한 원망과 회한이 쏟아져나왔다. 검을 쥐고 죽을 자리를 찾으려 한 대장을 부하들이 쓰러트렸다. 그들은 그의 신념을 죽이고 그를 살렸다. 수색작업끝에 발견된 또 하나의 생존자는 심부름을 하며 돌아다니던 열살배기 어린아이였다. 그는 아궁이 속에 처박힌 시체들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망연한 상태의 소년은 긴토키를 올려다보는 순간 겨우 정신을 차렸다. 눈에 빛이 돌아오자마자 소년은 울먹이며 말했다.
-아씨가. 아씨가.
여인의 시체는 금방 찾았다. 언제나 앉아있던 방안이었다. 모로 누워있는 시신은 악의로 점철된 무언가에게 갈아먹히기라도 한듯 처참했다. 갈갈이 찢긴 옷자락부터 다다미 위에까지 피와 살점이 튀어있었다. 긴토키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시신을 안아 일으켰다. 그녀만은 단숨에 죽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무참하고도 처참히, 짓이겨지다시피한 시신의 다리가 힘없이 흐느럭거렸다. 피로 으깨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얼굴에서 여인의 흔적을 읽어내기는 어려웠다. 겨우 남아있는 턱에서 생전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을 뿐이다. 난자당한 동체에 어지러히 피와 무너진 내장이 흩어져있었다. 그 안에서 긴토키는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보았다.
뇌리에 비명이 치솟았으나, 꽉 막힌 입을 넘어서지 못하고 머리 속에서만 수천 개의 파문을 만들며 내리꽂혔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여인의 시체를 놓았다. 시신의 반쯤 잘려나간 손목에 옆에 떨어져있는 단도가 눈에 들어왔다. 재대로 쓰지도 못했을 그 것에는 누군가의 피가 말라붙어있었다. 그녀는 그 단도를 지키기 위해 휘둘렀으리라. 필사적으로 검을 쥐었을테지. 오열이 심장을 죄어왔으나 얼어붙은 입술 너머까지 흘러내리지 못했다. 심장을 쥐어뜯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상황을 보러온 가츠라가 문을 열고 거칠게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으나 목소리는 머리 속에 번지는 파문에 흩어져 형태를 띄지 못했다. 시신의 곁으로 다가선 가츠라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무참한 여인의 시신을 덮어주었다.
사카모토와 어린 소년 외에 둔영에서 달리 끌어낼 것은 없었다. 남아있는 폐허에 불을 붙였다. 묻어줄 수도 없다는 사실에 다카스기가 비명처럼 오열했다. 긴토키는 불꽃이 날름거리며 둔영을 태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둔영과 그 안 곳곳에 누워있을 이들이 새빨간 불꽃을 타고 구름진 하늘 위로 타올랐다. 타오르는 열기를 타고 시체의 악취와 참혹한 피냄새가 널리퍼졌다. 다 타고나면 그조차 남아있지 않을 것들이었다.
그 언제처럼 야차가 될 수도 있었다. 칼을 꺼내들어 달려들고, 분노로 미칠 수도 있었다. 심장 한쪽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빈 수레가 돌 길을 달리는 것처럼 그렇게 빈 자리가 무너질 듯한 소리를 냈다. 그 가슴을 끌어안고 울 수도 없었다. 껍데기만 남은 심장이 텅 빈 소리를 냈다.
두번째의 상실은 그녀와 함께 심장의 무언가도 가져갔다.
"긴토키, 배고프다 해."
"오늘 당번 신파치잖아? 왜 가만히 앉아있는 아저씨한테서 찾으십니까? 나도 배고파."
"신파치 누님 집에 갔어. 나 배고프니 먹을 거 만들어내라 해."
"명령조냐? 명령조야?!"
"부탁조다. 사람말을 곡해하는 건 나쁜 버릇이라고 누님도 그랬는데 긴토키는 인간이 왜 그러냐 해?"
"카-구-라!! 너 신파치네 가지마! 옳는다!"
애는 백날 키워야 헛거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긁적긁적 배를 긁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카구라의 어린 걸음이 뒤에서 종종거리며 따라왔다. 만들어봤자 김뿌린 밥 내지 달걀 얹은 밥같은 것밖에 안될 텐데 내가 만드는 게 차라리 낫긴 하지. 어제 저녁 신파치가 만들었던 반찬이 얼마나 남았었는지를 가늠해보며 어슬렁어슬렁 쌀을 꺼냈다. 북북 씻어 밥통에 얹히는데 거실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사다하루거나, 카구라거나, 혹은 둘 다다. 쑤시는 두통을 무시하고 들리는 소리도 무시했다. 밥이나 하자, 밥이나.
"긴토키-! 사다하루가 탁자 밑에 숨겨둔 다시마 초절임 꺼내려다 거실 탁자 부숴놨다 해!"
"카구라야, 솔직해라. 니가 부쉈지?"
"..어떻게 알았냐? 긴토키 소머즈냐 해?"
"아니어도 알거든!! 초절임에 눈 머는 게 너냐 사다하루냐 요녀석아?!"
화낼 요량으로 한 말에 카구라는 천진하게 눈을 반짝이며 감탄의 말을 내놓았다. 요놈의 꼬맹이가. 존경가득한 파란 눈동자를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어른이 되서 싸우지 말자는 마음으로 참을 인을 세번 외우고 어제 먹다 남은 고기감자조림을 다시 데웠다. 옆에서 군침 흘리며 쳐다보던 카구라는 또 뭐가 생각났는지 바쁜 걸음으로 거실로 갔다. 부수지만 말라고 염불을 외우며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어린아이의 뒷모습은 무섭게 귀여웠다.
- 살았다면 저만 했을까.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아직도 안 잊었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아마 얼굴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으리라. 가슴 어딘가가 텅 비어서 빈 소리를 내고 있다고 문득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중에 하나였다.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다는 것도 알았기에 굳이 생각하지 않고 미뤄놓은 일중 하나이기도 했다.
새빨갛게 젖은 시신과 그 위를 덮던 짙은 색의 하오리.
난자당한 뱃속에서 형태도 갖추지 못하고 죽어간 아이.
입안에서 쓴 맛이 고였다. 떠올리기 시작하면 무너질 것을 안다. 세월의 무게가 무겁게 쌓여도 그 풍경만큼은 언제까지고 뇌리에 박혀있을 것같았다. 통째로 가라앉혀 과거로 묻어놓지 않으면 또다시 표류할 것같은 기억. 지우려고 애쓰는 사이에 그 위에 쌓이는 감정들만 모두 깊은 곳으로 묻어버렸다. 그런데도, 바쁘게 덧발린 일상중에서 그 것만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마지막까지 움켜쥘 듯 배 위를 감싸고 있었던, 그 피에 젖은 손가락만이.
fin.
03.라일락 (Lilac) : 젊은날의 초상, 첫사랑의 기억
모처의 동인설정을 이야기하다가 꺼내본 망상. 과거 긴상의 여자는 절대 있었으리라는 게 공통된 이론이더라구요. 사랑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잃었을 때 함께 자신의 일부도 무너지는, 그런 여자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자가 아니라 그냥 소요 선생님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