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방식이 있다는 걸 당신이 알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내가 살아온 방식은 아마 많은 사람들과 다를 거에요. 상대와 이야기하고 눈을 맞추는 그런 것들과는 좀 다른 시각에서, 나는 사람들과 접촉하고 이야기하는 법을 배워야했어요. 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와 비슷한 방식이에요. 물살을 타고 쏜살같이 내려가다가도 가끔은 격류를 거스르며 더듬어 올라가야하는 그런 삶이죠. 물고기와 비슷해요. 날렵하고, 잘 빠져나가고, 그러면서도 미끈거리는게.
그래서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당신의 삶이 단순하다고 생각했어요."
소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감정도 스며있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이제껏 한번도 그러한 단어로 불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날 때부터 모든 부를 가지고 있었던 소년은 천재였고, 부 위에 쌓아올린 그의 지식은 범인은 결코 가질 수 없는 대상이었다. 부를 한꺼번에 지니는 사람들을 보고 누군가는 그들이 사회의 의면을 볼 수 없는 자들이라 평했었지만 그 평가자들조차도 감히 토니 스타크를 그 반열에 올리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항상 시대의 총아이며 명성의 정점에 서 있는 젊은 귀공자였고, 철옹성과 같은 갑옷을 가진 이후부터는 시대의 영웅이었던 것이다. 살아오면서 한번도 고개 숙여본 적이 없는 남자는 처음들어보는 평가에 당황하지 않았다. 감정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그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짙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소녀는 웃었다.
"무례한 말이라고 화내지 않으세요? 곧장 싸우려드실 줄 알았어요."
"미래의 내가 이미 싸웠을 것같아서."
솔직하게 말한 감상이었다. 소녀는 방울소리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가볍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길거리에서 봤다면 적어도 6,7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관심을 두지 않을 법한, 그런 어린 아이. 한번 말을 거는 일 없이 잊어버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열 네다섯살이나 됐을 법한 작은 그 소녀는 그를 알고 있었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자택, 암호로 잠겨진 책상 위에서.
한쪽 무릎을 세워 끌어안은 소녀는 웃으며 토니를 내려다보았다. 녹색 눈동자가 장난스레 반짝였다.
"사실 그랬어요. 처음 만났을 때는 굉장했죠."
"내가 화냈나? 어린애한테? 때렸어?"
"아뇨, 염려마세요. 저였으니까."
"뭐?"
"싸움을 시작한 게 저였어요."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소녀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붉은 고수머리 끝이 순간 이지러지는 듯 보여 토니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소녀는 농조로 말했다.
"만나자마자 제가 당신의 배에다 한방 날렸거든요."
"수트를 입고 있었나?"
"네."
"용케도 손이 무사했군?"
"용케도 당신의 배가 무사했죠. 합금 티타늄은 잘려나갔지만."
소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거기에 빛같은 것이 고였다가 사라졌다. 뭔가의 능력인 것을 감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토니는 긴장했으나, 그 것은 반딧불처럼 한번 깜빡이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아이가 다시 웃었다.
"무서우셨어요?"
"..."
"솔직하지 못하신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옛날이라고 하면 안되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를 쳐다보며 토니는 머리 속을 정리했다. 물어야할 질문과 의문들이 어지럽게 피어올라 머리 속에서 흩어져내렸다. 심호흡을 깊게하고 토니 스타크는 자세를 바로했다. 몸을 웅크리고 앉은 작은 고양이같은 소녀는 녹색 눈동자에 빛을 품고 토니를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미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그 질문은 소녀의 마음을 꿰뚫은 것처럼 보였다. 아이의 얼굴에 맺혀있던 웃음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자신이 혹시 다른 괴물을 자극한 게 아닌가해서 토니는 한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허리를 펴고 책상 위에서 뛰어내렸다. 고양이 같이 유연한 몸짓이었다. 소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건 말할 수가 없어요. ..말한대도 내 세계는 바뀔 수가 없거든요. 단지 갈래만이 늘어설 뿐이죠."
"타임 패러독스라도 된다는 건가?"
"과학적으로는 제가 이 곳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과학을 기반으로 히어로가 된 당신이 믿어주리라는 생각은 안했어요."
"믿어. 과학적으로 네가 이 곳에 서 있는 건 시간여행이 아니라도 불가능하거든."
"..대답이 빠르시네요."
"시스템을 설계한 게 나야. 외부인이 들어올 빈틈이 있을 것같아?"
"-자기 발명품과 과학계의 근본이 되는 이론을 같은 무게로 비교하는 건 당신 정도일 거에요."
"당연하지. 토니 스타크가 둘인 건 아무리 미국이라도 버거울걸."
"그렇죠. ..모두에게도."
경계를 풀지 않으면서도 농담처럼 던진 말에 소녀는 곱씹듯 고개를 숙였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무언가의 단서가 될까 생각하는 순간 눈 앞에서 소녀가 사라졌다. 다음 순간에 토니는 목에서 서늘한 감촉을 느꼈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녹색 눈의 소녀가 서 있었다. 손날을 목에 들이댄 채.
어린 여자아이의 손은 평소같으면 위협이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목을 누르고 있는 손의 주인은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긴장한 채 멈춰선 토니의 귓가에, 어린 소녀는 발돋음을 해 조심스레 속삭였다.
"-단순한 당신의 눈으로 평가하지 말아요. 지옥을 만들고 싶지 않으면."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소녀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가 있었다. 토니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허공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술끝에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말했잖아요. 당신의 삶이 단순하다고. ..그 눈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뭐가 단순한지 물어도 되나?"
"시대의 총아. 젊은 황제, 정상에 선 탕아. -어느 부분이 복잡한 거죠? 단순함? 어리석음? 유치함?"
"난 유치하지 않아."
"그러니까 열 다섯짜리 여자애보다 고차원적인 사고방식을 하시겠죠."
"열다섯?"
"쓸데없는 데에 눈독들이지 마세요. ..전 경고했어요. 용납할 수도 없으니까."
"뭘 용납할 수 없다는 거지?"
붉은 머리를 흐트러트린 채, 그녀는 냉정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작은 고양이가 털을 세운것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차갑고 선명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새겨둘 듯 천천히 말했다. 그 말 내부에 억눌러담은 감정은 한없이 차가웠다.
"-당신이 우리들의 세계를 망치려드는 거요."
다음 순간에 소녀의 모습은 허공에서 사라졌다. 토니는 잠시 그녀가 사라진 지점을 바라보았다. 손뼉을 쳐서 불러낸 자비스는 그녀가 있었던 공간을 더듬었다. 잔여 에너지량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평온했다. 토니는 입맛을 다셨다. 입술끝에 남은 감정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어땠어?"
"경고는 했어요. 통하지는 않겠지만."
"감상은 어땠어?"
"지금보다 열 배는 더 단순하던데요, 당신."
붉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내린 레이첼 서머즈는 길게 몸을 폈다. 흡사 기지개라도 펴는 것같은 단순한 몸짓이었다. 약간의 피로함, 그리고 근육통. 시간이동 이후 그녀가 받는 리스크는 겨우 그 정도였다. 고개를 한번 흔들고서, 탁자 위에 앉은 소녀는 과거과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아이언맨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새삼스레 굉장하다 싶어지는군."
"당신은 나이를 먹었죠. 나는 아니었구요. 대수로울 것도 없어요."
"유연한 사고방식이야."
"경직되진 않았죠. 나는 어리니까요. -하나 물을게요, 토니 스타크 씨."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고, 그녀는 탁자 위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내려선 그녀는 아이언맨보다 한참 작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아이언맨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당신의 판단을 후회하나요?"
"모든 상황은 더 나빠질 수 있었어. 나는 그걸 통제하려고 했을 뿐이야."
"이상론이군요, 스타크씨. 캡틴 아메리카도 같은 대답을 했을 걸요. <나는 상황이 나쁜 곳으로 치닫는 것을 막으려고 했을 뿐이다>라고요."
"우리는 모두 몰살 당할 수도 있었어."
"예, 그리고 지금은 일부가 죽었죠."
아이언맨은- 토니 스타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첼은 비웃듯이 입술 한쪽을 올렸다. 경멸은 아니었으나 호의어린 미소도 아니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그를 보지 않는 그녀의 시선은 벽에 걸려있는 액자에 닿아있었다. 아이언맨은 그녀가 하고자하는 말을 알 수 있었다. 액자안의 누군가는 그의 말에 찬성했고, 누군가는 거절했다. 레이첼의 입술사이로 한숨같이 낮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내가 태어났을 때에도, 태어나기 전에도 뮤턴트들은 언제나 감시대상이었어요. 우리는 당신에게 반대할 수도 있었죠. ..뮤턴트들이 중립을 지키기로 한 건 이 상황이 쉽사리 손 댈 수 없는 복잡한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에요. -나도 알았죠."
"...레이첼."
"나를 통해 당신은 과거의 자신에게 경고했어요. 그래서 무언가가 바뀔 것같나요?"
"나는-"
"당신은 지금도 단순해요, 왕좌 위의 어리석은 왕이죠."
"..."
"두 손에 은화가 돌아오고 이마에 동료들의 피가 묻은 걸 축하해요."
씹어뱉듯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발꿈치를 들었다. 차가운 가면의 뺨에 그녀의 입술이 스쳤다. 아이언맨은 그대로 굳어있었다. 고개를 들고 레이첼은 웃었다. 그녀의 입술에 와서 닿았던 것만큼이나 서늘한 미소였다.속삭이는 목소리는 작았다.
"유다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라고 해둘게요."
한톨의 목소리를 남기고 그녀는 그를 비켜 문으로 걸어나갔다. 아이언맨은 잠시 그녀를 붙잡을까 망설였다. 결국 그는 그녀를 붙잡지는 못했다. 다만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고마워, 레이첼. 맥없는 목소리는 작았으나, 일순간 레이첼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보는 일은 결코 없었다.
홀로 남은 아이언 맨은 가면을 벗고 자신의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땀에 젖은 시야 속에서 벽에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 때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법안을 제안했을 때 누군가는 찬성했고, 누군가는 반대했다. 누군가는 여전히 살아있었으나, 또 누군가는. 토니 스타크는 눈가를 문질렀다. 지친 피로가 뺨에 맺혀 굴러내렸다.
가면 위로 소녀가 남기고 간 입맞춤이 각인처럼 따가웠다.
fin.
캐릭터 크로스를 써달라고 했는데 어째 시빌 워 기반이 되었습니다.
둘다 읽고 나니 그냥 레알 답없다는 생각만이..orz 뮤턴트들은 중립을 지켰다길래 레이첼과 토니의 만남을 쓱쓱 써봤습니다. 집단적으로 마주친다면 무시하겠지만 개인적으로 만난다면 싫어하는 편에 가까울 것같은 레이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