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10년정도 흐르다보면 과거의 기억들은 어딘가에 내려앉는다. 어느 정도는 흐려지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하다. 죽어도 잊혀지지 않을 것같은 장면들은 점차 희미해진다. 이어지는 필름처럼 반복될 것같은 그 날의 사건들은 천천히 무너져내린다. 그 것의 반복이다. 언제 1층으로 내려왔는지. 에이미가 풍선을 들고 달려갔던 것이 먼저인지, 식사를 했던 시간이 먼저인지. 시계탑 언저리에 주저앉은 여동생을 달래던 것이 먼저인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이 먼저인지. 언제까지 선명할 것같은 기억들이 섞여들어 희미해진다. 마음 속에 새겨둘 것처럼, 그렇게 선명했던 그 날 하루 간의 모든 일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인다.
그렇다면 차라리 감정째로 잊어버리기라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내려앉은 기억 속에서 감정만이 무게를 더해간다. 눈 앞에 흩뿌려졌던 먼지와 돌조각. 건물의 파편에 섞인 시체들. 이미 선명하지도 않은 그 것들 위로 쌓이는 울분이, 공포가, 절망이, 분노가. 무겁게 쌓여올려져 멍울진 심장 위를 짓누른다. 그 무게가 목소리가 되었다. 너만이 여기에 있으니, 너는 그 사건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야한다고. 너는 그 것을 위해 여기 있다고.
10년이나 기억이 반복되다보면 어떤 내성같은 것도 적당히 생겨서, 지워지지 않는 감정이나마 가벼운 척 묻어둘 수 있게 되었다. 언제고 터져나올 것을 알면서 외면하는 상처는 언제라도 무거웠다. 정면으로 마주하는 법도 없이 묻어둔 상처에는 언제나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를 구태여 고치려 들 이유도 없었다. 그 목소리는, 그 무게는 가벼워지거나 내려놓아도 좋은 류의 고통이 아니었다. 그 것이 언젠가 그들에게 돌려줄 감정이라 생각하면 썩 그리 아프지만도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평온한 것처럼 웃는 얼굴 뒤에 스미는 감정만이 복잡하게 어우러져서, 간데없이 뭉그러져 썩어있었다.
이기지도 못할 술을 마신 것은 다음 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 일 없는 머리 속에는 쓸모없는 잡상만이 자꾸 떠올라 괴로웠고 왕 가의 소유인 크루즈의 카운터 바에는 맥주부터 위스키까지 동서고금의 술이 모여있었다. 이 건 누가 좋아했던 술, 이건 또 누군가가. 쌓이는 기억을 더듬어 익숙한 술 몇 병을 들고 나오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마침 올라온 크루즈의 갑판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아무 일 없이 한가로울 스케줄은 자제해야한다는 이성의 외침을 쉽게도 잊게 해주었다. 적당히 앉아 술잔을 따고, 또 적당히 집어온 안주를 풀어놓고 홀짝홀짝 들이켰다. 어두운 바다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또 얼마간은 외로운 느낌이 나서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도 들었던 것같다. 연거푸 술을 들이키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아이가 서 있던 것이 이상하게 아무 문제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록온 스트라토스."
"여어, 티에리아."
소년이 발음하는 이름이 자신의 것처럼 들리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다가, 겨우 현실을 겹치고는 싱긋 웃었다. 그 때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놀란 것처럼 보이는 소년의 표정이 신선해서 웃었다. 그가 자신을 보고 놀라고 있다는 것은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같던 어린 동료는 말없이 곁으로 왔다. 수없이 쌓인 술병들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긴 했으나, 별말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술을 마시는 건 처음보는데요."
"스나이퍼가 마실 건 아니지."
"오늘은 아니라 이겁니까?"
"휴가잖아."
손에 든 잔을 흔들었을 때, 유리마냥 서늘하던 소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시선을 돌리는 옆얼굴에 바닷바람이 쓸려올라가듯 머리칼을 흔들었다.
"당신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저도 사람입니다만?"
"..저도 한 잔 주시겠습니까?"
"네가? 술을?"
또다시 한잔을 털어넣으며 장난스레 내뱉은 말에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반쯤 당황해 술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냐고, 그렇게 물으려 할 때 조금은 복잡해보이는 얼굴로 티에리아가 살풋 웃었다.
"저도 사람입니다만?"
자신의 말을 그대로 따라 덧그리는 듯한 목소리에 잠시 벙쪘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익숙하지도 않은 농담을 꺼낸 연하의 마이스터는 조금 난감하다는 양 시선을 돌렸다. 밤의 어둠에 묻혀서 잘 보이지 않는 그 얼굴이 아마도 흔히 볼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겠다 싶어 즐거워졌다. 안주로 꺼내왔던 커피 땅콩을 다른 접시 한켠에 부어놓고 그 그릇을 집어들어 찰랑찰랑하게 술을 따랐다. 무슨 짓이냐는 표정이 된 티에리아에게 방금전까지 입에 대고 있던 잔을 건네고, 대신 그릇을 집어들었다.
"건배?"
"당신이라는 사람은.."
장난스레 한 말에 뭔가 말하고 싶었던 것처럼 황당해하던 티에리아는 이내 고개를 내젓고 잔을 받아들었다. 유리그릇과 유리잔이 부딪혀 투명한 소리를 내었다. 선뜻 마시지 못하고 잔을 들여다보던 티에리아는 결심한듯이 액체를 들이켰다.
"푸아-! 좋다!"
"..아저씨, 같은 감상이군요."
"어차피 꺾인 나이가 곧입니다. ...취했어?"
"-괜찮,습니다."
"..술 처음이구만."
"불만이십니까."
쓴맛이 핑 돌았는지 예쁜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어린애가 술마시면 안되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안주그릇에 손을 뻗어 커피땅콩을 하나 집어 그 입안에 넣어주었다. 어린 동료는 흠칫 놀라더니, 손사례를 치며 재촉하자 이내 조심조심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를 보는 부모같은 심정으로 조금 개인 그 얼굴을 보다가 겨우 결벽증이 있는 동료에게 입을 댄 잔을 건냈다는 게 생각났다. 조금 놀라 눈치를 봤지만 티에리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릇에 손을 뻗어 안주 하나를 더 꺼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까 마시던 잔 줬는데 괜찮아?"
"괜찮습니다."
"남이 건드리는 거 싫어했잖아."
"..괜찮습니다."
쉽게 취하는 체질인지, 한 잔에도 티에리아의 얼굴은 한껏 붉어져있었다. 띄엄띄엄 대답하는 게 많이 먹이면 안되겠다 싶었을 때 동료의 입에서 한숨같은 한마디가 쓸려나왔다.
"-당신이니까."
"...네?"
얼핏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을 때, 티에리아는 죽어도 대답해줄 마음은 없다는 듯이 커피땅콩을 또 입안에 털어넣은 직후 술을 따라 꿀꺽꿀꺽 마셨다. 야, 자작하면 옆 사람은 7년간 애인이 없다는데요.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는 사이, 병을 집어든 티에리아는 다 비운 록온의 그릇을 다시금 넘실넘실 채웠다. 덤으로 자신의 잔에도.
"건배?"
잔을 들어올리는 티에리아의 얼굴은 이미 귀밑까지 붉어져있었다. 술 약한 동생이라는 것도 귀엽구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에 담긴 술을 들이키자, 차가운 불은 식도를 타고 위까지 쏜살같이 내려갔다.
어두운 바닷가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서늘하니 기분좋다고도 생각했다.
술이 얼큰히 들어갔을 때는 새벽을 지나있었다. 몽롱해진 머리로 한잔 더를 외치자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휘청이고 있던 티에리아가 술병은 다 비웠다고 냉정하게 지적했다. 몸을 못 가누는 티에리아를 들처업다시피하고 카운터 바로 내려가 있는 술을 다 꺼내서 또 마셔댔다.
이건 마르가리타. 내 전 동료가 좋아하던 칵테일이야. 비율 못맞춘다고 어찌나 괴롭혀댔는지. 아랍권의 테러 단체가 공성전을 벌였을 때 같이 저격수로 서 있었지. 에밀은 동쪽. 나는 서쪽. 그 쪽에서 던진 폭탄이 건물에 맞았어. 재수없게 녀석이 있던 부분이 함몰되었지. 실패한 작전이었어. 전날까지 같이 마셨는데. 유가족에게 돌아갈 시신이나 찾았었을까. 이건 진 토닉. 감기걸렸을 때 먹으면 좋다고 챙겨주던 녀석이 있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그 놈도 일찍 죽었지. 가늠쇠 머리판이 빛을 반사하는 바람에 상대편에게 걸렸거든.
해서는 안되었던, 할 마음도 없었던 말들이 거짓말처럼 술술 흘러나왔다. 평소라면 기밀사항을 운운하며 화를 낼 법한 티에리아도 술에 쓰러졌는지 턱을 괴고 앉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바의 카운터 위에 술병들이 우르르 늘어서고, 의자에 앉은 티에리아에게 술 몇잔을 건네며 그 나무 카운터 위에 앉아 술병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쓰고, 달고, 시고. 혀도 돌아가지 않을만큼 취했을 때에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붙잡아서 둘 다 숙소로 향했다. 피차 다리를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방까지 들어오는 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방에 들어가서는, 겨우 혼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문득 생각난 파트너를 찾아 방안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펠트의 방에 있을 거라는 걸 겨우겨우 떠올렸다. 내일 일찍 일어나기는 글렀구나 싶어지다가도 가장 잔소리를 해댈 어린 동료도 함께 엉망으로 취해있었다는 걸 생각하자 또 짧은 웃음이 나왔다. 방안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뭐가 그렇게 우습냐고 묻는 것같아서, 술이 우습다고 대답했다. 한숨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오더니 눈 앞에 하얀 손이 떠오르는 것같은 착각이 일었다. 무심코 그 손을 붙잡았다. 감촉이 있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손은 인간의 것같지가 않았다. 에이미. 그렇게 순간 불렀다. 하얗고 어린 손에는 상처가 없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건물 사이에 널려있듯 걸쳐져있던 어린 여동생의 새하얀 팔이 생각났다. 그 동생이 지금, 이 곳에 온전한 모습으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면 어머니의 손이거나, 에이미의 손이거나, 혹은 라일의 손이거나. ..어쩌면 그 모두의 손이거나.
어둠 속에 떠올라있던 손이 뿌리치려는 듯 비틀었다. 놓아주고 싶지 않아 팔을 끌어당겼다. 짧은 비명과 함께 딸려오는 몸이 있었다. 작고 여린 몸이었다. 어머니, 에이미, 혹은 어린 남동생. 기억이 어지럽게 일었다. 지금 이 순간 이 곳에 그 때 놓쳐버린 것들이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라일.
저도 모르게 동생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꼭 그 때의 자신만큼 어리고 작았던 동생을 보호하고 싶었다. 동생은 떠나고 싶지 않아했다. 자신 내부에 쌓여있던 것을 그에게 옮겨줄 수는 없었다. 최초의 반항을 단호하게 야단친 후에, 떠나라고 했다. 입을 다물고 있던 어린 형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문도 재대로 하지 못하고, 어떤 변명도 듣지 않은채 멀어지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를 이 곳에 둘 수는 없었다.
본디부터 벌어져있었던 선이 그 사건 이후로는 붙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동생이 자신을 동경하거나, 혹은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닐,닐이라고 함부로 부르던 호칭이 점차 형으로 굳어져갔을 때, 그 것을 가장 싫어한 것은 닐 디란디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과 형을 대등한 위치에 놓지 못하게 된 동생에게 다른 말을 하는 건 그것대로 너무 잔인할 것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자신이 형으로서 강요했던 그 날에, 라일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형제에 대한 어떤 감정을 잘라버렸다.
자르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버리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래도 버린 것은 닐 디란디였고, 버림받은 것은 라일 디란디였다.
사실은 아무 것도 놓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동생의 작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자신과 비슷하게 성장해있을 동생의 몸은 꼭 헤어지던 그 때만큼 어렸다. 아무 것도 놓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말하며 애정을 담아 입술을 대었다. 차갑고 서늘한 피부에 얼마간 열이 올랐다. 꿈 속의 꿈처럼 서늘한 그 몸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엉망으로 엉켜있는 기억이 터지는대로 말들을 쏟아냈다. 함께 일하다 사라진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을. 동생에 대한 사죄를. 품안에 끌어안은 과거가 현실이길 바라는 것처럼 몇번이고 몇번이고 애무하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상냥한 팔은 말없이 다가와 뺨을 스쳤다. 울고 있었다는 걸 그 때 알았다. 어린아이처럼 우는 법은 오래전에 잊었다. 그래도 그 순간에 그 팔에 감싸여서 오열했다. 어린동생의 팔은 몇번이고, 몇번이고 상냥하게 토닥여주었다.
저로서는 드물게도 재대로 된 애정행각을 나누는 록티 되겠습니다(...) 놀랍게도 상,하로 나뉘는 이유는 시험주간이라. 제가 생각하는 록티의 (유일한) 베드인가능성 루트는 이렇습니다. 실은 죽을 때까지 그럴리 없었다쪽을 지지하지만, 그래도 같은 이불에 넣고 싶은 게 팬심.
절대 손을 내밀리 없는 남자이니 일이 벌어진다면 절대로 착각내지는 실수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동생으로 오인하고 술에 취해 베드인이라니 이 얼마나 썩은 다메남입니까. 어이구 좋다.
실제로 닐x라일 루트를 탄 적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냥 마음에 엉겨붙은 상처가 깊은 거지.
록온을 생각하다가 티에리아와 세츠나를 보면 본성대신 이상만을 보고 자란 애들은 본판보다 훨씬 나아지는구나 싶습니다.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