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 디란디, 아니 록온 스트라토스는 방구석에 단단히 틀어박힌 천뭉치를 보고 오늘 몇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천뭉치는 한숨에 반응하듯 움찔하더니, 이내 절대로 굴하지 않겠다는 양 더 단단히 말렸다. 둔하게 짤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가 인질로 잡은 하로의 저항아닌 저항이었다. 시트 사이로 보이는 갈색 고수머리를 울고 싶은 심정으로 쳐다보다 라일은 다시 조심스레 접근을 시도했다.
"가야지, 크리스."
"안-가."
"크리스."
"안가!"
"이번에 놓치면 열 네시간이나 기다려야 해."
"아--안--가!!!"
어린 꼬마숙녀의 마지막 목소리는 거진 짜랑짜랑한 비명이 됐다. 크리스가 끌어안고 시트로 꽁꽁감긴 하로는 한층 거세게 발버둥쳤다. 너 지금 그거 크리스에게 동의한다는 거냐. 라일의 머리속에서 시트 아래서 잔뜩 울상이 되어있을 딸의 표정과 스메라기가 일그러진 미소를 띄우고 일곱번째로 끊어다준 승선표가 저울에 올려졌다. 덤으로 다음부터는 세 배로 돈 낼 줄 알라고 일갈한 궤도 스테이션의 가격표도. 평소같으면야 두말 없이 딸아이 쪽으로 기울 눈금은 오늘따라 굳건하게 승선표가격쪽으로 기울었다. 어차피 이번에 안태워도 다음에는 태워야된단 말이야. 울고 싶은 기분으로 라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리-스! 우왓! 가만있어! 가야되는 거 알잖아!"
"싫어!"
"너 그러다 또 아프다?"
"안-아-파-!"
"애한테 뭐하는 짓입니까?"
"티-"
"티에리아!!"
아이를 감싼 시트 뭉치를 벗겨내려고 격투를 벌이는 라일을 보고 어느 샌가 문간에 와서 서 있던 소년외관의 마이스터는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를 던졌다. 라일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크리스는 반색을 하며 라일의 팔 아래를 총알같이 튀어나와 티에리아의 품에 달려들었다. 티에리아가 허리를 굽혀 달려드는 아이를 지극히 우아하고 익숙하게 받아안고 토닥거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2초. 어쩐지 먹이를 놓친 사냥꾼의 심정이 된 라일은 그 자리에 벙쪄서 멈춰졌다. 냉랭한 눈길로 라일 디란디를 위 아래로 천천히 흝어본 티에리아는 단호한 감상을 내뱉었다.
"변함없이 교섭능력은 제로에 수렴하는군요."
"..보고 있었으면 좀 도와라 너.."
"티에리아는 그런 짓 안해!!"
반박할 말도 나오지 않아 기운없이 중얼거린 라일을 향해 크리스는 저항의 한마디를 외쳤다. 라일이 뭐라 반응하려는 찰나, 어린 딸은 아빠의 얼굴은 보기도 싫다는 양 티에리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어쩌고 하면서 라일이 고개를 푹 숙이고 훌쩍거리는 사이, 어느새 상황파악을 끝낸 티에리아는 아이의 작은 등을 다독이며 달래주었다.
"지상에 가기 싫은 거니?"
"응. ..아프고 말래."
"난 네가 안아팠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싫어. 거긴 다리가 무거워."
"나도 그 점은 싫었어. 익숙해질 거야."
"그래도 가기 싫어. 그러니까 안 가."
"내가 부탁해도?"
"..."
아이의 붉은색 눈동자가 한층 짙은 색을 띄었다. 미안해하는 표시다. 곤란한 듯 고개를 돌린 아이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울것처럼 보여 티에리아는 조금 조바심을 내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작은 어깨에 뺨을 대고, 속삭이듯이.
"같이 가도 안돼?"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이는 살피듯이 고개를 들었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아까보다 훨씬 가벼웠다. 눈치를 보는 양 아빠 쪽을 한번 돌아보다가, 크리스는 티에리아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아이스크림 사줄 거야?"
"그럴게."
"같이 쇼핑도 하고?"
"응."
"전자공학 책 사도 돼? 펠트가 가르쳐준 거."
"좋아."
"...그럼 갈래."
"착하다, 크리스."
"나 그럼 세츠나한테 말하고 올래!"
"다녀와."
가볍게 웃으며 티에리아는 아이를 한번 끌어안아주었다.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어린아이는 그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안았던 손을 놓자 크리스는 그림처럼 유연한 몸짓으로 티에리아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는 것만으로 바닥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라일을 한번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시트 쪽으로 달려가 둘둘 말려있는 하로를 끄집어낸 크리스는 하로와 나란히 룸 도어를 밀어젖히고 복도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기 전까지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티에리아는 침대 위에 앉은 라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중삼중사중의 패배감에 젖은 라일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언제봐도 뛰어난 교섭능력이십니다.."
"아직도 그걸 못하는 당신이 바보죠."
"너 말이 차다?"
"제가 언제는 댁한테 점잖았답니까?"
".."
더 말을 길게 해봤자 쥐코도 못건질 걸 아는 라일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이 기회에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늘어놓으려고 했던-애초에 네가 점잖게 말해서 들어먹을 인간이냐, 내가 지금 록온 스트라토스 때문에 참는 거지 너 지금 니 일 얼마나 개판으로 하는 줄 아냐, 너 명중률 95% 안착하려면 여직 멀었다, 애좀 잘봐라등등- 티에리아는 혀를 차며 놓친 기회를 아쉬워했다. 결국 딸을 따라 달려나가버린 하로의 빈자리가 아쉬워 애꿎은 허공에 공을 쳐올리는 시늉을 하는 라일을 성대하게 비웃어주는 것으로 조금 앙갚음하긴 했지만. 라일을 대신에 크리스를 따라게 되버린 티에리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차트를 들어 향후 7일간의 일정을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우리 크루들의 지상 휴식 시기도 한 2주 후니까, 그걸 한 주정도 앞당긴다고 생각하죠. 순차적으로 왔다가면 편할 겁니다."
"소요시간이 길어지면 크리스가 안 좋아할 텐데."
"그래봤자 4,5일 정도에요. 7세 미만의 어린아이는 소요기간이 두배니까."
"그 거 누가 만든 법률인지 좀 뜯어고치고 싶어, 진짜로."
"애 건강을 챙기는 아빠가 좀 되보시죠."
"나도 그러고 싶어."
"..일단 극복이나 하시죠."
한숨을 푹푹쉬는 라일을 단호하게 자르고서 티에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한마디에 거대한 충격타를 먹은 라일을 버려두고 나가는 데에는 한점 망설임도 없었다. 어느 정도는 그를 대신에 지상까지 가게 된 것에 대한 앙갚음도 좀 있었다. 고개숙인 라일은 들릴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고마워, 하고 중얼거렸다. 티에리아는 못 들은 척 밖으로 나왔다.
복도로 걸어나오자, 등 뒤에서 시선이 따라붙었다. 누구의 것인지 진작에 알고 있는 티에리아는 몸을 돌리며 평소의 그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상냥한 얼굴로 웃었다. 어린 숙녀는 작은 미사일처럼 날아와 다리에 매달렸다.
"진짜로 가기 싫어."
"내가 같이가니까, 괜찮아."
"...응."
고개를 끄덕이는 크리스의 귓가에서 갈색 고수머리가 물에 젖은 듯이 흔들렸다. 우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지상을 무척이나 어색해했다. 7세 미만의 아이들은 안정된 정신을 함양하고 신체의 나노머신이 자리잡을 시간을 주기 위해 성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지상에서 보내야한다는 법률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이 꼬마숙녀였을 것이다. 다리에 매달려 떨어질 줄 모르는 아이를 안아들고, 티에리아는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품안에 파고드는 아이를 다독이며 그 다음 말을 입에 담기 전까지, 티에리아는 무척 주저했다.
"지상에 간 김에.. 머리도 하고 올까?"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조금 느린 침묵 이후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티에리아는 방금 전 라일을 한 대 더 쳐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곧 괜찮아질 거야."
".....응."
어린 꼬마 숙녀는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조차 포기해버렸다. 조금 우울해보이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티에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막았다.
크리스의- 아뉴 크리스티나 디란디의 머리카락은 연보라색이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꼭 닮은.
라일 디란디는 연인의 그림자에 발목이 붙잡힌 것처럼, 한참이나 아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크리스의 머리를 염색해준 것은 펠트였다. 아이를 대할 때마다 굳은 얼굴을 하는 라일을 보고 싶지 않다며, 그녀는 조용히 아이의 외관을 바꾸어주었다. 그리고서도 차마 아이의 본명을 부르지 못하는 아버지는, 어린 딸을 볼 때마다 얼굴을 굳혔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가 그 어색함을 깨닫기에도 충분한 태도였다. 아이의 마음 속에서 라일이 차츰 멀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여러가지가 모두 늦어있었다. 아버지이되 친숙하지는 않은 사람으로 라일의 존재가 어설프게 굳어져버렸음을 알았을 때, 티에리아는 그를 어리석은 남자라고 탓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채 아물지도 못한 상처를 감싸쥐기에 급급한 남자 자신이 누구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바보같은 사람."
툭 중얼거린 목소리는 라일에게까지는 닿지 않는다. 품 속의 어린아이는 어깨를 한번 움츠리고, 티에리아의 목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문 너머의 그는 이 작은 손의 온기조차 견뎌낼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한 사람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서. 주변 사람들은 그를 탓할 수조차 없었다. 그가 잃어버린 것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고개를 떨구고 있을 남자를 향해 연민섞인 눈길을 보내고, 티에리아는 조용히 그 문앞을 나섰다.
fin.
아뉴 크리스티나 디란디
약 다섯살, 어머니를 그대로 빼닮은 외관, 머리가 뛰어나게 좋은 것을 제외하면 이노베이터로서의 특성은 전혀 발현하지 않았음. 톨레미 전원이 돌아가면서 키워서 모두의 딸 상태. 애칭은 크리스. 크리스티나의 이름을 붙인 것은 펠트, 강력하게 동의한 것은 라일.
라일은 딸을 대할 때는 매우 어색한 상태. 세츠나는 대놓고 탓하지는 않았으나 라일을 대신해 크리스를 돌보고, 티에리아는 대놓고 갈구며 크리스를 돌봄. 라일은 어느 정도 딸을 돌보고 싶어하고 있으나 재활이 덜된 상태.
..단순히 어린애가 따르는 티에리아를 보고 싶었는데 내용이 안드로메다로 흘렀네요. 평생 고인바라기 선언을 한 라일에게 만에 하나라도 그럴리는 없겠지만 2세가 있었다면 이 사람은 엄청난 과잉보호가 되던가 엄청난 다메파파가 되든가 둘 중 하나일 거라는 느낌. 처음으로 가져본 가족이 남기고 간 단 하나의 생명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Posted by 네츠케